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안에 있는 여자들은 조심스럽게 혹은 노골적으로 바리스타와 그 앞의 카운터에 앉아있는 남자를 바라봤다.
"정말 잘 생겼다" 혹은 "눈이 너무 즐겁다", "오늘 로또 당첨됐다" 등등 다양한 감탄사가 여자들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물론 남자친구와 같이 온 여자들은 속으로만 혹은 무심결에 반응을 보였을 뿐이었다.
일현은 여유롭게 자신과 동생을 황홀하게 바라보는 여성들에게 영업용 미소를 간간히 날리다가 동생의 말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반면 이정은 자신과 형에게 쏟아지는 여성들의 시선을 전혀 파악하지 못한 채 제 고민을 형에게 호소했다.
일현:(뜨악) 뭐? 가을이 아버지 뵈러 간다고? 언제?
이정:(고개 끄덕) 응. 내일.
일현: 갑자기 어쩐 일이야? 저번 전시회 기자회견 때문에 그래?
이정: 아무래도 이제는 정식으로 가을이랑 사귀고 있단 말을 해야 할 거 같아서.
일현:(입꼬리 올라가며) 왜? 설마하니 가을이 아버지가 네 소문 먼저 듣고 반대하실까봐?
이정: 꼭 그런 건 아니지만... 뭐... 그런 것도 없긴 하지만...
일현은 쑥쓰러워 어쩔 줄 몰라하는 동생이 귀여워서 싱긋 웃었다.
2년전 도쿄에서 제게 절망적인 얼굴로 가을에게 너무 큰 상처를 줘서 도망쳤다고 용서받지 못할 거라고 아파했던 모습을 봤을 때 이렇게 행복한 고민을 할 날이 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었다.
이제는 어엿한 남자가 되어 사랑하는 여자의 집으로 인사를 한다니 참 시간이 빨리 흐른다 싶었다.
일현: 뭐가 고민이야? 말해 봐.
이정: 있잖아... 가을이 아버지한테 뭐라고 말을 해야 할 지 모르겠어...
일현:(씩 웃으며) 뭐라 하긴? '따님을 저한테 주십시오' 이렇게 말하면 되는 거지.
이정:(얼굴 붉어지며) 형!
일현:(능청) 결혼 허락받으러 가는 거 아니었어?
이정:(우물쭈물) 뭐 아닌 건 아닌데... 겨울이 말로는 가을이 아버지가 가을이 끔찍하게 아낀다고 하셔서...
일현: 죽었다 살아난 딸이니 당연하지. 너무 떨지 말고 솔직하게 네 맘 말해.
가을이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형이라는 사람이 참 속편하게 말한다 싶어서 이정은 약간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준표가 잔디네 식구로부터 대환영을 받았다는 얘기는 종종 들었지만 그 집이 특별한 경우라는 걸 잘 아는 이정이었다.
지후는 리라의 친아버지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저와 같은 고민을 할 일이 없었고, 우빈은 제 아버지가 쌍동이한테 남자친구가 없는지 벌써부터 노심초사하고 있다는 말만 해줬다.
결국 친구들에게서는 제대로 조언을 받을 수 없게 되어서 형을 찾아온 터였다.
그런데 저렇게 남일처럼 말하니 내일 어떻게 가을이 아버지를 만날지 걱정이 앞섰다.
일현:(진지하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진심보다 더 좋은 건 없어.
이정: 형?
일현: 가을이 아버지라면 우리 아버지처럼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너무 긴장하지 말고 네 진심을 말하면 되는 거야.
어쩌면 네가 우송의 후계자라는 것때문에 부담스러워하실지도 몰라.
그래도 물러서지 말고 똑바로 말을 해. 평생 가을이만 사랑하고 지켜줄테니 염려말라고.
이정:(반신반의) 정말 그러면 되는 걸까?
일현: 그래. 자신을 가져. 가을이랑 걔 동생도 옆에서 도와줄텐데 뭘 그리 걱정만 해.
이정:(한숨) 후우~ 그래도 지은 죄가 있으니 찔린다. 이래서 사람은 평소 착하게 살아야하나 봐.
가을이는 워낙 성실하고 바르게 살아서 누구에게도 당당한데 난...
일현:(자상한 미소) 이미 흘러가버린 과거에 연연하면 안 돼. 중요한 건 현재야.
