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송 박물관-
비서: 이사님, LKM사에서 이수연씨가 오셨습니다.
뜻밖의 방문객이 도착했다는 말에 이정은 약간 놀랐지만 차분하게 답을 했다.
이정: 알겠습니다.
잠시 후, 말끔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수연이 이사실로 들어왔다.
수연의 밝은 표정을 보고 있자니 이정도 이 방문이 큰 일은 아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연: 안녕하세요 소이정씨. 설마 놀라셨나요?
이정: 솔직히 놀랐습니다. 여긴 어쩐 일로 행차하신 건가요?
수연: 그래도 결혼할 뻔했던 사이인데 떠나기 전에 제대로 인사는 해야할 거 같아서요.
수연의 뼈있는 말에 이정의 표정에 살짝 반가움이 스쳐지나갔다.
그 미묘한 표정변화를 감지한 수연은 코웃음을 쳤다.
수연: 네, 맞아요. 저희 정략결혼 없던 일이 됐어요. 곧 소관장님께도 연락이 갈 거에요.
이정: 피식, 잘됐군요.
수연: 재경언니한테 들은 말이 있어서 그 F4 친구들이 훼방을 놓을 줄은 알았는데, 소이정씨 어머님이 제
어머니에게 며느리감이 따로 있다고 말씀하실 줄은 정말 몰랐어요.
이정:(씩 웃으며) 그게 결정적이었던 모양이네요.
수연: 당연하죠. 미래의 시어머님이 당신 딸 며느리로 인정못해 하는데 우리 부모님 충격 제대로 먹으셨죠.
분명 자신이 거절당한 상황이건만 수연은 마치 남의 일처럼 즐겁게 말하자 이정은 안도했다.
자신과 가을에게 다가온 거대한 위험이 이제 사라졌다는 생각이 들자 새삼 수연에게 미안한 맘이 들기 시작했다.
이정은 진지한 표정으로 수연에게 진심으로 사과를 했다.
이정: 지금에서야 이런 말 하는 제가 참 뻔뻔한 줄은 알지만... 미안합니다... 먼저 거절부터 해서요.
부디 상처받지 않았음 합니다.
수연은 의외의 사과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정을 바라봤다.
그 말에 진심이 깃들었음을 알고 환한 웃음을 지었다.
수연: 사과하실 필요 없어요. 사실 저도 잘한 거 하나 없으니까요.
아니, 저 때문에 소이정씨가 오히려 맘고생하셨잖아요.
이정: 수연씨가 잘못한 건 아니죠. 다 욕심많은 제 아버지가 벌인 일이니까요.
수연: 저희 부모님도 거기에 장단맞춘 건 사실인걸요.
(웃음 거두고 진지하게) 그 소울메이트분... 잠깐 본 게 전부지만 참 맑고 순수한 느낌이 들더군요.
제가 두 사람사이에 끼어들 자리 없다는 거 보자마자 알게 됐어요.
부모님이 건네주셨던 사진속의 소이정씨는 정말 차가워보였어요.
하지만 그 사람과 함께 있던 소이정씨는 사랑으로 따듯하고 행복한 모습이었어요.
웃음이 사라진 수연의 얼굴에는 그늘이 드리워졌다.
그게 바로 후회라는 것을 이정은 단번에 알아차렸다.
이정: 후회하시나요? 그 사람과 헤어진 걸?
수연:(체념한 미소) 난 후회할 자격도 없어요. 내가 먼저 그사람 떠나버렸는 걸요.
소이정씨처럼 나도 용기를 냈어야했는데... 난 내가 가진 것을 포기하지 못했어요.
그러니까 소이정씨는 꼭 그 분하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사는 모습 보여주세요.
그럼 나도 다음에는 용기를 낼 수 있을 거 같아요.
이정: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를 때라는 말이 있잖아요.
수연:(고개 저으며) 우린 정말 끝이 나버렸어요. 더이상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해요.
이정: 그렇지만...
