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기억의 주인_다음 이야기

09. 홋카이도 여행

지혜의 여신 2009. 9. 13. 13:38

-오타루-

 

F4와 잔디, 가을, 리라가 여행 코스로 제일 먼저 들른 곳은 유명한 오르골당이었다.
들어가자마자 여자들의 입에서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F4는 그런 반응을 짐작했다는 듯 그저 체념의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곧 엄청난 폭풍과 대면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오르골당에서 실컷 예쁜 오르골을 구경하고 나온 F4와 잔디, 가을, 리라는 의외의 인물과 부딪혔다.

 

잔디:(반갑게) 재경 언니!
재경:(환하게 웃으며) 잔디야~

 

잔디와 재경이 좋다고 서로 얼싸안자 준표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이정과 우빈은 뜨악하는 표정이었고, 지후도 약간 걱정스운지 미간을 찌뿌렸다.
가을은 잔디에게서 들었던 말을 떠올리는데 여념이 없었고, 리라는 누군가 싶어서 멍하니 바라만 봤다. 

 

준표:(버럭) 야! 몽키 너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거야?!
재경:(태연) Hey 쭌~ 오랜만이야.
우빈: 정말 놀랐다 하재경. 너 여긴 어쩐 일이야?
이정: 그러게. 한국도 아니고 오타루에서 널 만나리라곤 상상도 못했어.
재경: 아~ 나 그저께부터 삿포로에 있었거든.
    내일 미국으로 들어가야해서 쇼핑차 오타루 왔다가 너희들 만난 거야.

 

순간 F4의 머리속에서 '참 운도 없지'라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잔디는 남자들의 속도 모르고 차례로 가을과 리라를 재경에게 소개시켜줬다.
결국 폭탄발언이 튀어나왔다.

 

재경: 내일 아침까지 나도 너희랑 같이 놀게. 쇼핑은 담에 해도 되니까.
준표:(폭발) 어림없는 소리 하지도 마!
재경:(준표 흘겨보며) 그렇게 말하면 섭하지 쭌. 좋아 그럼 이걸로 빚갚도록 해.
이정: 꼭 우리랑 같이 다녀야겠어? 다른 소원 없어?
재경:(단호히) 응! 너희들은 자주 볼 수 있지만 우리 사랑스런 잔디는 힘들잖아.

 

이정과 가을의 문제로 재경의 도움을 꽤 많이 받았던 터라 수락할 수 밖에 없었다.
준표는 살짝 이정을 째려봤다가 한숨을 내쉬는 이정을 보고는 자신도 한숨을 쉬었다.

그 후로 남자들은 거의 꿔다논 보릿자루 신세가 되어버렸다.


재경은 금새 가을, 리라와도 친해져서 원래 4총사였던 것처럼 잘도 뭉쳤다.

베네치아관에 가서 옛날 이태리 드레스도 입고, 유명한 디저트 카페에 가서 달달한 음식을 잔뜩 사먹고, 여기 저기 기념 가게에 들러서 이것 저것 구경하고 사느라 남자들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나마 인력거를 탈 때만 커플끼리 함께 할 수 있었다.

(물론 재경은 우빈과 함께 인력거를 탔다)

 
결국 재경은 숙소인 료칸까지 따라와서 같이 저녁을 먹고 잔디, 가을, 리라와 한 방에서 자기까지 했다.
간간히 약올리는 듯한 웃음을 보면서 F4는 속으로 이를 갈았지만 별 수 없었다.
재경이 다음날 아침을 먹고 떠나자 여자들은 아쉬워했지만 남자들은 속으로 환호했다.

 

 


-후라노-

 

리라의 추천으로 도착한 팜 도미타 농원에는 라벤다는 거의 다 졌지만 다양한 색색의 꽃이 피어

정말 아름다웠다.

 

 


자연스럽게 준표와 잔디, 이정과 가을, 지후와 리라가 함께 움직였고, 우빈은 혼자 온 관광객 여성과 함께 농원을 느긋하게 돌아다녔다.