난 가을이를 그렇게 깊이 사랑하는 네가 자랑스러워.
일현의 다정한 격려에 이정은 조금 자신감을 가져도 될까하는 작은 희망을 가졌다.
그런 이정을 보면서 일현은 흐뭇한 마음을 담아 이정의 커피잔을 채워주었다.
-같은 시간, F4 아지트-
F4가 없는 아지트에서는 잔디와 가을, 리라가 차를 마시고 있었다.
화제는 단연 내일 있을 이정과 가을의 아버지의 만남이었다.
잔디: 드디어 내일이네. 이정 선배가 너희집에 인사하러 가는 거 말야.
가을: 응. 우리 아버지가 오빠한테 잘 대해줘야 할텐데 좀 걱정된다.
리라: 소이정씨에 대해서 어느 정도까지 설명했어?
가을: 선입견 생길까봐 우송 후계자라고는 말 안했어요. 그냥 도예가이고 잔디를 통해 알게 되어 2년째 사귀고
있다고만...
잔디: 구준표처럼 환영받았으면 좋겠는데 (머리 긁적) 좀 무리겠지?
리라: 가을이 아버지 어떤 분이신데?
잔디: 뭐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딸바보라고 할 수 있죠.
리라:(눈 동그래져) 그래? 그럼 이정씨 고생하겠네.
가을은 잠시 제 아버지에게 이정이 인사하러 온다는 얘기를 했던 날을 떠올렸다.
분명 아버지는 크게 놀라시긴 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좋은 표정은 아니었다.
일단은 알겠다고만 말했을 뿐, 특별히 싫다거나 좋다는 티를 내지 않았다.
그래도 어딘지 모르게 불길한 기분이 드는 가을이었다.
가을:(애써 웃으며) 그래도 만나주신다니까 별일은 없을 거에요.... 아마도...
리라:(장난스럽게) 이정씨한테 "기생오래비같이 생긴 녀석한텐 내 딸 못줘!" 막 이렇게 버럭하시는 거 아냐?
잔디:(진지하게) 아주 불가능한 얘긴 아니죠.
가을:(불길) 아하하 설마요...
어딘지 모르게 걱정이 깃든 가을의 얼굴을 보면서 잔디와 리라는 그만 장난쳐야겠다 싶었다.
리라: 가을 네가 똑부러지게 말해. 넌 소이정밖에 없다고.
잔디: 그래. 어차피 아저씬 네 말 안들어주신 적 없잖아.
가을:(반신반의) 그렇겠...지?
리라, 잔디: 응.
가을은 제발 아버지가 이정을 환영해주길 바라면서 불안한 마음을 떨치려고 애썼다.
그런 가을을 보면서 잔디와 리라는 내일 참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안할 수 없었다.
-가을의 집-
이정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가을과 함께 가을의 아버지인 추재용씨 앞에 앉아있었다.
재용은 못마땅하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고 이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아버지의 표정을 보면서 가을은 걱정스럽게 이정을 살펴봤다.
겨울은 차를 내오면서 분위기를 띄우려고 짐짓 발랄하게 말을 건넸다.
겨울: 형부, 이렇게 집에서 만나니 더 반갑네요.
이정:(반갑게) 아, 반가워.
재용:(차갑게) 지금 누가 네 형부라는 거냐? 네 언니가 나 모르게 시집이라도 갔단 말이냐?
재용의 싸늘한 말에 겨울과 가을은 움찔했다.
이정은 더더욱 긴장이 되어 재용의 눈치만 살폈다.
일현의 조언을 떠올리며 침착하려고 했지만 자신을 환영하는 기미가 없는 재용의 얼굴을 보자니 입안이 바짝 마르는 것 같았다.
모두 조용히 겨울이 내놓은 차를 한모금씩 마셨다.
그리고 재용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이 침묵을 깼다.
재용: 자네, 소이정이라고 했지? 가을이한테 들은 바로는 도예가라고?
이정: 예. 얼마 전에 전시회를 마쳤습니다.
재용: 양친은 뭘 하고 계신가?
이정: 제 아버지도 도예가이십니다. 어머니는 전업주부입니다.
재용: 듣자하니 잔디 남자친구의 오랜 친구라고?
이정: 네, 그렇습니다.