수연:(말 자르며 짐짓 밝게) 그리고 LKM의 문화사업 진출도 보류됐어요.
제가 유학다녀온 후에 다시 시작하기로 했어요.
이정: 그럼...?
수연:(고개 끄덕) 우송과 LKM간엔 아무런 사업적인 거래도 없을 거에요. 제 유학이 끝날때까지는요.
이정은 이제 개인적인 이야기는 끝날 때가 되었음을 알아차렸다.
제3자인 자신이 더 이상 충고해봐야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셈이었다.
이정: 뭘 전공하실 건가요? 몇 년 예상하세요?
수연: 일단 파리로 갈 거에요. 12월에 Ecole Nationale Superieure de Creation Industrielle(국립산업미술
학교)에 입학을 하면 적어도 5~6년안으로는 돌아오지 않을 거에요.
이정: 그럼 그 후에 다시 한 번 우송과 LKM의 문화사업 협력 체계를 구축할 수 있을까요?
수연:(눈 동그래져) 진심이세요?
이정: 하재경의 정보에 따르면 이수연씨 파슨스가 인정한 유능한 인재라고 하더군요.
이렇게 좋은 인물을 놓칠 수는 없죠. (씩 웃는다)
전 이 거래가 우송과 LKM에게 win-win이 될 거라고 자신합니다.
수연: 피식, 무서운 분이시군요. 정략결혼을 파탄낸 당사자가 태연하게 업무제휴를 제안하다니.
이정: 일만큼은 개인적인 감정을 배제하고 있습니다.
수연:(경쾌하게) 좋아요. 소이정씨의 제안 긍정적으로 검토하죠.
하지만 그 때 소이정씨의 사업제안서가 그닥 쓸모없으면 바로 폐기할 거에요.
이정: 물론이죠.
이정은 수연에게 손을 내밀었다.
잠시 머뭇거렸던 수연은 이정의 손을 맞잡아 악수를 했다.
이정: 유학생활 잘 하시길 바래요.
수연:(생긋 웃으며) 고마워요.
수연은 제 손을 거두더니 마지막으로 고개를 까딱하고 이사실을 나갔다.
마냥 가벼워보이는 수연의 뒷모습을 떠올리며 이정도 홀가분한 기분을 느꼈다.
어쩐지 오늘은 빨리 퇴근해서 작업실로 달려가야겠다는 충동이 들었다.
-연구실-
현섭은 인상을 잔뜩 구긴 채 책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조금 전 LKM으로부터 정략결혼을 할 수 없다는 연락을 받고 분노를 가라앉힐 수 없는 상태였다.
정희: 저희집은 수연이가 불행한 시집살이 하는 거 원치 않습니다.
진작 안주인께서 며느리감을 따로 점찍어 둔 아가씨가 있다는 걸 알았다면 이 결혼 추진도 안했을 겁니다.
한여사의 차가운 말에 현섭은 이제 완전히 끝이 났다는 걸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이정의 반발은 예상하고 있었지만 나현까지 이정에게 협조해 LKM의 안주인에게 폭탄발언을 할 거라고는 상상을 할 수 없었기에 불쾌한 기분은 가시지 않았다.
정략 결혼과 일기일회와의 영원한 이별 이후, 한 번도 나현을 아내로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나현은 해바라기처럼 자신만을 바라보았고, 두 아들 모두 현섭의 뜻에 따라 키웠었다.
이제 와서 나현이 무슨 바람이 불어서 가을을 제 딸처럼 생각한다느니 빨리 며느리로 삼길 바란다느니 이런 말을 하는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가을을 불러서 확인을 하지 않고서는 이 알 수 없는 불쾌한 감정을 가라앉힐 수 없을 것 같았다.
노크 소리가 들리자 현섭은 정신을 차리고 들어오라고 말을 했다.
가을이 조심스럽게 연구실로 들어와서는 목례를 했다.
처음 왔을 때처럼 약간 긴장한 얼굴이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조금은 편안해보였다.
가을:(차분히) 절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현섭:(담담하게) 자리에 앉지.
