-준표의 집-
약간은 들뜬 분위기에서 아침을 먹은 후 F4는 서재로 이동했다.
재경으로부터 받은 이정의 정략결혼 상대에 대한 정보를 출력해서 검토하느라 잠시 정적이 흘렀다.
준표 역시 자신이 아까 놓친 정보가 없나 꼼꼼히 살펴보고는 제 친구들을 살펴봤다.
예상대로 이정은 짜증이 나서 미간을 찌뿌리더니 제일 먼저 서류를 탁자에 내던졌다.
이정: 기어이 우송을 해외로 진출시키려고...
우빈: 재미교포라... 우리가 이정이랑 가을이 돕지 못하도록 수를 쓰셨네.
지후: 이 여자 경력은 나름 화려하네. 파슨스(Parsons The New School for Design)에서 Design &
Management하고 Art & Design Studies를 복수전공했다니 능력 있는걸.
준표: 능력 있음 뭐해. (손가락으로 이정 가리키며) 당사자가 결혼하고 싶은 여자가 따로 있는데
우빈:(심드렁하게) 제2의 하재경이군.
지후: 성격까지 하재경이랑 닮았다면 얘기는 쉽게 풀릴 수도 있겠네.
준표: 몽키 말로는 제법 프라이드 강한 여자라고 하니깐 이정이랑 1:1로 만나면 잘 해결될지도 몰라.
게다가 유럽으로 유학가고 싶어한다잖아.
친구들의 말을 듣고 있자니 점점 짜증이 더 쌓였다.
이정은 구겨진 얼굴로 투덜거렸다.
이정: 왜 우리가 지금 이런 일로 모여야하는지 모르겠어.
이게 F4이기 때문에 치뤄야하는 대가라면 너무 지독해. 그냥 미국 가서 바로 담판 내고 싶어.
누구보다도 준표가 지금의 이정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었다.
고3시절, 잔디와 교제를 계속 하기 위해 강회장과 얼마나 치열하게 투쟁했는지 몰랐다.
그 때, 다행히도 자신에게는 친구들이 있었고, 그 친구들의 도움으로 잔디도 몇 번이나 자신을 포기하려다가 곁에 남아있었다.
그렇게 때문에 준표는 평소와 달리 비교적 이성적으로 지금 상황을 바라볼 수 있었다.
준표: 운명은 스스로 만드는 거야. 피할 수 없다면 정면승부하는 수 밖에.
지후: 쉽게 얻으면 그게 얼마나 소중한 지 몰라. 그리고 가을인 네 모든 것을 걸고서라도 얻을만한 가치가
있잖아. 안그래?
이정은 가을의 해맑은 미소를 떠올리자 저절로 미소가 피어났다.
그런 이정을 보면서 친구들도 덩달아 웃었다.
우빈: 짜식 웃는 거 봐라~ Hey 이정, 그렇게나 가을이 좋은 거야?
준표: 송우빈 네 녀석이 진정한 사랑을 못찾아서 그래.
지후:(입꼬리 올리며) 너 대답 안했어. 우리 가을이 얻는데 이 정도 고생도 못하겠다는 거야?
가을이가 너때문에 흘렸던 눈물과 가슴앓이가 얼마였는데... 그 애가 수녀원에 들어갔더라면, 아니
소이정 널 마음에 담지만 않았어도 그런 고통 겪지 않았다는 거 누구보다 네가 잘 알텐데...
이정:(고개 저으며) 윤지후 너 정말.... 어쩜 그렇게 내 약점을 거침없이 들쑤시냐....
우빈:(경쾌하게) 그러니까 불평하지 마, 이정. 너밖에 모르는 가을이만 생각하고 대책을 세우자고.
이정은 지금 이순간 가을이 이 자리에 있으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상상을 해봤다.
'아마 지후의 말에 얼굴이 빨개져서 고개를 저으면서 날 열심히 변호해주겠지.'
그런 가을의 모습이 떠오르자 가슴이 뻐근해졌다.
친구들의 말이 옳았다. 마음을 닫고 함부로 남에게 마구 말과 행동으로 상처를 주었던 자신에겐 받아
마땅한 형벌이었지만, 천사같은 가을이 자신의 곁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지금 이 시련을 겪는 것은 지극히
부당했다.
