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송 박물관-
현섭이 드물게 출근하는 날, 이정이 출근 후 처음으로 부르지도 않았는데 관장실로 들어갔다.
늘 그렇듯 싸늘하게 자신을 대하는 이정에게 현섭은 정략결혼 대상자에 대해 설명을 했다.
현섭: .... 그래서 LKM의 이수연양이 다음 주에 한국으로 올 거다.
수암 VIP 회원 초청 음악회때 우선 LKM의 안주인과 인사를 하도록 해라.
이정:(딱딱하게) 전 그날 가을이와 함께 참석할 겁니다.
현섭:(조소) 그래, 요새 아주 재미있는 소문이 돌더구나. 가을양, 수암 윤지후의 의동생이라고.
이정: 사실이에요. 그래서 늘 지후가 제가 가을이한테 잘못하는 거 없는지 감시해요.
현섭: 그냥 평범한 애가 아니라 수암을 등에 업고 있다고 시위를 하는 게냐.
이정: 지후도, 지후 할아버지도 가을양 진심으로 아끼고 예뻐하고 있구요.
현섭: 가을양이 윤석영 전대통령의 수양딸이 된다면 모를까, 단순한 의동생만으로는 우송의
며느리가 될 수 없다.
이정: 피식, 그럴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지후는 절 지금 매제로 생각한다는 것만 알아두시죠.
현섭은 고개를 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전자에서 차를 한 잔 더 따르고는 도전적으로 바라보는 이정을 바라봤다.
어딘지 모르게 자신감이 깃든 아들의 얼굴을 보자 무슨 궁리를 하고 있는지 호기심이 살짝 생겼다.
현섭: 꼭 고집부릴 필요 없지 않느냐.
이정:(한쪽 눈썹 꿈틀대며) 무슨 말씀인가요?
현섭: 가을양 말이다. 절대로 헤어질 수 없다면 결혼 후에도 얼마든지 만날 수 있는 거 아니냐.
모든 예술가들은 저마다의 뮤즈를 갖고 있으니까 말이다.
이정의 얼굴이 일순 일그러지다 다시 펴졌다.
당장이라도 찻잔을 부숴버릴듯 움켜쥔 손가락의 마디가 하애졌다.
하지만 차분하게 심호흡을 한 후 조소를 머금은 채 현섭에게 일격을 날렸다.
이정: 아버지가 그 분에게 제안했던 걸 그대로 가을이에게 제안하라고요?
현섭의 얼굴이 바로 굳어버렸다. 눈빛에는 놀라움이 담겨있었다.
현섭: 너... (말을 잇지 못한다)
반면 이정의 얼굴은 마치 도자기 표면처럼 매끄러워서 감정이 담겨있지 않았다.
하지만 경멸의 눈빛만은 숨기지 않았다.
이정: '부모님이 결혼을 필사적으로 반대하니 정해준 사람과 결혼하겠다. 하지만 사랑하는 마음은 그대로이니
앞으로도 계속 만나고 싶다' 이렇게 말씀하시다니 정말 저도 놀랐어요 아버지.
그렇게나 최악, 최저인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현섭:(경악) 어떻게...
이정:(차갑게) 일기일회의 사람한테 할 말은 아니셨죠. 아버지의 사랑은 참으로 비겁하고 나약하셨더군요.
현섭은 할 말을 잃고 그저 이정을 바라만 보았다.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비밀을 어떻게 이정이 알게 되었나 싶어 저도 모르게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정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자신의 과거를 다시 듣는 것이 이렇게나 무섭고 괴로울 줄은 몰랐다.
이정: 언제나 제게 말씀하셨죠. 전 아버지를 닮았다고요.
저도 한때는 그렇게 믿어서 평생 사랑을 할 수도, 사랑을 받을 수도 없다고 생각해 절망했어요.
은재가 갑자기 죽고 난 후에는 하루도 그 생각을 안 한 적이 없을 정도였어요. 하지만 가을이 덕분에 겨우
그 생각을 떨쳐낼 수 있었어요.
전 아버지와 달라요. 아버지처럼 반대에 쉽게 사랑하는 사람 포기하고 그늘의 여자로 만들 생각따위 절대
하지 않습니다.
가을이는 내 모든 것이에요. 아니, 내 자신보다 더 소중한 존재에요.
그런 가을이를 아버지 때문에 포기할 거라고 믿으셨다면 절 과소평가하신 거에요. 전 이제 더이상 도망가지
않아요.