가을은 저번의 자리를 찾아 앉았고 현섭은 차를 냈다.
차를 음미한 가을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깃들었다 사라졌다.
그 미소가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아 현섭은 의도보다 더 퉁명스럽게 말이 나갔다.
현섭: 조금 전에 LKM사에서 결혼 얘기를 없던 걸로 하자고 연락이 왔어.
가을: 네?
가을은 동그랗게 눈을 뜨고 무슨 일이냐는 표정으로 현섭을 바라봤다.
현섭:(비웃는 말투) 설마하니 몰랐던 일이라고 말하진 않겠지. 난 분명히 이정이가 곧 결혼할 거라고 말을
했는데.
가을:(찻잔 내려놓으며) 그럼 그 LKM이라는 곳이 정략 결혼을 추진했던 회사였나요?
현섭: 이정이가 아무 말 하지 않았나?
가을: 그 날... 교수님께 말씀 듣고 난 후 더 이상 그런 얘기는 하지 않았습니다.
현섭: 아가씨 표정을 보면 사실인 것 같긴 한데... 어쩐지 믿기지가 않는군.
이정이뿐만 아니라 아내까지 아가씨 편이 되어서 LKM사에 며느리감이 따로 있다고 거절의 말을 했는데
말야.
가을:(경악) 예? 어머니가요? 언제 그런 말씀을 하셨나요?
놀란 토끼가 되어버린 가을을 보고 있자니 현섭은 속이 다시 뒤틀리는 것 같았다.
가을이 제 아내에게 애정이 깃들어 있는 말투로 부르는게 듣기 싫었다.
현섭:(차갑게) 언제부터 내 아내가 아가씨 어머니가 됐지?
가을: 조금 됐습니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제 친어머니는 4년전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이정 오빠 어머님이 제 어머니가 되어주겠다고 말씀해주셔서 정말 기뻤습니다.
현섭: 어떻게 아내를 구워삶은 건가? 난 아가씨가 그렇게 수완이 좋은 줄 몰랐는데 말이지.
공부만 하는 순진한 백면서생인 줄로만 알았는데.
가을:(날카롭게) 어머니를 모독하지 마십시오.
절 어떻게 생각하던 그건 교수님 자유지만 반평생을 함께 살아온 아내에게 그런 식으로 말씀하는 건 옳지
않습니다.
연구실에 들어온 후 가을은 처음으로 현섭을 노려봤다.
전에 이정과 현섭이 전혀 닮지 않았다고 화를 냈을 때와 똑같은 표정이었다.
현섭: 재미있군. 지금까지 아가씨가 한 말을 들어보면 나보다 우리 가족을 더 잘 아는 거 같으니 말야.
가을: 정말 교수님은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군요... 그 누구보다 사랑해야할 가족도... 아니 본인 스스로도...
참 슬픈 일이네요...(한숨)
현섭: 슬프다고? (조소) 세상 사람들은 날 부러워하고 있는데?
돈도, 명예도, 사회적 지위도 다 갖고 있는 나한테 슬프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가씨뿐이야.
가을은 딱하다는 표정으로 현섭을 바라보고는 차분히 하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어차피 현섭이 자신을 새롭게 봐주지 않을 거라는 걸 알기에.
가을: '질투는 나의 힘'이라는 시의 맨 마지막 구절은 아주 유명해서 교수님도 들어보셨을 것 같네요.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예전에 저와 이정 오빠를 가리키는 시구절같아 가슴에 박혔더랬습니다.
오랫동안 몸이 아팠던 저도, 그리고 마음이 아팠던 오빠도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몰라서 정말 많이 헤메
이다 멀고 먼 길을 돌았습니다.
하지만 이제 저희들은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게 되었고,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더없이 행복합니다.
(잠시 침묵)
그렇지만 교수님은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으시고 우송과 동일시하실 뿐이시죠.
그래서 가족도 신경쓰지 않고 우송의 성장에만 가치를 두고 있으시구요.