 

라벤다밭에는 꽃이 거의 남지 않았지만 향기만은 가득했다.
가을은 손끝으로 라벤다잎을 살짝 쓸면서 라벤다 향기를 음미했다.
이정도 가을을 따라하면서 그동안의 긴장이 다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가을:(라벤다를 보며) 오빠 알고 있죠? 라벤더는 기억력을 떨어뜨린다는 거.
이정: 그래. 기억력을 높여주는 로즈마리와 정반대라고 들었어.
가을: 소중한 추억을 기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망각도 꼭 필요해요.

 

가을이 고개를 들어 이정을 보며 방긋 웃었다.
하지만 그 얼굴은 매우 진지했다.

 

가을: 이 라벤다 꽃밭에서 오빠가 아버님에 대한 원망, 증오, 나쁜 기억 모두 다 떨쳐버렸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아버님으로부터 자유로와졌으면 해요.
이정: 가을아!
가을: 나도 잊어버릴 거에요. 오빠의 아버님으로부터 들었던 모든 말들과 그 기억들을 모두 여기서 내려놓을래요. 
   그리고 오빠와 어머니, 할아버님 만난 것만 기억할 거에요.
이정: 나는...(말을 잇지 못한다)

 

언젠가 현섭이 가을과 헤어지라는 말을 할 날을 대비해서 이정은 치밀하게 현섭의 과거를 조사했었다.
그 결과 결혼 전에 현섭이 사랑했던 여성을 찾아냈고, 결국 어떻게 이별하게 됐는지를 알아내고 허탈해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우려대로 현섭이 자신에게 똑같은 선택을 강요하자 친구들과 어머니, 할아버지의 도움으로 가을을 지켜내게 되었지만 한 편으로는 여전히 씁쓸함이 남아있었다.
앞으로 가을과 결혼을 한다고 해도 현섭이 계속 가을에게 상처를 주지 않을까하는 불안감이 남아있었다.

 

이정: 넌... 우리 아버지 원망하지 않니?
   난 말야 왜 그런 사람이 내 아버지일까 하는 생각 정말 많이 했어. 어릴 때부터 쭈욱... 

 

가을은 가만히 이정의 손을 잡고 이정의 눈을 바라봤다.

 

가을: 옛날에 수녀님께 여쭤본 적이 있었어요.
   '이웃을 사랑하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지만 누가 내 이웃인지 모르겠다고요.
   미운 사람들도 아주 많은데 그 사람들까지 다 내 이웃이냐고 물었어요.
   그 때 수녀님께서 뭐라고 답하셨는지 알아요?
이정: 아니...
가을:(싱긋 웃으며) 꼭 사랑해주지 않아도 된다고 했어요.
   그냥 불쌍하게 여기라고 했어요. 그럼 적어도 이해는 할 수 있다고요.
   '왜 저렇게 사냐 쯧쯧' 이렇게 바라보게 되면 미워하는 마음도 나중엔 없어진다고 하셨어요.

 

뜻밖의 말에 이정은 놀라서 멍하니 가을을 바라만 봤다.
머리속이 텅 비어버리는 것만 같았다.

 

이정: 그래서 우리 아버지한테 불쌍하다고 말했던 거니?
가을:(고개 끄덕) 세상에 아무도 사랑하지 않고 사랑도 받지 않는 사람보다 더 불쌍한 사람이 또 있겠어요?
   평생 혼자 살다 누구도 슬퍼하지 않는 죽음을 맞이하고 곧 잊혀진다면 그건 정말 실패한 삶이잖아요.
이정: 그렇...겠지....
가을: 좀 힘들겠지만... 오빠도 아버님 불쌍하게 봐줘요. 그리고 아픈 기억은 잊어버려요.
   망각은 축복이라고 니체도 말했잖아요.    

 

이정은 가을의 마음을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증오와 원망을 항상 안타까워했던 가을이었다.
그랬기에 가을은 굳이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하지 않고 그저 불쌍하게 여기라고, 그리고 다 잊으라고 말해주었던 것이리라.
자신의 어두운 마음과 과거까지도 다 사랑해주는 제 예쁜 사람에게 더 이상은 걱정을 안겨주고 싶지 않았다.