분위기가 무겁게 내려앉은 관장실에서 이정의 차가운 말이 이어졌다.
이정: 아버지의 그 나약하고 몰염치한 말에 일기일희의 그 분도 결국 떠나버리셨죠. 그리고 아이도 교통사고
로 유산해버려 아버지와 완전히 인연의 끈이 사라지게 되자 미련없이 미국으로 유학가버리셨구요.
이게 바로 아버지의 사랑의 결과입니다. 제가 왜 이런 실패를 반복할거라고 생각하세요?
현섭:(떨리는 목소리) 혹시 너....
이정:(말자르며) 전 제가 사랑하는 사람 끝까지 지킬 겁니다. 그리고 가을이와 함께 행복하게 살 겁니다.
현섭은 머리속에서 자신의 일기일회와의 과거가 영화의 플래시백처럼 갑자기 쏟아져나와 멍해졌다.
그렇게 충격에 빠진 현섭을 남겨둔 채 이정은 관장실을 나왔다.
-F4 아지트-
준표: 정실장을 통해서 신화 미국법인과 LKM의 플로리다 부지 거래를 일단 중단시켰어.
준표는 아지트에 들어오자마자 LKM 이야기부터 꺼냈다.
이정과 지후, 우빈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준표를 바라봤다.
이정: 고맙긴 한데 그러다 신화 미국법인에 손실이라도 발생하면 어쩌려고?
준표:(자신만만) 염려안해도 돼. 어차피 LKM이 너무 가격을 높게 부르고 있어서 맘에 안들었거든. 현지 시가
수준으로 낮출 때까진 추가협상하지 않을 거야.
우빈: 하긴... 뭐 다른 부동산 회사를 통해서 거래해도 될 테고.
준표: 어차피 부동산 불경기에 몸달은 쪽은 LKM이라구.
지후는 차를 한모금 마시고는 자신이 입수한 정보를 친구들에게 알려줬다.
지후: VIP 회원 초청 음악회 참석자 명단이 확정됐어. LKM 안주인이 동행인이 있다고 하는 걸 보니 역시 딸과
함께 참석할 모양이야.
이정: 아버지는 안주인만 참석하는 줄 아시던데. 다음 주말에 딸이 올 거라고 하셨어.
우빈: LKM에선 좀 신중한 모양이네. 혹시 이정이와 가을이에 대한 소문이라도 들은 거 아냐?
준표: 몽키한테 새로 정보가 들어왔는데 그 딸한테 오래 사귄 남자친구가 있었대. 그런데 반대가 하도 심해서
몇 개월 전에 헤어졌다고 하더라.
뜻밖의 정보에 우빈과 이정의 얼굴에는 놀라움이 깃들였고 지후는 재미있다는 듯 입꼬리가 올라갔다.
우빈: 어떤 남자였길래 그렇게 반대했대? 가난한 유학생?
준표: 환경운동가래. 부동산 회사와는 상극인 존재라 기어이 헤어지게 만들었나봐.
지후: 상상이 간다. 그럼 부모가 추진하는 이 결혼에 불만이 많을 거 같은데.
이정:(씩 웃으며) 잘하면 이야기 잘 통할 거 같은데.
우빈: 혹시 모르니까 하재경한테 그 여자 출국일 잘 확인해보라고 해. 그래야 그 VIP 회원 초청 음악회를
D-day로 잡을지 말지 정해야 하니까.
준표: 알았어. 근데 몽키가 너무 이 일 재미있어 하는 거 같아. 이러다 그 여자 따라서 같이 한국올지도 모르겠
다 싶어.
지후: 피식, 그럼 재미있겠는데. 하재경이 이번에 온다면 빚갚으라고 또 무슨 엉뚱한 일 벌이자고 할지...
준표는 상상이 되는지 얼굴을 찡그렸다.
이정과 우빈도 예전 기억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지후만이 여유로운 모습을 유지했다.
이정: 그럼 나 먼저 간다. 귀국일자 확정되면 연락해.
우빈: 또 작업실 가는 거야?
이정:(고개 끄덕) 전시회 얼마 남지 않았어.
준표:(이정 어깨 두드리며) 고생이 많다, 친구.
지후: 그래도 표정은 밝은 편이네. 작업이 즐거운가보다.
이정은 싱긋 웃고는 손을 흔들면서 아지트를 나갔다.
준표와 지후, 우빈은 친구가 이 힘든 시기를 잘 넘기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도예실-
이정은 작업실로 들어가자 평소와 달리 맛있는 냄새가 배어든 공기에 잠시 어리둥절해했다.