하지만 그 덕분에 본인은 물론이고 아무도 사랑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삶을 살고 계시는
거죠.
그리 살다 죽으면 그 누구도 슬퍼해주지 않고 그대로 잊혀지겠죠.
그런 삶을 성공적인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현섭: 그럼 아가씨가 생각하는 성공적인 삶은 뭔가?
돈한푼 없이 하루벌어 하루사는게 성공적인 삶인가?
그 대단한 사랑이 돈을 벌어다주는게 아니라는 걸 모르진 않을텐데.
현섭의 비아냥에 가을은 잔잔히 웃으며 답을 했다.
가을: 에머슨이 말했죠. 진정한 성공이란
자주 그리고 많이 웃는 것과 아이들에게서 사랑을 받는 것,
아름다움을 식별할 줄 알며 다른 사람에게서 최선의 것을 발견하는 것,
자기가 태어나기 전보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 놓고 떠나는 것,
자신의 한때 이곳에 살았음으로 해서 단 한 사람의 인생이라도 행복해지는 것이라구요.
이정 오빠가 우송을 버린다 해도 저와 함께한다면 에머슨의 기준으로는 성공적인 삶을 만들 거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그 기준으로 보면 교수님은 실패로 가득한 삶인 거죠.
그래서 저는 교수님이 불쌍해보여요.
뜻밖의 말에 현섭은 뒷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현섭: 내가 불쌍해보인다고? 정말 어처구니 없는 얘기로군.
퉁명스러운 현섭의 말에도 가을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가시지 않았다.
가을: 이정 오빠처럼 교수님도 마음의 문을 열길 바라지만 제 뜻대로 되는 일이 아님을 압니다.
끝까지 교수님의 기대 꺾은건 정말 죄송하지만 제게 가장 소중한 사람은 이정 오빠입니다.
그렇기에 이정 오빠가 교수님처럼 실패한 삶을 선택하게 할 수 없습니다.
교수님께서 뭐라고 하셔도 전 절대로 이정 오빠의 손을 놓지 않을 겁니다.
맑은 눈을 똑바로 자신의 눈과 마주보고 있는 가을의 얼굴은 결의에 차있었다.
자신의 냉소와 조롱섞인 비아냥에 전혀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또박또박 말하는 가을을 보고 있자니 넓은 바다를 대하는 느낌이었다.
현섭은 왜 소녀처럼 자그마한 가을이 자신보다 훨씬 큰 존재로 느껴지는지 알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을 다 가진 자신에게 거침없이 불쌍하다고, 실패한 인생이라고 말하는데 왜 아니라고 바로 반박할 수 없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내면의 혼란스러움을 감추기 위해 더욱 더 차갑게 발을 내뱉었다.
현섭: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나?
가을: (방긋 웃으며)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함께 있으면 때로는 서로에게 잘못도 하고 그로 인해 후회도
하겠죠.
하지만 이정 오빠가 우송을 물려받기 위해 헤어진다면 평생 서로 후회하며 살 겁니다.
잠시동안 두 사람 사이에 침묵만 흘렀다.
가을은 빈 찻잔을 내려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을: 차 잘마셨습니다 교수님. 더 하실 말씀 없으시면 이만 가보겠습니다.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연구실을 나가는 가을의 뒷모습은 더없이 당당하고 곧았다.
자신은 돈이나 지위, 명예같은 세상의 잣대에 구애받지 않는 사람이라고 뒷모습이 소리없이 말하고 있었다.
현섭은 아내의 말을 떠올렸다.
나현:(화를 내면서) 가을이는 다 죽어가던 이정이 살린 애에요. 부모인 당신이나 나도 못해준 일을 그 애가
했다구요.
이정이는 이제 가을이 없으면 못살아요. 당신 고집대로 하면 그 앤 죽는다구요.
그리고 나도 이정이 곁에 가을이 외의 다른 사람이 서있는 거 생각도 못해요.