이정: 그래 니들 말이 맞아. 난 지금까지 천사를 쉽게 얻을 거라고 착각했던 거야. 정말 어이없는 착각이지.
지후 말대로 천사를 얻으려면 그에 합당한 노력을 기울여야만 하는데 말야.
더이상 투덜거리지 않을게. 일단 난 내가 모르는 우송과 LKM사이의 거래가 있는지 확인해야겠어.
준표: 나도 신화 미국 법인과 LKM사이의 거래내역을 확인해볼게. 잘하면 압박할 거리가 나올 수도 있어.
지후: 재미있는 사실이 하나 있어. LKM의 안주인이 수암예술센터의 VIP 회원으로 등록되어 있어.
우빈: 그럼 그 말은... LKM이 총수 부인을 통해 이 혼담을 주도하고 있단 말인가?
지후:(고개 끄덕) 가능성 있지. 내 생각엔 다음주에 있을 수암 VIP 회원 초청 공연때 딸을 한국 사교계에
데뷔시킬 거 같아. 이 공연 청중은 국내 상류층 인사들이 절대 다수거든.
우빈: 그럼 그 LKM 안주인의 국내 행적을 확인해봐야겠군. 그건 내가 할게.
준표: 몽키한테 그 여자 출국 일정을 확인해달라고 요청해야겠군. 전세기를 타고 올 수도 있으니까.
이정: 그럼 그동안 난 내부 단속을 해야겠어. 아버지가 이사진들에게 내 정략결혼을 말하지 못하게 말야.
지후: 가을이 다치지 않게 조심해. 몸도 마음도 말야.
이정:(단호하게) 물론이지.
우빈: 자 그럼 임무 수행하러 움직여볼까. 나 먼저 일어날게.
우빈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이정, 지후도 같이 일어났다.
모두 의미심장한 눈빛을 주고 받고는 서로 주먹을 부딛치며 다짐을 했다.
제각각 자신감 넘치는 얼굴을 하고 서재를 나서는 친구들을 보면서 준표도 씩 웃고는 컴퓨터 앞에 앉았다.
이젠 행동으로 넘어가야 할 시간이었다.
-복지관-
어제의 자선공연 성공을 축하하는 파티가 한창이다.
잔디는 복지관 사람들과, 리라는 함께 지도를 했던 수암 오케스트라 소속 단원들과 함께 참석했고, 가을은 파티 중간중간 자신이 작성한 블로그 기사와 어제 공연의 호평을 소개하면서 분위기를 띄웠다.
실내악단 단원들과 가족도 모두 뿌듯하고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파티를 즐겼다.
준표의 지시로 신화 호텔 산하 식음료 담당자들이 만들어 보낸 음식도 즐거운 파티를 만드는데 일조했다.
막판에는 다음 공연을 언제, 어디서 할 것인가를 놓고 흥겹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전국 순회공연을 갖기로 결의까지 맺었다.
-카페-
잔디, 가을, 리라는 복지관의 점심 축하 파티를 마무리 짓고는 함께 모여 차를 모시러 카페로 들어왔다.
잔디와 리라는 서로의 노고를 칭찬하느라 바빴고 가을은 두 사람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가을:(꿈꾸듯) 나도 빨리 졸업해서 더 적극적으로 저 애들 돕고 싶어.
잔디:(화들짝) 가을 넌 지금도 복지관 도서실 일 많이 도와주고 있잖아.
관장님도 너한테 얼마나 고마워하는데. 그런 말 마.
가을: 그래도 어제 공연같은 가시적인 성과가 없으니까 뭐랄까 그냥 좀...
리라는 두 사람을 보고는 방긋 웃으며 라떼를 한모금 마셨다.
리라: 난 어제 공연 성공한 거 보니까 더 큰 욕심이 생기던데...
잔디: 예?
가을: 언니 뭐 좋은 계획 있어요?
잔디와 가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리라를 바라봤다.