하지만 탁자에 엎드려 자고 있는 가을의 모습을 보고는 저절로 미소가 나왔다.
제가 선물한 쿠션을 베고 잠자는 가을의 옆얼굴은 평화로워보였다.
긴 머리는 깔끔하게 하나로 묶어 하얀 목덜미가 그대로 드러났고, 살짝 벌어진 입술이 뭔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자세가 불편해 깨워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냥 가을의 잠든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가벼워져 이정은
살짝 손가락으로 가을의 볼을 쓸었다.
그러자 가을은 움찔하더니 천천히 눈을 떴다.
이정: 도대체 언제부터 자고 있었던 거야?
가을:(고개 천천히 들고) 오빠 언제 왔어요?
이정: 지금 막.
가을:(잠이 덜 깨서) 웅~ 지금 몇 시에요? 죽 끓여놓은 거 다 식었으려나?
이정: 벌써 9시라구. 저녁은 먹었어?
가을:(화들짝) 예?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이정은 조금 전까지 잠에 취해있다가 번쩍 정신이 들어서 허둥지둥하는 가을이 너무 귀여웠다.
저도 모르게 가을의 허리를 잡고는 살짝 입술에 베이비 키스를 해줬다.
가을:(화끈) 오빠...
이정:(씩 웃으며) 이제 좀 진정이 됐어?
가을: 응...
이정: 그럼 내 질문에 답 해줘. 여기 몇 시에 왔어? 저녁은 먹은 거야?
가을: 여기 여섯시에 왔구요... 저녁은 간단히 먹었어요.
이정: 오늘은 어쩐 일로 행차한 거야?
가을: 요새 오빠 전시회땜에 여기서 거의 살다시피 하니까 요기거리 만들어놓으려고 했어요.
(이정 얼굴 보고는) 오빠 얼굴 좀 상했네요. 이럴 줄 알았어요.
이정:(환하게 웃으며) 나 저녁 안먹은 거 어떻게 알았어? 같이 먹자.
가을:(방긋 웃고) 응, 그래요.
가을은 부엌으로 들어가서 죽을 데우고는 반찬과 함께 죽 두 그릇을 탁자에 차렸다.
이정은 순간적으로 가을이 늦게 집에 들어온 남편에게 먹을 것을 내오는 아내처럼 보였다.
그 생각에 마음이 따듯해져 이정은 가을이 시키는 대로 순순히 자리에 앉았다.
가을: 오빠, 좋은 일 있어요? 아까부터 계속 웃기만 하고.
이정: 좋아서 그래.
가을: 뭐가 그렇게 좋아요?
초롱초롱 눈을 빛내며 저를 보는 가을이 예뻐서 이정은 다시 한번 손을 들어 가을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정: 이렇게 네가 날 위해 작업실에서 음식 만들어놓고 기다려주고, 또 같이 밥까지 먹으니까 우리 벌써 결혼
한 거 같아서.
가을:(볼 상기되며) 오빠는 참~
이정: 정말 좋다. 행복이라는 게 참 작은 데에 숨어있다는 거 실감이 나.
가을:(다정하게 웃으며) 정채봉님 책에 그런 글이 있어요. 기쁨이 모여 사는 마을이 있는데 인간 세상으로
매일매일 나오는 건 아주 작은 기쁨이래요. 큰 기쁨은 좀처럼 인간 세상으로 나오지 않는데 사람들은 그것
도 모르고 큰 기쁨만 기다리느라 작은 기쁨이 오는 줄도 모른다구요.
이정: 그렇구나. 정말 옳은 말인 거 같아. 넌 작은 기쁨을 다 맞이하기 때문에 늘 행복해하는거구나.
가을: 그럴려고 노력해요. 오빠도 이젠 작은 기쁨을 맞이할 줄 알잖아요.
이정: 다 네 덕분이지.
가을: 앞으로 자주자주 먹을 거 만들어 줄게요. 할 줄 아는게 몇 개 없긴 하지만요.
이정:(환하게 웃으며) 기대할게.
죽을 다 먹고 난 후, 가을은 집에 데려다주겠다는 이정을 한사코 말리고 도예실을 나갔다.
이정은 조금 아쉬운 마음을 달래면서 작업대에 앉았다.
가을이 자신에게 가져다 준 행복을 생각하며 손끝에서 흙덩어리를 아름다운 곡선으로 빚어내기 시작했다.
-수암 음악당-
VIP 회원 대상 음악회에 참석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음악당 로비에 모여있었다.