아니, 가을이는 이제 내 딸이에요. 내 아들, 딸이 같이 행복해지겠다는데 반대할 엄마가 어딨겠어요.
당신이 정 가을이를 며느리로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면 우리 이혼해요.
우송이란 허울 다 던져버리고 이정이랑 가을이 데리고 행복하게 셋이서 살테니 당신 혼자 그 잘난 우송
끼고 잘 살아봐요.
자연스럽게 정략 결혼을 성사시킬 수 있도록 이정을 설득해달라고 윤환을 찾아갔을 때의 기억도 되살아났다.
윤환: 그렇잖아도 이정이가 그 애를 데려왔었다.
현섭:(표정 굳어) 그 애가 우송의 며느리감으로 보이십니까?
윤환:(타이르는 말투) 그 아이 대나무처럼 아주 강하고 올곧은 아이더구나.
그러니 무턱대고 반대하지 말고 좀 더 지켜봐주거라.
이정이가 그 애곁에서 얼마나 강해졌는지, 얼마나 성장했는지 네 눈으로 확인해보아라.
애비 네가 지금처럼 무조건 그 애를 반대만 하면 이정이는 우송을 등지게 될 게다.
난 그 모습을 볼 수는 없다. 이정인 우송의 미래야.
현섭: 보잘 것 없는 그 애가 그렇게나 마음에 들으신 겁니까?
LKM과의 정략 결혼만 성사시킨다면 우송이 세계적인 박물관으로 성장시킬 수 있는데도요?
윤환: 나는 늘... 이정이의 공허한 눈빛이 마음에 걸렸다.
우송의 성장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이정이가 마음의 안식처를 찾는게 아니겠냐.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고 했다. 이정이가 우송의 주인이 된 다음에도 빈껍데기뿐인 삶을 살면 결국 우송
도 무너져버릴 수 있다는 걸 알아야해.
현섭:(싸늘하게) 언제부터 그렇게 가족의 소중함을 아셨던 겁니까?
그랬던 분이 왜 제게는 한사코 정략결혼을 강권하셨습니까?
윤환:(고개 떨구고) 그래... 미안하구나... 그 일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지...
내가 그랬듯 너도 일단 가정을 꾸리면 아내와 아이에게 충실해질 거라고 믿었던 내가 죄인이지...
현섭: 그래서 이정이만이라도 제게 못해줬던 걸 해주시려는 겁니까?
윤환:(현섭 똑바로 보며) 그래. 그리고 그건 우송을 위해서이기도 한 일이야.
이정 어미도 날 찾아와서 말하더구나. 이정인 절대로 그 애와 헤어지지 않을 거라고 말야.
그리고 내가 그 앨 손자며느리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미도 이혼하고 이정이 데리고 우송을 떠나겠다고
말하더구나.
현섭:(울컥) 안사람이 그렇게 말했단 말입니까?
윤환: 그래. 그러니 이번 일은 없던 것으로 하거라.
남녀사이의 일이란 어찌 될 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니 일단 지켜보도록 해.
옆에서 갈라놓으려고 하면 할수록 더 애틋해지는 게 사람 맘이 아니냐.
지켜본다고 했지만 윤환의 말은 사실상 가을을 받아들이겠다는 뜻임을 모르지 않았다.
모두가 자신이 틀렸고 가을과 이정이 함께 하는게 옳다고 말했다.
현섭은 천천히 책상 뒤 의자에 앉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현섭: 왜 다들 둘이 함께하는 걸 당연시하는 건지...
지금 홀로 연구실 안에 앉아있는 그의 모습은 굉장히 쓸쓸하고 외로워보였다.
-도예실-
가을은 텅빈 작업실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흔들리며 피는 꽃 -도종환-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시가 주는 울림에 푹 잠겨 있느라 이정이 들어오는 줄도 몰랐다.
이정은 빨리 작품을 만들고 싶어서 서둘러 들어왔다가 사진처럼 책을 읽는 가을의 모습에 반가움과 놀람이 뒤섞여 뒤에서 가을을 끌어안았다.