 

이정은 천천히 손을 들어 가을의 뺨을 쓰다듬었다.
가을의 손이 제 뺨위의 이정의 손을 잡아주었다.

 

이정: 노력할게...
가을: 고마워요. (약하게 웃는다)
이정: 그 대신 언제나 내 곁에 있어줘. 네가 없으면 난 과거로 돌아가버릴 거야.
가을:(다정하게) 지금도 함께 있어요.

 

이정은 지금 자신이 관광객이 가득한 곳에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눈앞에서 자신을 안심시켜주기 위해 미소짓는 가을만 보였다.
천천히 가을의 따스한 입술을 제 입술로 덮고는 목마른 아이마냥 빨아들였다.
가을의 두 손이 이정의 어깨 위에 올라와있었다.

 

두 사람 근처에 있던 관광객들은 놀라움 반, 감탄 반의 얼굴로 둘의 입맞춤을 바라봤다.
일부는 디카나 휴대전화로 사진을 찍기까지 했다.
결국 준표와 우빈, 지후가 현 상황을 파악한 후에야 관광객의 촬영을 막을 수 있었다.
 
우빈:(고개 저으며) 관광지에서도 닭털 날리느라 정신없구나.
잔디: 큭큭 선배 부러우세요?
우빈: 부럽긴 누가. (손 휘휘 내젓는다)
리라: 뭐 보긴 예쁘다 그치?
지후:(고개 끄덕) 그림이네.
준표: 보자보자하니 끝이 없네.

 

준표가 두 사람에게 가려 할 무렵 겨우 이정이 가을에게서 몸을 떼냈다.
가을은 사람들이 자신과 이정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깨닫자 얼굴이 화끈거려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이정이 재빨리 가을을 쫓아 손을 잡고는 저희를 보고 있던 친구들에게로 갔다.

 

준표: 이제 다 끝났냐? 윽!
잔디: 날도 더운데 라벤다 아이스크림 먹으러 가자.

 

잔디는 팔꿈치로 준표 복부를 세게 치고는 가을의 손을 잡고 매장으로 걸어갔다.
그 모습에 준표와 이정이 재빨리 잔디와 가을에게로 가서 둘을 떼어냈다.
뒤에서 지후와 리라, 우빈은 그저 웃기만 했다.

 

 


-비에이-

 

그림처럼 아름다운 풍경에 여자들의 환호성이 끊이지 않았다.
가을은 아예 삼각대까지 가져왔기 때문에 일행은 수시로 차에서 내려 사진을 찍곤 했다.

 

 

 

 

리라의 말대로 사진작가 마에다 신조의 사진갤러리 다쿠신칸에 들어가자 가을은 아예 이정까지 잊어버린 채 비에이의 풍경 사진에 넋을 잃고 바라봤다.
잔디와 리라도 예쁘다는 말만 연발했다.
고개를 내젓던 이정도 결국 가을에게 선물을 하려고 마에다 신조 사진집을 사고 말았다.

 

이정: 자, 선물.

가을:(눈 동그래져) 오빠!

이정:(씩 웃으며) 그렇게나 좋아하는데 어떻게 안 살 수 있겠어.

가을:(감격) 고마워요...

이정: 피식, 말로만?

 

가을이 무슨 말이냐는 표정으로 이정을 보자 이정은 기다렸다는 듯이 가볍게 가을의 입술에 베이비 키스를 했다.

얼굴이 새빨개진 가을이 주먹쥔 손으로 이정의 팔을 치자 이정은 여유롭게 웃으며 가을의 손을 잡고 갤러리 밖으로 나갔다.

 

준표: 하여튼 이정이 저 녀석, 진짜 못말리겠다.

우빈:(어이없어) 구준표 너도 만만치 않은거 알아?

준표: 뭐가! 잔디밭은 맨날 내가 뭔가 선물을 하면 화부터 버럭 내는데.