우빈과 준표, 지후는 LKM의 안주인과 딸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로비를 돌아다녔다.
현섭보다 먼저 그들을 찾아내기 위해 우빈은 은밀히 사람을 풀어서 음악당에 들어오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점검하고 있었다.
이정은 가을과 잔디가 이정의 정략결혼 대상자가 왔다는 걸 모르게 하기 위해 두 사람이 음악회 직전에 도착하도록 늦게 미용실에서 데려오기로 했다.
우빈의 휴대전화가 문자가 왔다는 소리를 내자 우빈은 즉시 액정을 들여다보고는 준표와 지후에게 손가락으로 정면 입구를 가리켰다.
LKM의 안주인 한정희 여사와 딸 수연이 지금 들어오고 있었다.
지후는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지후: 이렇게 만나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저는 수암재단의 윤지후입니다.
정희는 잠시 놀랐다는 표정으로 지후를 보더니 반갑게 웃었다.
정희: 정중한 초대장을 보내줘서 정말 고마워요. 형식적인 초대장이 아니라 마음을 담았다는게 느껴지더군요.
게다가 딸애까지 같이 초청해주셔서 얼마나 고맙던지요.
지후: 작년에는 제가 퍼블릭 오케스트라의 지휘를 맡아서 이 VIP 회원 초청 음악회에 미처 마음을 쓰지 못했습
니다. 한여사님같이 멀리 미국에서도 꼬박꼬박 참여해주시는 분께는 당연히 합당한 대접을 해드려야죠.
정희: 미국에도 좋은 오케스트라가 많지만 수암 오케스트라도 정말 훌륭해서 절대 놓칠 수 없지요.
수연:(냉랭하게) 향수병 때문이라고 솔직하게 말하셔도 돼요.
정희:(당황) 얘가 윤이사 앞에서.
(지후보며 억지 웃음) 애가 한국에 오늘 아침에 도착해서 약간 몸이 안좋아요. 호호
지후:(달콤하게 웃으며) 정말 피곤하시겠군요. 이해합니다.
수연:(지후 흘깃 보고) 저한텐 굳이 예의갖추지 않으셔도 돼요, 윤지후 이사님.
지후:(한여사 보고) 따님 소개 좀 해주시겠습니까?
정희:(반갑게) 우리 애가 이번에 파슨스를 졸업했답니다. 전공은 디자인 마케팅이구요.
지후:(잠짓 놀란척) 그 대단한 파슨스 디자인 스쿨을 졸업하셨군요. 예술적인 감각이 있으신가 봅니다.
정희: 수연이는 원래 그림을 그렸어요. 그러다 파슨스로 들어간 후에 디자인쪽으로 바꿨답니다.
지후: 그럼 수암으로 오시는건 어떻습니까, 이수연씨?
수연:(심드렁) 전 아직 취직할 생각 없습니다. 프랑스로 가서 더 공부할 생각이에요.
정희:(수연 째려보며) 또 쓸데없는 소리한다.
정희는 지후와 수연 사이에서 약간 당황해 웃음으로 얼버무리다가 휴대전화 벨소리가 들리자 반갑게 통화를 했다.
몇 마디 하지 않고 즉시 끊었지만 지후는 분명히 '소관장님'이라는 말을 들었다.
정희: 내가 너무 오래 윤이사를 붙잡고 있었네요. 그럼 다른 분들과도 인사하러 가셔야겠어요.
지후: 아닙니다. 괜찮으시다면 따님과 좀 더 이야기를 나눠도 될까요? 곧 도예가 친구도 오니 소개를 하고
싶은데요.
정희:(솔깃해서) 도예가 친구분이라고요?
지후:(싱긋 웃으며) 이름은 들어보셨을 겁니다. 소이정이라고요.
정희:(반갑게) 아~ 그 우송의 소이정!
지후: 역시 아시는군요. 곧 도착할 텐데 제 일행과 같이 공연볼 예정입니다. 그 친구도 따님도 예술가라
의견이 잘 통할 것 같아서...
정희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어차피 소관장은 오늘 수연이 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지금 인사를 할 때에는 혼자 가는게 더 나을 것 같았다.
수연도 자연스럽게 결혼할 사람과 인사를 나누면 선입견 없이 이정을 평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다른 한국 상류층 사람들에게 수연이 그 유명한 F4와 바로 친해진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득이 될 게 확실했다.
정희:(자애로운 표정) 네. 그럼 제 딸 잠시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수연:(발끈) 엄마 혼자 어디 가시려구요?