이정: 가을아, 오늘 복지관에 자원봉사하는 날 아냐?
가을:(화들짝) 깜짝이야, 놀랬잖아요!
이정: 문소리랑 발소리도 못들을 정도로 책에 빠졌던데. 뭐 읽고 있어?
이정은 가을의 정수리에 입을 맞추고는 가을을 놓아주었다.
가을은 그런 이정을 보고는 못말린다는 피식 웃었다.
가을: 도종환님의 '흔들리며 피는 꽃'이에요.
이정: 무슨 내용이야?
가을: 직접 읽어봐요.
가을은 이정의 손에 시집을 쥐어줬다.
의자에 앉아 시를 읽는 이정의 표정에서 웃음이 사라지더니 감탄이 튀어나왔다.
이정: 정말 좋은 글이네.
가을: 그쵸? 이 시가 하도 좋아서 아예 시집을 빌려왔어요.
이정: 꽃이 바람에 흔들리고 비에 젖듯이 사랑도, 삶도 흔들리고 젖기 마련이라.
가을은 이정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손을 잡았다.
진지한 가을의 표정에 이정은 이유없이 긴장이 되었다.
가을: 연약해보이는 꽃도 이렇게 힘든 고비 겪기 나름인데 사랑인들 왜 아니겠어요.
이정: 그건 그렇지.
가을: 나 더이상 약한 아이 아니에요. 작은 충격 하나에 쓰러지던 가을인 이제 없어요.
이정:(어색) 나도 알아.
가을: 그런데 왜 나한테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았어요?
이정:(어리둥절) 응? 뭐가?
가을: 정략결혼 말이에요... 그 때 음악회때 만난 사람 오빠의 정략결혼 대상자라는 거 왜 말하지 않았어요?
이정:!
이정은 가을이 어떻게 LKM과의 정략결혼 이야기를 알았을까 싶어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가을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이정을 원망스럽게 바라봤다.
가을: 교수님이 정략결혼 추진하는 거 나도 알고 있었잖아요. 그런데 왜 내겐 한마디도 안했어요?
이정: 어떻게 알았니?
가을: 내게 말했잖아요. 절대로 숨기는 거 있음 안된다고.
근데 정작 오빤 나한테 가장 중요한 일은 숨기고 혼자서 처리하려고 하고 서운해요.
이정:(변명하듯) 나 혼자 한 건 아니었어...
가을: 알아요. F4 친구들이랑 어머니한테 도움 요청한 거.
이정: 가을아!
가을:(일어나며) 그래서 더 서운해요. 나한테만 아무 말 하지 않아서.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한테만큼은 얘기했어야 하잖아요.
이정은 자리에서 일어나 가을을 꼭 끌어안았다.
이정: 미안해... 네가 상처받을까봐 걱정해서 말을 할 수 없었어.
가을: 오빠 맘은 알아요. 하지만 내가 오빠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해서 서글프기까지 해요.
이정:(다급히) 아냐. 네가 내 곁에서 웃어주는 것만으로 충분해. 정말 그거면 돼.
가을은 제 몸을 빼내고는 고개를 떨궜다.
가을: 그래도 소교수님에게서 뒤늦게 얘기듣는 거 기분 정말 나빠요.
이정: 아버지가 또 널 불렀어?
가을: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에요.
나한텐 아무 말 안하고 오빠 혼자 속앓이했다는 거 뒤늦게 남에게서 들어서 속상해요.
어쩐지 음악회 때 오빠 행동이 약간 이상하다 했더니.
이정: 잘못했어. 다신 안그럴게.
가을:(이정 보며) 약속해요. 앞으로 나한테 아무 것도 숨기지 않는다고요.
특히 이렇게 중요한 일은 꼭 나랑 상의해야 해요.
진지한 눈빛으로 자신을 보는 가을을 보며 이정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고개를 숙여 가을의 이마에 제 이마를 맞대면서 조용히 약속했다.
이정: 그래 약속할게. 앞으론 꼭 너랑 상의할게. 아무 것도 숨기지 않을게.