재용:(눈썹 올라가며) 그럼 자네도 대단한 집 아드님이겠군. 안그런가?
내가 도예쪽으로는 문외한이지만 자네 이름은 분명히 들어본 적이 있거든.
이정: 제 할아버님께서는 우송이라는 박물관을 세우셨습니다.
제 아버지도, 저도 우송 박물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재용:(그럴 줄 알았다) 그래. 그 유명한 우송의 후계자로구만.
이정과 가을은 재용의 말투에서 어쩐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이정: 예. 원래는 형님의 자리였지만 지금 형님은 다른 일을 하고 있습니다.
재용: 우리 가을이 오랫동안 아팠던 거 알고 있겠지?
이정: 예, 알고 있습니다.
재용: 가을이는 세상물정 잘 모르는 순진한 아이라네. 그래서 난 내 딸이 평범한 사람과 맺어지길 바랬다네.
특히나 잔디가 신화 후계자와 교제하면서 세간에서 뭐라 하는지 들었기 때문에 더더욱 걱정했어.
그런데 역시나 내 우려가 맞았구만.
이정: 가을이는 금잔디처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을 겁니다.
저도 가을이가 힘든 시간을 보내게 하고 싶지 않아 교제를 시작한 후 최선을 다해 보호해왔습니다.
가을:(눈치보며) 아빠 그건 괜한 걱정이에요.
가을은 이정을 거들기 위해 대화에 끼어들었지만 재용은 그런 딸의 말을 못들은 척 했다.
재용: 우리 가을이 죽을 고비 넘긴 후로 난 얘가 원하는 건 뭐든 다 들어주겠다고 결심했네.
심지어 수녀원에 들어간다고 할 때도 반대하지 않았어.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가을이가 대학도 졸업하고 좋은 사람 만나서 결혼도 하고 행복하게 사는 모습 보고
싶었다네.
이정: 저는 가을이를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그리고 아버님이 걱정하는 마음은 이해합니다만 가을이를 금방 깨질 유리조각처럼 생각하시지 말았으면
합니다. 가을이는 1300도의 열을 이겨내는 단단한 도자기처럼 강하고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재용은 이정의 말이 뜻밖이라는 표정을 잠깐 지었지만 금방 퉁명스러운 얼굴로 바뀌었다.
겨울은 감탄하는 표정으로 이정을 바라봤다.
재용:(헛기침) 아주 내 딸을 잘 아는 것처럼 말하는구만. 건방지게...
이정: 아버님처럼 자세히는 아닐 겁니다. 하지만...
재용: 하지만?
이정: 저에 대해 혹시라도 선입견이라도 있다면 부디 거둬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얼마나 가을이를 사랑하고 아끼고 있는지 옆에서 지켜봐주셨으면 합니다.
재용: 자네 부모님은 가을이에 대해 뭐라고 하시나?
이정:(잠시 미소) 어머니는 가을이를 친딸처럼 사랑합니다. 그리고 할아버지도 가을이를 예뻐하고 있습니다.
가을: 맞아요. 제게 어머니가 되어주겠다고 하시고는 지금까지 정말 넘치도록 사랑해주고 있어요.
재용은 약간 놀란 얼굴로 딸을 바라봤다.
그러고보니 가끔씩 가을이 선물을 받았다며 행복하게 웃는 날이 있었다.
재용: 그럼 자네 아버님은 어떤가?
이정:(머뭇) 할아버지와 어머니의 의견을 따르실 겁니다.
재용:(날카롭게) 난 내 딸이 힘든 시집살이하는 거 원하지 않는다네.
이정: 아버님의 우려는 이해합니다. 하지만 가을이가 시집살이 할 일은 없을 겁니다.
가을: 그래요. 어머니가 절 얼마나 예뻐해주시는데...
자꾸만 가을이 이정을 편들자 재용은 심기가 불편해졌다.
소중한 딸이 혹시나 사랑에 눈이 멀어서 고생길로 접어들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자꾸만 들었다.
직접 얼굴을 보니 이정의 외모도 너무 화려해서 여자들이 꼬여들기 딱 맞겠다는 생각도 드는 터였다.
재용: 사실대로 말하자면 난 자네가 그다지 맘에 들지 않는다네.
잔디가 말한대로 여러 여자 울리기 딱 맞는 외모인데다가 지나치게 대단한 집안이라 가을이가 나중에 마음
고생할까 걱정부터 앞서거든.