잔디: 네가 워낙 스케일이 커서 사람 질리게 하는 거지.

 

결국 여행이 시작된 후 처음으로 준표와 잔디의 말다툼이 나오고 말았다.

나머지 일행은 싸움이 커지기 전에 재빨리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동상이몽이라는 말대로 비에이의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은 제각각이었다.
지후와 리라는 마에다 신조의 사진전을 계획하기 시작했고, 준표와 이정은 잔디와 가을을 위해 별장을 짓는 것을 고려하는 한편, 우빈은 새로운 사업구상이 마구 솟아났다

 

 


-료칸-
 
그 날 저녁, 잠시 온천욕을 하고 푸짐한 저녁식사를 하면서 모두 다 행복을 느꼈다.
예전의 뉴칼레도니아와 달리 모두 다 한 상에서 밥을 먹었기 때문에 더 맛있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특히 잔디는 특산물인 털게를 먹느라 여념이 없었고 여관주인은 신나게 털게 요리를 공급했다.

 

잔디: 아~ 잘 먹었다.
준표:(흡족) 역시 여기에 묵길 잘했다니깐. 음식이 예술이야.
우빈:(짗궂게) 한 방 못써서 아쉽다고 할 땐 언제고... 구준표가 언제부터 먹는 것에 약해졌냐?

 

F4는 각방을 썼지만 여자들은 큰 방을 함께 쓰는 터였다.
특히 준표는 잔디와 한 방을 쓰고 싶었지만 이정과 지후, 우빈의 태클로 무산되어 처음에는 숙소를 잘못 골랐다고 불평이 대단했다.
게다가 전날 밤에는 재경까지 끼어드는 바람에 더더욱 료칸을 선택한 걸 후회했었다.

 

지후: 뭐 할 수 없잖아. 잔디가 저렇게나 좋아하는데 구준표한테 다른 선택이 있겠어?
이정: 게다가 유타카 입은 우리 아가씨들 모습도 아주 귀엽고 말야.

 

고급 료칸이라 그런지 제공하는 유타카도 아주 예뻐서 여자들은 물론이고 남자들도 눈이 즐겁다는 걸 부인할 수 없었다.
물론 더 응큼한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긴 했지만.

 

저녁 식사 후 커플끼리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싶었건만 눈치없는 여자들은 지후에게 노래를 불러 달라고 졸랐다.
지후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제 방에 가서 기타를 가져왔다.

 

지후: 어느날 그대가 아무말없이 떠나면
       세상은 너무 힘겨울텐데
       어느날 아침에 그대가 곁에 없다면
       하늘은 무척 캄캄할텐데

       하지만 그런일 없을거예요
       그대와 나 여기에 함께 왔으니

       힘겨웠던 숱한 지난 날들은
       모두 아름답게 추억이 되고
       서럽고 외롭던 많은 시간은
       예쁜 사진처럼 마음에 남아
       온 세상을 환하게 하죠
       그대와 함께라면


잔잔한 기타 반주가 끝나자 박수 소리와 함성이 료칸을 뒤덮었다.

 

잔디:(감탄) 선배 정말 좋은 노래에요! 제목이 뭐에요?
지후: 엉클의 '그대와 함께라면'이야. 맘에 들어?
가을: 가사가 정말 좋아요. 안그래요? (주위 둘러보며)
이정:(고개 끄덕) 우리 얘기같다.
준표: 꼭 시같은 걸.
우빈:(과장된 말투) 뜨아~ 구준표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다니 정말 최고의 선곡이다 윤지후.
리라: 그럼 날 위해 '라 로마네스카'도 연주해 줘 지후씨.
지후:(씩 웃으며) 얼마든지.