정희: 잠시 아는 사람 좀 만나고 오마. 윤이사한테 실례되는 말이나 행동하지 않게 조심해라.
수연이 더 붙잡을 틈도 없이 한여사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지후는 어이없어 하는 수연을 보며 싱긋 웃었다.
준표와 우빈은 정희가 사라지자 마자 지후와 수연에게 다가왔다.
우빈: Yo~ 지후, 리라씨 놔두고 이런 미인분을 독차지 하다니 대단한데.
수연:(발끈) 아니에요. 엄마가 마음대로 절 이 분한테 떠맡기고 가신 거에요.
준표:(수연 훑어보고 혼잣말) 실물이 더 낫긴 하네.
지후: 수연씨, 인사하세요. 이쪽은 신화그룹의 구준표, 이 친구는 일심건설의 송우빈이에요.
(장난스럽게 웃으며) 여기 미인분은 LKM의 이수연씨.
우빈: 만나서 반갑습니다.
우빈은 기다렸다는 듯 수연의 손을 잡고 손등에 키스를 했다.
예상대로 수연은 미국식 파티 문화에 익숙하기 때문에 전혀 당황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손을 빼냈다.
그리고 준표를 보고는 뭔가 생각났듯 우빈과 지후, 준표를 번갈아 바라봤다.
수연: 혹시 당신들이 재경 언니가 말했던 F4?
준표: 하재경이랑 친한 모양이군. 또 무슨 말 들었어?
수연:(눈 가늘게 뜨고) 역시... 윤지후 이사님이 일부러 우리 엄마한테 접근했군요.
지후:(싱긋 웃으며) 네, 정답입니다.
준표: 몽키말대로 보통이 아니군.
수연: 무슨 목적으로 제게 접근하신 건가요? 설마하니 소이정씨에 대해 뭔가 할 말이 있나요?
지후: 하재경한테 소이정에 대해서 무슨 말 들으셨나요?
수연: 별로 들은 거 없어요. 말 그대로 도예가에 과거엔 엄청난 플레이보이였다는 것과 F4라는 웃기는 클럽의
일원이라는 것 정도만요.
준표는 순간 울컥했지만 지후가 먼저 선수를 쳤다.
지후: 하재경이 한국에 오래 없어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말안해줬네요.
수연: 그게 뭔가요?
지후: 제 의동생과 2년이 넘게 열렬히 연애하고 있다는 걸요.
수연:(호기심 보이며) 그래요?
준표: 그러니 정략결혼이 성사될 거라고 생각한다면 꿈 깨라고.
우빈: He's got his guardian angel. There is no room in his heart for you.
(이미 이정에겐 수호천사가 있거든요. 그래서 이수연씨에겐 절대 마음을 내주지 않을 거에요.)
수연: 피식, 눈물겨운 우정이군요. 그러니까 나보고 일찌감치 포기하란 말이죠?
지후: 괜히 오기를 부리고 싶은 마음이라도 들까봐 방지하려는 거죠. 어차피 쓸데없는 시간낭비에 감정 소비
일 뿐이니까.
수연: 재경 언니를 통해서 이야기를 듣긴 했어요.
우송의 소이정은 신화의 구준표처럼 한 사람밖에 모르는 사람이라 누군가가 그 사람의 마음을 이미 차지해
버렸다면 나한텐 기회가 없을거라구요.
So he already gave his heart to his fiancee, didn't he?
(결론적으로 소이정에겐 이미 결혼을 약속한 사람이 있단 말이군요.)
우리 아버지와 소관장님이 추진하는 정략 결혼은 절대 성사되지 않을 것이다 이 말이네요.
준표: 몽키, 아니 하재경이 그러더라고. 이수연은 자신에 대한 믿음이 확고한 사람이라 사랑없는 정략결혼
보다는 자신의 꿈을 쫓아갈 거라고.
수연은 개구쟁이같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둘러싼 F3를 바라보았다.
그 미소는 '이대로 포기하면 재미없어요'라고 말했다.
수연: 하지만 당사자가 아닌 친구들한테 이런 얘기를 듣는 것도 기분이 좀 나쁜데요.
적어도 소이정씨와 그 피앙세의 행복한 모습이라도 봐야 나도 홀가분하게 포기할 수 있지 않겠어요?
지후:(씩 웃으며) 조금만 기다리면 실컷 보게 될 겁니다.
우빈:(휴대전화 액정 보고) 어이 준표, 지금 잔디와 가을 도착했대.