리라는 호기심 가득한 두 사람의 눈을 보고는 자신의 구상을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리라: 그냥 생각해둔 거긴 한데... 아예 F4가 자선재단을 만들어서 체계적으로 사회기여를 하면 좋겠다 싶어.
이번 공부방 실내악단을 시작으로 엘 시스테마(El Sistema)를 본격적으로 실시하는 것도 좋고... 그건
수암에서 맡으면 좋을 거 같아. 그리고 일심에서 작은 도서관이나 놀이방을 지어주면 우송과 수암에서
다양한 문화 예술 프로그램을 제공한다거나... 의료 지원은 신화가 중심이 되면 좋을 거 같은데. 노하우는
지후씨 할아버님에게서 얻고...
난 이제 우리나라에도 카네기 재단이나 록펠러 재단이 생길 때가 되었다고 봐. 오블리스 노블리주의 본보
기로 말야.
(가을, 잔디 보며)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해?
예상치 못했던 리라의 계획에 잔디와 가을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사회복지사인 잔디가 먼저 열정적으로 맞장구쳤다.
잔디: 맞아요. 달동네 공부방 하나만 돕는게 아니라 아예 제대로 많은 사람을 돕는 그런 시스템이 필요해요.
사실 우리나라는 기부금만 해도 없는 사람들의 십시일반이 더 많아요.
윤리적인 기업이 전세계적인 추세인데 우리나라에선 아직 그 쪽에 신경쓰는 대기업도 거의 없구요.
가을: 그러니까요. 빌 게이츠만 해도 빌과 멜린다 재단을 통해 전세계적으로 자선사업을 하는데.
리라: 내 말이 그거야. 사실 이번 공부방 실내악단만 해도 잔디의 친분 덕분이라는 뒷소리가 좀 많았잖아.
난 그 말이 정말 듣기 싫었어.
잔디: 이 기회에 아예 기업의 사회적인 기여라는 풍토를 만드는 거에요. F4가 합쳐서 자선재단을 만들면 분명
다른 기업들도 따라할 거에요.
가을: 언니 계획대로 되면 정말 근사할 거에요.
잔디:(흥분해서) 언제까지 온정주의에 따른 일회성 행사나 프로그램에만 의존할 수는 없으니까 아예 우리가
초석을 만드는 거야.
리라와 가을은 의욕에 차서 눈이 반짝거리는 잔디를 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지금 두 사람은 똑같은 생각을 했다.
리라: 잔디야 너 지금 네가 무슨 말 하는 건지 알아?
잔디: 네?
가을: 리라 언니의 아이디어를 현실로 만들려면 누구보다도 잔디 네가 가장 많이 공부하고 고민해야 해.
잔디:(눈 휘둥그래지며) 에? 그런게 어딨어? 이거 분명 리라 언니 아이디어잖아요.
리라: 하지만 난 엘 시스테마에 대한 프로그램만 짤 수 있을 뿐이야. 가을이도 도서관 운영쪽만 도울 수 있고.
자선재단 설립이라던가 재원 조달 등등은 대부분은 사회복지사인 잔디 너말고 잘 아는 사람이 없어.
가을: 리라 언니나 난 보조적인 역할밖에 못해. 그건 엄연한 현실이야.
잔디: 그렇구나...
잔디는 약간 풀이 죽은 듯이 보였다.
가을과 리라는 조심스럽게 잔디의 얼굴을 살펴봤다.
가을: 잔디야... 너 설마... 기죽은 거야?
잔디:(힘없이) 아니...
리라: 하루아침에 될 일이 아니야. 일단 난 지후에게 엘 시스테마 프로그램에 대해 보고서를 올려볼까 해.
가을:(생각난 듯) 그러고보니 우빈 선배도 일심이 메세나 지원을 할 수 있도록 준비할 거라고 했어.
일단 천리길도 한걸음부터야. 이렇게 조금씩 관련 사업을 하다보면...
잔디:(말자르며) 그래. 소의 걸음으로 천리를 걷는 자세가 필요해!
리라: 그래. 일단 F4부터 설득시키고 보자.
어느새 공부방 실내악단에서 자선재단으로 대폭 상향조정된 희망사항을 이야기하느라 세 여자는 시간가는 줄을 몰랐다.