 

그날 밤엔 지후의 기타 연주와 노래가 료칸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준표와 이정은 첫번째 노래 가사를 계속 곱씹어보느라 더 이상 음악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마터면 사랑하는 사람을 영원히 잃어버릴 뻔했던 지난날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지금의 행복을 손에 넣기까지 힘겨워했던 시간이 두사람에게는 정말 노래 가사처럼 아름다운 추억이 되고 예쁜 사진같이 남았는지 갑자기 궁금해졌다.
그래서 행복한 얼굴로 지후의 연주를 음미하는 잔디와 가을을 보느라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다음날 아침-

 

여행온지 3일째 날, 준표는 각자 일정에 들어간다고 선언하고는 잔디와 함께 차를 몰고 사라져버렸다.
남은 사람들은 새삼스럽지 않다는 표정으로 각자 일정을 짜기 시작했다.

 

이정: 가을아 우린 어디로 갈까?
가을:(눈 반짝이며) 미우라 아야코 기념 문학관으로 가요!
이정: 아, 빙점의 작가?
가을:(고개 끄덕) 여기서 그렇게 멀지 않댔어요. 나 그 분 정말 존경하거든요.
이정: 알았어. 점심먹고 출발하자.

 

이정과 가을의 일정을 보면서 우빈은 절대로 동행하면 안되겠다 싶어 지후의 방으로 들어갔다.
지후와 리라는 노트북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우빈: 두 사람 오늘 일정 있어?
지후: 음악회에 가려고. 미리 예매해놨거든.
리라: 삿포로에서 음악 축제가 있는데 나름 프로그램이 알차다고 평이 자자해. 우빈씨도 갈래?
우빈: 어떤 거 보려고?
지후:(모니터 가리키며) 푸치니 스페셜에 갈꺼야. 마침 우리가 내한 공연 추진하는 성악가도 나오거든.

 

노트북 모니터를 들여다보던 우빈의 얼굴이 잠시 놀라움과 반가움이 스쳐지나갔지만 금새 사라졌다.
지후의 고개가 살짝 갸웃했지만 모르는 척 했다.

 


 

 

-삿포로-

 

음악홀에는 사람이 꽤 많이 들어찼다.
지후와 리라는 예약한 좌석에 앉아서 느긋하게 공연을 즐겼다.
푸치니의 특징이 고스란히 살아나는 웅장한 음악이 청중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2부가 시작되자 하얀 드레스를 입은 늘씬한 여인이 무대위로 올라왔다.
여인은 오페라 '나비 부인'의 아리아 '어떤 개인날'을 열창했다.
미국에 간 핑거톤을 기다리는 초초의 애잔함이 노래에 절절히 배어들었다.

 

지후는 리라의 눈가에 눈물이 고이는 것을 보고 살며시 손을 잡았다.
리라는 자신을 안심시키려는 지후의 마음씨가 고마워 미소를 지었다.

 

'난 항상 네 곁에 있어.'
'알아.'

 

눈빛으로 서로를 안심시키는 가운데 노래는 절정을 치달았다.       


 

공연장 맨 뒷좌석에서는 우빈이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얼굴로 오페라 글라스를 통해 무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8년전의 추억의 주인공인 미셸이 무대위에서 노래부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옛 추억이 밀려왔다.
단 하루를 제외하면 항상 음악실에서 자신과 애견 마이클에게만 노래를 들려주었는데, 이제 미셸은 어엿한 소프라노가 되어 있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듯 맑은 눈과 행복한 미소는 8년전과 똑같았지만 훨씬 더 아름다워진 미셸을 지켜보면서 가만히 미소짓는 우빈이었다.
프로그램에는 미셸이 그동안 여러 콩쿠르에서 입상했다는 기록이 적혀있었다.
미셸이 노래를 마치고 무대에서 사라지자 우빈도 미처 공연장 직원이 제지하기 전에 밖으로 나가버렸다.

 

 

한편, 삿포로의 유명한 라멘집에서는 준표와 잔디가 일본 라멘을 먹고 있었다.

료칸의 털게 요리만큼이나 맛있게 라멘을 먹는 잔디를 보면서 준표는 흐뭇해했다.

 

준표: 그렇게 맛있냐?

잔디: 응. 역시 본토에서 먹는 맛은 달라. 우리 엄마 아빠랑 강산이도 이거 무지 좋아할 거야.
준표: 다음엔 너희 가족이랑 함께 놀러오자.
잔디:(눈 휘둥그래지며) 정말?