준표: 그럼 데려올게. (수연 보며) 어이, 꼼짝 말고 기다려.
수연은 기가 막혀 준표가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는 중얼거렸다.
수연: 정말 재경언니 말대로 저사람 안하무인이네.
지후: 그래도 지금은 예전보다 많이 부드러워졌어요.
수연: 소이정씨도 그래요?
우빈: 피식, 그 녀석은 친절하지만 얼음처럼 냉정한 녀석이죠.
지후: 정말 다정하고 자상한 모습은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보여줄 뿐이죠.
곧 준표와 잔디, 이정과 가을이 나란히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수연의 눈에는 약간 티격대는 준표와 잔디와 달리, 팔짱을 끼고 걷는 이정과 가을 사이에는 하트가 춤을 추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정의 사진을 처음 봤을 때, 눈빛이 너무나 차갑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옆의 피앙새라는 여자를 바라보는 이정의 눈에는 사랑과 따스함이 듬뿍 담겨있었다.
수연은 지후와 우빈을 슬쩍 살펴보고는 '이제 이해가 가냐'고 표정으로 말하는 두 사람에게 퉁명스럽게 말했다.
수연:(비꼬듯이) 정말 열렬히 사랑하고 있군요.
지후: 사귄 지 벌써 2년이 넘었는데 언제나 저렇게 사랑이 넘쳐흘러요.
우빈: 덕분에 난 항상 넘쳐나는 닭털들 때문에 알러지가 생기기 직전이구요.
수연: 나도 사람보는 눈은 좀 있어요. 사진으로 본 소이정씨는 정말 차가운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전혀 다른
사람이네요.
지후: 당신과 함께 하게 된다면 아마 시베리아가 될 걸요. 뭐 그럴 일도 없지만.
수연:(날카롭게) 무슨 뜻이죠?
우빈: 이정이는 당신과 결혼하느니 우송을 버릴 테니까요.
수연:(의심) 정말 그럴 수나 있을까요? 도련님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버린다는 게?
지후: 소이정은 그러고도 남을 녀석이죠. 아까 본인 입으로 말했던 것처럼 저 녀석 마음은 한 사람밖에 모르니
까요. 저 둘은 소울메이트에요. 영혼의 짝을 가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갑자기 수연의 얼굴이 흐려지더니 잠시 말을 하지 않았다.
지후와 우빈은 예전 남자친구가 생각나서 그렇다는 것을 눈치챘다.
지후: 설마 이수연씨 자신이 부모 반대로 헤어졌다고 이정이도 헤어져야한다고 심술부리진 않겠죠?
하재경 말로는 그러기엔 이수연씨는 정말 좋은 여자라던데요.
수연: 그건... (고개 저으며) 재경 언니는 파혼한 사람한테 모든 정보를 다 넘겨줬군요.
우빈:(윙크하며) 이건 비밀인데, 하재경은 파혼의 장본인인 구준표 여친을 정말 좋아하는데다 그 애의 친구가
바로 지금 이정이 피앙새라 처음부터 우리편이었어요.
수연: 어쩐지... (허탈하게 웃는다)
사정을 모르는 가을은 일행과 합류하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지후와 우빈에게 인사했다.
그런 가을을 보며 수연은 참 맑고 곱게 웃는다고 생각했다.
가을:(수연 보고) 지후 오빠, 이 분은 누구?
지후: 소이정, 네게 소개시켜 줄 사람이야. 이쪽은 이번에 미국 파슨스 스쿨을 졸업한 이수연씨. 우리 VIP 고객
의 따님인데 디자인 마케팅 전공했대.
(수연에게 태연한 태도로) 이수연씨, 이 쪽은 우리 F4 멤버이자 도예가 소이정입니다.
그리고 (가을 가리키며) 얘는 제 의동생이자 이정이 여자친구인 추가을이라고 해요.
이정:(고개 까딱) 반갑습니다 이수연씨. 소이정이라고 합니다.
가을:(꾸벅) 추가을입니다. 그 세계적인 파슨스를 나오셨다니 대단하시네요.
자신을 의심하지 않는 가을의 맑은 눈과 보호하듯이 가을의 어깨를 감싸는 이정을 보자 수연은 결국 포기할 수 밖에 없다 싶어 웃음이 나왔다.
수연: 이수연이라고 해요. 어머니 따라 와서 얼떨결에 그 유명한 F4와 가을씨를 만나게 됐네요.
반갑습니다.
상황을 전혀 모르는 잔디는 수연의 인상이 마음에 들어 준표의 팔을 잡아당겼다.