가을: 약속하는 거에요.
가을은 새끼 손가락을 내밀었다.
이정은 싱긋 웃으며 새끼 손가락을 걸었다가 재빨리 다른 손으로 가을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입맞춤을 했다.
갑작스런 키스에 놀라 벌어진 가을의 입 안으로 이정의 혀가 들어가 달콤함을 마음껏 맛봤다.
말도 할 수 없는 가을은 어느 새 눈을 감고 진한 입맞춤을 받아들일 뿐이었다.
이정이 아쉬워하며 입맞춤을 끝내자 가을은 후들거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그런 가을을 보며 이정은 씩 웃더니 다시 살짝 베이비 키스를 해주고 안아주었다.
이정: 약속했으니 이제 말해 줘. 아버지가 왜 널 부른 거야?
가을: 별 거 아니에요. 오빠 정략결혼 없던 일이 됐다고 말씀하시길래 절대로 오빠랑 헤어지지 않는다고
말했어요.
아, 그리고 자기 자신도 사랑할 줄 모르는 교수님이 불쌍하다는 말도 했어요.
이정은 예상밖의 말에 놀라서 포옹을 풀고 가을의 얼굴을 바라봤다.
이정: 뭐? 아버지한테 불쌍하다고 말해?
가을:(고개 끄덕) 응.
이정은 헛웃음이 나왔다.
늘 증오해왔던 아버지에게 불쌍하다고 말했다는 가을의 말도 믿기지 않았지만 그 말을 들은 아버지의 반응도 궁금해졌다.
이정: 아버진 뭐라고 하셨어?
가을: 말도 안된다고 하셨죠. 하지만 표정만은 꼭 벼락이라도 맞은 사람 같더라구요, 큭.
이정은 못믿겠다는 얼굴로 가을을 잠시 바라보고는 다시 꼭 끌어안았다.
가을의 달콤한 향기가 이정의 마음을 달래주었다.
이정: 역시 넌 외유내강 그 자체야. 그러니까 꼭 내옆에서 날 지켜줘야 해, 알았지?
가을: 절대로 안 떠나요. 나도 이젠 오빠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없는 걸요.
이정: 그래....
한참동안 서로의 향기를 탐닉하는 이정과 가을이었다.
-신화호텔-
맨 위층 레스토랑에 F4와 잔디, 가을, 리라가 모였다.
이정의 호출로 갑작스럽게 모인 터라 열 개의 눈이 이정과 가을을 번갈아 살펴봤다.
준표:(툴툴) 갑자기 뭔 일인데 바쁜 우릴 불러내?
우빈: 분명 좋은 일인거지?
지후: 어쩐지 우리가 기다리는 그 소식인거 같은데?
리라: 설마 그 정략결혼?
잔디:(화들짝) 예? 그게 무슨 소리에요?
싱글벙글 웃으며 가을의 손을 잡고 있던 이정은 친구들이 원하는 답변을 내놨다.
이정: 드디어 LKM에서 결혼 얘기 없던 일로 하자고 연락왔어.
F3와 리라는 환호성을 지르며 이정과 가을에게 축하인사를 건넸고, 잔디만 영문을 몰라 가을을 멍하니 바라봤다.
가을: 잔디야 말 그대로야. 이정 오빠 준표 선배처럼 정략결혼 위기 벗어났어.
잔디:(눈 동그래져) 너 왜 진작 말 안했어? (준표 노려보며) 구준표!
리라: 진정해 잔디야.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 셰익스피어의 격언도 있잖아.
잔디: 아무리 그래도 그렇죠 언니. 가을 넌 왜 나한테 아무 말도 안했어?
지후:(부드럽게) 말할 틈도 없이 일이 다 끝나버렸거든. 그러니까 진정해 금잔디.
이정: 정말 미안해. 가을이에게 걱정 안겨주고 싶지 않아서 너와 가을이에겐 아무 말 안했어.