-윤환의 집-
아직 해가 서쪽 하늘에 걸려있는 이른 저녁, 윤환의 집앞에 이정의 차가 도착했다.
가을은 이정이 차의 시동을 끄는 것을 보면서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정의 할아버지를 만나뵌다는 생각에 긴장해서 몸이 완전히 굳어버렸다.
며칠 전, 잔디, 리라와 함께 자선재단 얘기를 실컷 하고 집에 들어온 후 이정의 호출로 근린공원으로 가자 이정은 뜬금없이 자신의 할아버지께 인사드리러 가자고 말을 했다.
어머니도 아니고 할아버지를 만난다... 가을은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이정으로부터 들은 말에 따르면 할아버지는 매우 엄격하고 옛선비처럼 강직한 사람이라고 했다.
물론 이정의 도예 재능을 가장 먼저 알아봐주신 고마운 분이기도 했지만 그래도 가을은 무서웠다.
더구나 아버지가 지금 정략결혼을 추진하는데 할아버지가 순순히 자신을 이정의 여자친구로 인정해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하지만 이정은 할아버지가 아무런 선입견없이 가을을 만나주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꼭 뵈러 가야한다고 우겼다.
가을도 막연하게 정략결혼을 막기 위해서는 할아버지의 도움이 필요하겠다 싶어 결국 약속을 하고야 말았다.
결국 순순히 현섭의 의도대로 이정을 정략결혼 상대에게 뺏기기 싫은 마음이 두려움을 이긴 셈이었다.
이정은 얼어붙은 가을을 보고는 한 손으로 가을의 턱을 잡고 베이비 키스를 했다.
가을은 뜻밖의 키스에 놀라 이정을 멍하니 바라봤다.
이정의 얼굴에는 다정함과 따스함이 가득했다.
이정:(부드럽게) 가을아 내리자.
가을: 네...
이정: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 내가 옆에 있어.
가을:(약하게 미소짓고) 응.
억지로 몸을 움직여 차를 내린 가을은 윤환의 저택을 흘깃 살폈다.
고택 특유의 품위와 정갈한 느낌이 우송의 가치를 말하는 것 같았다.
대문앞에서 가을은 잔뜩 긴장해서 두 손을 꼭 맞잡았다.
이정은 그런 가을의 어깨를 끌어안아주었다.
일단 대문안으로 들어가서 아름다운 한국식 전통 정원을 보자 긴장이 좀 풀렸다.
가을은 정원가득 흐드러지게 핀 고운 꽃들을 보면서 마음을 가다듬고는 이정의 손을 잡았다.
이정의 안내로 집안으로 들어가자 윤환이 웃으면서 가을을 맞이했다.
윤환: 어서 와요. 오느라 수고했어요.
가을: 추가을이라고 합니다.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가을이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자 윤환은 손으로 방석을 가리켰다.
이정의 손에 이끌려 가을은 다소곳이 방석위에 앉았다.
잠시 후 이정은 차를 우려냈다.
향긋한 녹차의 향이 방을 가득 채웠고 세 사람은 잠시 말없이 차를 음미했다.
윤환: 내가 오늘 아가씨를 부른 이유를 알겠지요?
가을: 말씀낮추십시오.
윤환: 그러지.
이정: 할아버지 너무 무게잡지 마세요.
가을이 너무 긴장할까봐 이정은 짐짓 가볍게 말을 했지만 윤환은 못본체 했다.
윤환: 가을양이라고 했지?
가을: 예.
윤환: 아가씨의 이정이에 대한 마음을 듣고 싶네.
가을: 제게 있어서 이정 오빠는 착하고 따스하고 여리지만 마음에 깊은 상처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오빠의 상처를 제가 치료해주고 싶었습니다.
(얼굴 환해지며) 하지만 지금은 제가 오빠덕분에 행복을 느끼고 있습니다.
윤환: 가을양은 이정이가 우송의 후계자라는 점에는 관심이 없었나?
가을은 예상했던 질문에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가을: 제가 처음 이정 오빠를 봤을 때, 오빠는 슬픔에 잠겨 은재씨를 그리워하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도 아름다워서 오빠에게 마음을 뺏기고 말았습니다.