잔디: 구준표, 나도 인사시켜줘
준표:(한숨쉬며) 이쪽은 내 미래의 마누라 금잔디. 잔디밭, 이쪽은 하재경 친구인 이수연이야.
잔디:(눈 반짝이며) 재경 언니 친구에요?
수연:(잔디의 관심에 당황) 아, 그게... 뭐 나름 알고 지내는 사이에요.
잔디: 와~ 정말 반가워요. 재경 언니 친구를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어요.
잔디는 아예 수연에게 손을 내밀더니 신나게 악수를 했다.
재경의 현재 생활에 대해서 이것 저것 물어보려는 찰나, 공연 시작 예비종이 울렸다.
수연은 잔디에게서 자신의 손을 빼내고는 어머니와 함께 들어가겠다며 사라졌다.
F4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음을 확인했기 때문에 느긋하게 공연장 입구로 발걸음을 돌렸다.
상황을 모르는 잔디와 가을만 재경의 이야기를 하며 F4를 따라갔다.
한편, 로비 맞은편에서 현섭과 정희는 만나서 몇 마디 나누지 못한 상태에서 뜻밖의 인물과 마주치게 됐다.
상대는 다름 아닌 나현이었다.
나현은 화려한 한복 드레스를 입고 나타나서 생글생글 웃으며 남편과 예비 안사돈에게 다가갔다.
나현:(다정하게) 여보 제가 좀 늦었어요. 죄송해요.
(정희 보며) 처음 뵙겠습니다 한여사님. 전 우송의 안주인 우나현입니다.
정희:(약간 당황) 예, 반갑습니다. LKM의 한정희라고 합니다.
현섭은 당황했지만 티를 내지 않고 나현에게 나즈막하게 으르렁거렸다.
현섭: 당신 여기 왜 온거야?
나현:(태연) 당연히 이정이 엄마로서 같이 인사해야죠. 엄마가 아들의 혼담 내용을 모른다는게 말이 돼요?
정희: 훌륭한 아드님을 두셔서 정말 좋으시겠어요. 부럽습니다.
나현: 뭘요~ 애가 어찌나 무뚝뚝한지. 한여사님이야 말로 딸이라 알콩달콩 재미있으실 거 같은데요.
정희:(손사래치며) 아유 그렇지도 않아요. 이젠 다 컸다고 엄마 말은 잘 듣지도 않는 걸요.
나현: 어머 그래요? 우리 가을이는 지금도 저한테 사근사근한데요.
현섭:(당황) 당신 지금...
정희: ? 가을이라니요?
나현은 당황해서 얼굴이 일그러진 현섭을 못본체 하며 최대한 상냥하게 웃었다.
나현: 우리 이정이 여자친구랍니다. 애가 얼마나 착하고 제게도 곰살맞게 구는지 저도 이젠 친딸처럼 생각해요.
정희의 얼굴이 경악과 충격으로 뒤덮였다.
현섭은 보는 눈이 너무 많아 나현에게 화도 내지 못하고 분노로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정희:(힘겹게) 아드님한테... 여자친구가 있나요?
나현:(모르는 척) 사귄지 2년이 넘었답니다. 전 빨리 며느리로 집에 데려오고 싶은데 아직 그 애가 학생이라
졸업할 날만 기다리고 있어요. 호호호
정희: 그러시군요...
정희는 어찌 된 거냐는 눈빛으로 현섭을 노려봤다.
하지만 현섭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현섭: 그게...
나현:(말자르며) 요즘같은 세상에 정략결혼이라니 너무 고리타분하단 생각 안하세요?
신화와 JK도 억지로 애들 정략결혼 시키려다 파혼해서 한동안 시끄러웠잖아요.
이정이가 신화그룹 아들이랑 친구인 터라 옆에서 그 난리 옆에서 지켜보면서 결심했답니다.
이정이한테 사랑하는 여자가 생기면 무조건 결혼시키겠다고요.
사실 제 아들이지만 그 앤 일기일회 그러니까 평생 한번뿐인 인연을 찾던 아이였거든요. 그래서 그 일기일
회의 여자를 찾으면 절대로 집에서 시키는 대로 결혼하지 않을 애라는 걸 너무나 잘 알아서요.
정희: 아... 예... 그럼 그 여자친구가 아드님이 찾던 일기일회란 말씀인가요?
나현:(활짝 웃으며) 그럼요. 통 웃지 않던 애가 가을이 만난 후로는 늘 웃어요.