 

잔디는 뜻밖의 말에 놀라서 가뜩이나 큰 눈을 더 크게 뜨고 준표를 바라봤다.
준표는 싱긋 웃고는 말을 이었다.

 

준표: 뭘 그리 놀래?
잔디: 생각해보면 너 우리집엔 자주 놀러와도 여행은 거의 간 적이 없지 아마?
준표: 어차피 한가족이 될거잖아. 어차피 우리집이야 가족여행이라는 거 꿈도 꾸지 못해도 너희집이라면 가능하잖아.
잔디: 너 갑자기 왜 그래?
준표: 그냥... (어깨 으쓱) 우리끼리라도 더더욱 가깝게 지내면 좋잖아, 안그래?
    너랑 너희 가족이랑 같이 좋은 거 공유하고 따듯한 추억도 많이 만들고 싶어.
잔디:(감격) 구준표...
준표:(진지) 앞으로 내가 더 잘할게, 잔디밭.
잔디:(짐짓 웃으며) 우리 여행 자주 와야겠다.
준표: 그러자고.
  
전에 없이 다정한 분위기가 준표와 잔디 사이에 가득했다.

 

 

 

-다음날 아침, 료칸-

 

마지막으로 아침식사 전 온천욕을 하는 여자들의 얼굴에는 아쉬움이 가득 묻어났다.
아름다운 바다를 보면서 저마다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

 

잔디: 여기 정말 좋다. 담에 또 오고 싶어.
가을: 나도 그래. 노상 온천이란 것도 첨인데 바다를 보면서 온천욕하니까 무지 신기한 거 있지.
리라: 이래서 홋카이도는 일본 사람들도 고급휴양지로 생각하는 모양이야. 환상적이야~
잔디: 담에 우리끼리 오는 거 어때요?
리라:(장난스럽게) 구준표가 알면 쫓아올 거 같지 않아?
잔디: 그럼 나중에 계산하라고 하죠 뭐.
가을: 난 찬성. 남자들이 나중에 오면 그때 같이 놀면 되잖아요.
리라: 그럼 담에는 겨울에 오자. 눈맞으며 온천욕하는 거 정말 낭만적일 거 같지 않아?
잔디:(환호) 꺄~ 상상만 해도 너무 좋아요.
가을:(흥분) 그러게요. 벌써부터 겨울이 기다려져요.

 


한편, 남자들은 빨리 온천욕을 끝내고 방으로 들어갔다.
우빈은 어제 미셸을 다시 본 여운에 빠져 약간 멍했지만 금방 기운을 회복해 친구들은 눈치채지 못했다.
이정은 평소답지 않게 선물로 이것 저것을 사서 짐을 꾸리느라 고생을 했다.
준표야 늘 잔디네 가족 선물을 사느라 여행갔다 돌아오면 짐이 두 배가 되었지만 이정의 이런 모습은 처음이라 지후와 우빈은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우빈: My bro. 뭘 이렇게 많이 산 거야?
이정: 아, 이제 돌아가면 가을이 아버지 뵈어야하는데 뭘 선물로 해야할지 몰라서...
지후:(물건 훑어보며) 와인, 일본술, 유리공예 술잔, 홋카이도 정통 과자, ... 골고루도 샀네.
우빈: 천하의 냉혈 카사노바가 미래의 장인 어른 인사드릴 준비한다는 거 진짜 안믿겨진다.
이정:(버럭) 카사노바니 뭐니 하는 말 그만 해!

 

이정의 신경질적인 반응에 지후와 우빈은 크게 웃었다.
식사하러 지나가던 준표가 웃음소리에 이정의 방으로 들어왔다.