어디의 누구인지 전혀 모른 채 한눈에 반해버렸거든요.
그 후로도 제게 이정 오빠는 그냥 첫사랑을 잃어버려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윤환: 이정이는 우송의 후계자야. 그 말은 혼인만큼은 이정이 뜻만으로 할 수 없다는 뜻인게야.
이정:(급히) 할아버지!
윤환은 손을 들어 이정이 더이상 끼어들지 못하게 했다.
이정은 말을 더 잇지 못하고 가을을 바라봤다.
이 집에 도착했을 때와는 달리 가을의 얼굴은 차분했다.
윤환: 우송에서는 내 아들이 그랬던 것처럼 내 손자도 우송에게 도움이 될 여자를 원하고 있다네.
가을양이 이정이 마음의 상처를 어루만져줘서 낫게 해준 데에는 고마워할 지언정 우송의 안주인으로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절대 다수라는 소리지.
가을양은 내가 반대하면 어찌할 셈인가?
가을은 윤환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명도예가로서의 자부심과 품위가 넘쳐흘렀지만 가을의 눈에는 윤환이 현섭처럼 차갑지도 않았고 타인에 대한 경멸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 노(老)도예가를 설득할 수 있는 힘은 오직 진심뿐이라고 가을은 믿었다.
가을: 저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우송을 도울 수 있는 돈도, 명예도, 권력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정 오빠에 대한 제 마음만은 진심입니다.
오빠가 힘들면 쉴 수 있게 해주고, 상처를 받으면 위로를 해주고, 항상 지금처럼 웃을 수 있게, 마음껏
도예를 할 수 있는 마음의 안식처를 만들어주고 싶습니다. 하지만...
윤환: 하지만?
가을: 저희들은 지금 당장 결혼하겠다는 건 아닙니다.
단지 이정 오빠의 미래를 어른들이 마음대로 정하지 않기만을 바랍니다.
건방진 소리로 들리겠지만 전 반드시 정략결혼을 통해서만 우송이 발전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정 오빠는 스스로의 힘으로 얼마든지 우송을 성장시킬 수 있습니다.
제가 아니라 이정 오빠를 믿고 저희를 지켜봐 주셨으면 합니다.
윤환은 가을의 차분하면서도 강단있는 말을 듣고는 잠시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과연 이정의 말대로 가을이 청화백자접시속 꽃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이정은 할아버지의 표정을 보면서 내심 안도했다.
윤환: 가을양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나? 학생인가?
가을: 아직 학생입니다. 내년 2월에 졸업하면 사서가 되려고 합니다.
윤환: 사서? 도서관에서 근무하겠다는 소리인가?
가을: 예.
윤환: 만약 내가 결혼을 허락하는 전제조건으로 일을 하지 말라고 하면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가을은 처음으로 당황하는 표정을 보였다.
이정은 재빨리 가을의 손을 잡고 변호했다.
이정: 가을이에게 사서가 얼마나 소중한 꿈인지 아신다면 쉽게 일하지 말라고는 못하실 겁니다.
제가 도예를 포기할 수 없는 것처럼 가을이도 사서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할아버지.
윤환:(눈썹 꿈틀대며) 사서가 꿈이라?
가을: 저는 어렸을 때부터 심장이 약했습니다. 그래서 책이 제 친구였고 세상과 통하는 창이었습니다.
몸이 나으면 사서가 되어 사람들에게 좋은 책을 읽도록 돕는게 제 꿈이었습니다.
이정: 할아버지 이제 세상은 달라졌어요. 내조만 하는 시대는 지났다구요.
가을: 저희들은 서로의 꿈을 존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 꿈까지 소중히 여길 정도로 절 사랑해주는 오빠의 손을 놓을 수가 없습니다.
윤환: 서로의 꿈을 소중히 여긴다라....
윤환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차만 마셨다.
이정과 가을은 윤환이 무슨 말을 더할까 싶어 잠자코 윤환을 바라보았다.