가을: 사실이야. 나도 오늘에야 모든 상황을 알게 됐거든.
우빈: 리라씨 말대로 일이 다 해결됐음 된 거 아니겠어. 오늘은 축하 파티를 해야지.
우빈이 잔을 들어올리자 지후와 준표, 이정, 가을, 리라도 와인잔을 들어올렸다.
결국 잔디도 마지못해 잔을 들어올렸다.
지후: 이정과 가을이 한 고비 넘긴 것을 축하하며, 두 사람의 영원한 사랑을 위해.
축하와 격려 속에서 일곱 명은 잔을 부딪히고는 한 모금씩 마셨다.
준표는 이 와중에 잔디를 달래느라 진땀을 흘렸다.
결국 잔디도 행복하게 웃는 가을을 보고 화를 풀 수 밖에 없었다.
식사를 끝내고 디저트를 먹으면서 상황 설명을 다 들은 친구들은 이제 다음 계획에 관심이 쏠렸다.
지후: 그럼 이제 남은 건 전시회 뿐인거야?
이정: 응 그 때 아예 확실하게 못을 박을 거야.
가을: 꼭 그러지 않아도 되잖아요. 할아버님도 우리 편이 되어주셨는데.
준표:(고개 저으며) 이정이 아버지 성격을 아는데 우리 마귀할멈만큼 지독한 사람이야.
아예 공개적으로 밝혀야 더이상 쓸데 없는 행동 안하지.
우빈: 그래. 확실한 게 좋아.
리라:(우려섞인 목소리) 그런데 그럼 가을이 사생활은 사라지는 거 아냐?
잔디: 그게 좀... 그러네요... 나야 뭐 하도 시달려서 이젠 면역이 생겼지만 우리 가을인...
리라와 잔디가 걱정스럽게 가을을 바라보자 가을은 방긋 웃었다.
그 모습을 지켜본 이정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여자들을 안심시켜줬다.
이정: 염려 마. 매스컴은 확실히 틀어막을 테니까.
기자나 파파라치가 가을이한테 달라붙는 일은 없을 거야.
우빈: 그래 어차피 두 사람 사이 신화대 학생들이라면 다 알잖아.
그리고 가을이도 한 학기만 더 다니면 졸업이고.
준표: 이 봐 정리라, 네가 윤지후랑 비밀 연애한다고 가을이한테까지 강요하지 마.
리라:(발끈) 그런 게 아니잖아. 가을이도 이제 취직해야하는데 소이정의 여자친구라고 소문이 나면 구직활동
에 악영향을 받을까봐 그러는 거지.
가을:(싸움 말리려고) 염려 말아요. 어차피 난 사서가 될 거니까 설령 소문이 난다고 해도 크게 영향받진 않을
거에요.
지후:(태평하게) 정 힘들면 수암 예술 도서실로 와 가을아. 너같은 인재라면 대환영이야.
우빈: 그래. 일심이나 신화에도 문헌 정보실이 있으니까 취직 자리는 염려 마.
준표: 신화대 문헌정보학과 과수석이라면 얼마든지 채용하지.
잔디:(얼굴 환해지며) 그럼 되는구나. 리라 언니 우리 괜한 걱정했네요.
리라: 피식, 그러네.
친구들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정은 마음이 따듯해졌다.
가을도 같은 마음인 듯 이정을 보며 방긋 웃었다.
이정: 어쨌든 모두 다 고마워. 우리 일 진심으로 걱정해주고 도와줘서.
가을: 정말 행복한 밤이에요. 이렇게 좋은 친구들과 함께 있어서요.
결국 모두 다 웃자 분위기가 가벼워졌다.
서로의 일을 자신의 일처럼 걱정하는 친구들이 있어 모두에게 오늘 밤은 즐거운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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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겨우 정략결혼 이야기가 끝이 났습니다...
아마 두 사람이 교제한 이래 가장 험난한 고비가 아니었을까 싶군요 네^^;;
앞으로 또 무슨 일이 두 사람을 기다릴 지 지켜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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