 

준표:(책 집으며) 어? 이건 뭐야? 
이정: 아, 어제 미우라 아야코 기념 박물관에 간 김에 사왔어.
지후:(표지 보고) 빙점? 굳이 원서로 산 이유가 있어?
이정: 가을이가 적극 추천했어. 특히 죄와 용서에 대해서 사람 심리를 정말 잘 묘사했다고.
우빈:(고개 끄덕) 용서라...
지후: 가을이다운 추천이군. (대견하다는 듯한 웃음)
준표: 뭐 부실한 번역보다야 원서가 낫겠지. 그건 그렇고 빨리 아침먹자.
    잔디밭이 어제 이시야 초콜렛 공장 안갔다고 거기 꼭 들르고 귀국하재.
우빈: 그래 시로이 코히비토 초코과자나 실컷 사자고.

 

이정은 준표에게서 책을 건네받으면서 아버지를 용서할 날이 과연 올까 의구심이 들었다.
그래도 가을을 위해서 노력을 해야한다고 생각하면서 조심스럽게 책을 내려놓고는 친구들을 따라 식당으로 갔다.

 

이정이 식당에서 들어서자 가장 먼저 가을이 눈에 들어왔다.

저를 보고 환하게 웃는 가을의 얼굴을 보면서 이정은 자신이 과거 어떻게 가을에게 용서받았는지를 생각하며 미소를 지었다.

영문을 모르는 가을은 이정의 미소에 좋아할 뿐이었다.

 

 

잔디: 그러고보니 그 시로이 코히비토 과자 예전에 이정 선배가 가을이한테 선물했던 거 아냐?

 

밥을 먹다 문득 생각이 난듯 잔디가 옛기억을 들춰냈다.

 

준표: 맞아. 생일 축하 답례로 보냈었지.

우빈: 하고많은 초코 과자중에 왜 하필 이걸 보냈냐고 잔디 네가 의심을 했었지.

지후: 그 때 가을인 한사코 제 마음을 부인했었지. 그냥 답례일 뿐인데 너무 확대해석하지 말라고.

리라:(호기심 어린 표정) 그 과자에 얽힌 사연이라도 있는 거야?

 

이정은 자신의 아킬레스건인 일본으로 도망쳤던 기억이 화제에 오르자 마음이 불편해졌다.

가을 역시 이정이 그당시 이야기를 싫어한다는 걸 알기 때문에 당황했다.

 

가을: 뭘 지난 얘기를 들추고 그래요.

이정: ....

지후:(못들은 척) 간단히 정리하자면 이정이가 사랑하는 마음을 그 시로이 코히비토를 통해 가을이에게 전했었어. 둘이 제대로 사귀기 전에...

우빈: 그게 하얀 연인이란 뜻이거든.

리라:(감탄) 와 정말? 역시 이정씨는 센스 만점이구나. 그래서 두 사람 사귀게 된 거야?

잔디: 뭐 꼭 그 과자 덕분은 아니었고요.. 어쨋든 그 뒤에 두 사람이 교제하게 됐어요.

 

사연을 모르는 리라는 감탄의 눈빛으로 가을과 이정을 번갈아봤다.

그 눈빛이 불편해진 이정은 헛기침을 하고는 말을 툭 내뱉었다.

 

이정: 얼른 먹고 가자고. 벌써 9시야.

가을: 그래요.

잔디: 그리고 공장 가기 전에 오타루 해안가 드라이브 하고 가자.

준표: 누구 부탁인데... 알았어.

 

약간은 시끌벅적한 분위기 속에서 아침식사를 서둘러 마치는 일행이었다.

그 와중에 이정은 가을의 눈치를 살폈고, 가을은 미소로 괜찮다고 안심시켜주었다.

항상 용서받는 자신을 발견한 이정은 다시 한 번 빙점을 생각해보았다. 

이렇게 가을이 제 곁에 있으면 언젠가는 아버지를 불쌍하게 생각하는 걸 넘어서 용서해 줄 수 있는 날도 오지 않을까하는 작은 희망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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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 심각하게 산만한 거 같네요.

죄송합니다 에구구 ㅠ.ㅠ

결국 북해도 여행 사진으로 비루한 글을 좀 업그레이드시키려고 했습니다 --;

괜찮게 보이시나요? (후다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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