윤환이 찻잔을 내려놓자 두 사람은 저도 모르게 긴장해서 몸이 뻣뻣해지는게 느껴졌다.
그런 두 사람을 찬찬히 살펴보던 윤환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윤환: 그래, 두 사람 생각은 잘 알았다.
앞으로 서로에 대한 감정이 얼마나 깊고 애틋한지 내 눈으로 직접 지켜볼 터이니 그런 줄 알거라.
이정:(얼굴 환해지며) 할아버지...
가을:(고개 숙이며) 정말 고맙습니다.
긴장이 풀려 환하게 웃는 두 사람을 보면서 윤환은 짐짓 퉁명스럽게 말했다.
윤환: 이놈들, 난 아직 혼인을 허락한 게 아니다. 지켜본다고만 했을 뿐.
가을:(웃으면서) 알고 있습니다. 제가 고마운 건 할아버님께서 오빠를 믿어주셨다는 점입니다.
이정:(싱글벙글) 장담하는데 할아버지 가을이에 대해 알면 알수록 빨리 손자며느리로 삼고 싶어지실 걸요.
윤환:(이정을 보며) 못난 놈.
윤환이 은근히 저를 구박하거나 말거나 이정은 안도하는 가을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가을은 당황해서 이정과 윤환을 번갈아 보며 엉거주춤하게 서 있었다.
윤환:(황당) 이정아, 너 지금 뭐하는 게냐?
이정:(씩 웃으며) 잠시 가을이 정원 구경 좀 시켜주려구요. 이제 숨돌릴 시간은 주셔야죠.
가을:(얼굴 붉어지며) 오빠!
윤환은 어이없어하며 이정을 보다 결국 너털웃음을 짓고 말았다.
윤환: 허허 그렇게나 가을양이 걱정되었던 게냐?
이정:(빙글빙글 웃는) 할아버지가 좀 무서우셔야죠.
가을:(다급히) 아니에요, 할아버님.
윤환: 됐다. 그럼 너희들이 정원을 보는 동안 나는 저녁을 준비하라고 하마.
모처럼 여럿이 함께 먹으니 음식맛이 나겠구나.
이정: 기대하고 있을게요.
다시 정원으로 나오자 어느 새 긴 여름해가 거의 다 지고 저녁 놀이 서쪽 하늘을 불태우고 있었다.
석양을 받은 정통 한옥 정원을 보자니 가을은 평온함을 느낄 수 있었다.
저도 모르게 긴 한숨을 내쉬고는 이정의 손을 꼭 잡았다.
이정은 만족스럽게 점점 밝아지는 가을의 얼굴을 봤다.
이정: 할아버지가 널 맘에 들어하시는 거 같아.
가을:(자신없는) 정말 그럴까요?
이정: 난 할아버지를 잘 알아. 너의 곧은 마음을 알아보셨기 때문에 지켜봐준다고 말씀하신 거야.
가을:(얼굴 붉어지며) 아까 정말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너무 건방지게 말한거 같은데...
이정: 그렇지 않아. 그리고 고마워. 할아버지께 분명히 내 손 절대 놓을 수 없다고 말해줘서.
가을은 이정의 얼굴을 가만히 살펴봤다.
정말 이정은 안도하는 표정이었다.
가을: 약속했잖아요.
이정: 그래도..
가을: 나도 고마워요. 오빠가 할아버님께 내 꿈을 지지해줘서.
이정: 그건 당연한 거지. 내겐 네 모든 것이 다 소중한 걸. 네 꿈도 마찬가지야.
오늘 날 위해 큰 용기를 내어줘서 정말 고마워.
이정은 천천히 손을 들어 가을의 볼을 쓸은 다음 조심스럽게 자신의 입술을 가을의 붉은 입술에 가져갔다.
가을도 입맞춤을 통해 이정의 떨림을 느끼고는 두 손을 뻗어 이정의 손을 맞잡았다.
황금빛 석양이 가득한 윤환의 정원에서 두 사람은 양손을 꼭 잡고 조심스럽게, 그렇지만 오랫동안 입맞춤을 했다.
윤환이 장지문을 살짝 열고 두 사람을 흐뭇하게 보는 줄도 모르는 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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