이정:(뜨악) 예? 금잔디가요?
가을:(경악) 잔디가 언제 그런 말을 했어요? 아빠한테 직접 그렇게 말했어요?
재용: 예전에 우연히... (단호히) 하지만 분명히 제대로 들었다.
이정과 가을은 뜻밖의 악재에 난감해졌다.
재용이 오래전부터 이정에 대해 선입견을 갖고 있었으리라고 상상도 못했던 터라 이 난관을 어떻게 넘겨야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이정은 재용의 고집이 깃든 얼굴을 보고는 일현의 조언에 따라 자신도 가을처럼 진심으로 호소를 해야한다고 스스로에게 다짐을 했다.
이정: 외람되게 한말씀 드리자면, 저는 현재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과거 제 행실은 분명 자랑할만한 것이 못됩니다.
하지만 가을이와 정식으로 교제를 시작하고 2년동안 지금까지 가을이만 바라봤습니다.
제게 있어 가을이는 제 목숨보다 더 소중한 존재입니다.
전 지금 당장 결혼 허락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제가 얼마나 가을이를 사랑하는지 아버님께 보여드릴 기회를 주시길 바랄 뿐입니다.
이정의 말에 깃든 간절함이 재용의 귀에도 거짓으로 들리지 않았다.
재용과 이정을 번갈아 보던 가을도 침을 삼키고는 입을 열었다.
가을: 아빠, 전 이정 오빠가 아닌 다른 사람과의 미래는 꿈도 꾼 적이 없어요.
안나 수녀님도 제가 오빠를 만나기 위해 다시 살아났다는 말에 동의해주셨어요.
그런데 아빠가 그렇게 마음의 문을 닫고 우리가 얼마나 행복한지 제대로 봐주시지 않으면 하늘에서 엄마도
서운해하실 거에요.
아빠도 외할아버지한테 겨우 결혼 허락받으셨잖아요.
재용:(당황) 가을아... 너, 너 그걸 어떻게 알았냐?
겨울:(뾰로통) 저도 알아요 아빠. 외할머니한테 다 들었다구요.
재용: 그, 그건 말이다...
이정:(웃음 참으며) 아버님도 한번에 허락받으신 건 아닌 모양이네요.
딸들로부터 역습을 받은 재용은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순간적으로 '딸자식 키워봐야 말짱 헛거다'라는 생각이 머리속을 스쳐갔다.
가을과 겨울은 물론이고 이정도 전세가 역전되었다는 것을 감지하고 서로 재빨리 눈빛을 주고 받았다.
이정: 아버님, 지금 당장 가을이와 결혼해달라고 요청하러 온 건 아닙니다.
가을이는 아직 학생이고 앞으로 졸업도 하고 사서도 되어야 하니까요.
재용:(재빨리) 그러니까 말이지. 아직 결혼하려면 이르고 말고. 한 2~3년은 더 있어야지
이정:(눈 휘둥) 예? 그렇게나 오래요?
재용: 암튼 결혼이란 신중히 결정해야 하는 거야.
가을:(어이없어) 아무리 그래도요...
재용: 내가 자네 지켜보겠네.
예전 잔디말이 맞는지 지금 자네말이 맞는지 내 눈으로 확인할테니 앞으로 잘 하라고.
재용의 반허락에 이정과 가을의 얼굴이 환해졌다.
겨울은 두 사람 옆에서 쾌재를 올렸다.
반면 재용은 쑥쓰러운 마음에 계속 헛기침만 했다.
좀 더 이정에게 이것저것 곤란한 질문을 던져서 쉽게 가을이 데려갈 꿈도 꾸지 못하게 만들려고 했건만 자신의 과거가 탄로나는 바람에 낭패감이 들었다.
-클럽-
어제 이정과 가을의 일이 궁금해 모인 F4는 술을 마시고 싶다는 이정의 말에 우빈의 클럽으로 몰려가서 VIP룸에 자리를 잡았다.
이정은 호기심으로 눈이 반짝이는 친구들에게 어제 있었던 일을 모두 털어놓았다.
지후: 그래도 반허락 받았네. 앞으로 지켜봐주신다며.