저도 이정이랑 가을이가 행복하게 지내는 모습 옆에서 지켜보면서 얼마나 행복한 지 모르겠어요.
이제 둘이 결혼해서 예쁜 손주 안겨주면 더 이상 바랄게 없을 거 같아요. 호호
나현은 보는 눈때문에 자신에게 화도 내지 못하고 얼굴이 일그러진 현섭을 보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동안 현섭때문에 생긴 마음의 상처가 싹 낫는듯한 기분이 들었다.
더 이상 이정과 수연의 정략결혼에 대한 말도 하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있다가 공연 예비종이 울리자 정희는 멀리서 자신을 찾는 수연을 발견하고는 공연을 보겠다며 먼저 자리를 떠났다.
로비를 꽉 채우던 사람들이 모두 다 안으로 들어가자 현섭은 나현의 팔을 잡고는 로비 입구로 끌고갔다.
아직 해가 지지 않아 주위에는 사람이 제법 많은 관계로 현섭은 낮은 목소리로 화를 냈다.
현섭: 당신 지금 무슨 짓을 한 건줄 알아?
나현:(냉정하게) 물론 알고 말고요.
현섭: 왜 불쑥 나타나서 쓸데없는 소리를 한 거야? 아니, 오늘 여긴 어떻게 왔지?
나현: 이정이가 알려줬어요.
현섭:(충격) 뭐?
나현: 이정이가 나한테 도와달라고 하더라구요. 나도 낳아주기만 했지 엄마로서 그동안 제대로 해준게 하나도
없어서 첨으로 엄마 노릇 좀 하려 왔어요.
현섭:(어이없어) 당신 언제부터 그렇게 이정이를 신경썼다는 거야?
그리고, 그 아가씨를 언제부터 당신이 딸처럼 예뻐했단 거지?
나현: 꽤 오래됐어요. 벌써 1년도 넘었죠.
현섭: 어떻게...?
나현: 난 아까 말한대로 이정이와 가을이가 빨리 결혼하길 바래요. 당신, 정략결혼으로 이정이 팔아버릴 생각
포기해요. 내가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지 않을 거니까요.
현섭: 뭐야?
나현: 난 할 일 다했으니 이만 가겠어요.
나현은 현섭이 뭐라 할 새도 없이 우아하게 몸을 돌려 주차장으로 걸어갔다.
현섭의 눈에는 나현의 뒷모습에 해방감과 당당함이 깃들여있는 것처럼 보였다.
얼마 전 이정으로부터 받은 충격에 이어 나현에게도 카운터 펀치를 맞아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현섭은 과거 자신의 일기일회를 잃은 후 지금까지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살았던 삶에 예상치 못한 복병이 등장음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한참 멍하니 서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지를 생각하느라 복잡해진 머리를 쉬게 해주기 위해 천천히 주차장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 시각, 수암 오케스트라는 객석에 앉은 VIP 회원에게 최고의 연주를 들려주고 있었다.
베토벤의 전원 교향곡이 관객들을 아름다운 풍경으로 인도하는 동안에 이정은 휴대 전화의 진동을 느끼고 문자메시지를 확인했다.
"정아 엄마는 임무완수하고 간다 조만간 가을이랑 같이 맛있는 거 먹자꾸나 -엄마"
이정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가을은 음악에 빠져있다 이정에게 급한 일이냐고 눈빛으로 물었다.
저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가을이 오늘따라 너무나도 예뻐보여서 이정은 살짝 고개를 젓고는 재빨리 가을의 입술에 살짝 입을 맞췄다.
어둠속에서도 가을의 볼이 빨갛게 달아오른 것을 보며 이정은 싱긋 미소지었다.
가을은 당황해서 음악을 잠시 잊고 이정에게 속삭였다.
가을:(질책하듯) 뭐에요?
이정은 가을의 귓가에 얼굴을 갖다대고 숨결을 불어넣으며 대답했다.
이정: 그냥. 지금 네가 너무나도 예뻐보여서.
가을은 어이도 없고 황당하기도 해서 고개를 돌려 오케스트라를 바라봤지만 이정은 손을 뻗어 가을의 손을 꼭 잡았다.
'절대로 이 손 놓지 않아. 영원히...'
공연장에는 계속 베토벤의 전원교향곡이 연주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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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과 이정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모두 다 힘을 내어주고 있으니 잘 될거라고 무책임하게 말합니다 --;
리라는 수암 오케스트라에 동창이 몇 명이 있어 지후와 자신이 사귄다는 소문이 날까 불참했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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