좀처럼 감정표현을 하지 않는 지후가 웃겨 죽겠다는 표정으로 말하자 우빈도 소파를 뒹굴며 실컷 웃다가 말을 받았다.
우빈: 그러니깐. 어차피 너도 가을이 졸업 전까진 결혼 못할 거면서.
준표: 그러게. 반 년동안 지켜보면 걔 아버지도 네 맘 알아주시겠지.
우빈: 아마 둘이 닭털 날리는 거에 질려서 빨리 결혼시킬지도 몰라, 안 그래?
준표:(고개 끄덕) 가능성 높지.
준표까지 합세해서 약올리자 이정은 울컥해서 버럭 화를 냈다.
이정: 이게 다 금잔디 때문이잖아! 괜히 가을이네 집에서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준표:(움찔) 뭐 잔디밭이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버럭) 그러게 누가 여러 여자 만나고 다니래? 나처럼 한 여자한테만 순정을 바쳐야지.
이정: 그래도 옛날일 들쑤시는 건 너무 치사하잖아.
게다가 가을이한테 나랑 사귀라고 먼저 부추킨 건 금잔디였다고. 그런데 이제와서...
억울함에 몸이 저절로 떨리는 이정이었다.
나중에 겨울에게서 들은 말에 의하면 재용은 예전에 잔디가 가을의 집에 놀러와서 이야기하는 걸 우연히 들었다고 했다.
이정이 과거 소문난 바람둥이었다는 말에 재용은 머리 끝까지 화가 나서 당장 헤어지라고 말하려고 했다가 애비가 딸과 친구의 대화를 엿들었다는 티를 내고 싶지 않아서 참았다고 했다.
그 뒤로 가을을 나름 주의깊게 살펴봤지만 잔디네처럼 일이 벌어진 것도 없었고 무엇보다 가을이 워낙 행복해보여서 아무 말도 못했었단다.
지후: 진정해 이정. 의오빠인 나도 가을이가 시집간다고 생각하면 서운한데 아버진 어련하시겠어.
그냥 예비 장인이 한 번 심술부리는 거라고 생각해. 그 분 눈에야 네가 딸도둑으로 보일 거 아냐.
준표:(고개 갸웃) 잔디밭네는 처음부터 나 대환영했는데.
우빈: 그거야 금잔디네 집이 별난 거지. 그러니까 금잔디도 늘 예상을 깬다만... (키득거리는)
이정: 나도 가을이 아버지가 나 환영해줄 거라고는 기대 안했어. 그래도...
지후: 차라리 과거 카사노바라는 소리만 들은 거 다행으로 여겨.
너희 처음에 어땠는지 아버님이 아셨다면 아마 "내 딸 못줘!"라고 소리치며 너 쫓아냈을걸?
이정:(힘없이) 그래, 그 말 왜 안나오나 했다...
영원한 아킬레스건인 처음 시작을 생각하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이정이었다.
가을에게 자신이 줬던 그 잔인한 상처에 대해 재용이 반에 반이라도 알게 되었다면 아마도 결사반대를 했겠다 싶어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우빈: 앞으로 잘해. 가을이가 너랑 결혼못하면 수녀원 가겠다고 했다며.
그러니까 아버님도 언젠가는 완전히 허락하실 거야. 지금부터 아버님 비위 잘 맞춰드리라고.
이정:(툴툴) 그래도 2~3년이라니 너무 길어. 난 가을이 졸업만 기다리고 있는데...
준표: 정 걱정되면 약혼이라도 해. 그럼 추가을이 우송 며느리라는 거 온천하에 다 알려지게 되잖아.
지후:(무심히) 결혼 날짜야 나중에 할아버지 도움 받으면 되잖아.
아무리 가을이 아버지가 딸 내주기 싫어해도 할아버지 의견은 무시하기 힘들걸.
나이 많으신 분이 앞으로 살 날이 멀지 않았으니 빨리 손주 며느리 보고 싶다고 하면 마냥 미루진 못하실
텐데 뭘 고민해.
우빈: Wow 역시 윤지후 넌 무서운 놈이야. 그런 계산까지 다 하다니...(감탄)
준표: 어쨌든 이정이 너 나보다 먼저 결혼하면 안 돼. 우리 중에 내가 제일 먼저 결혼할 거니까.
이정:(어이없어) 준표 넌 이와중에 그 생각뿐이냐... (고개 저으며) 그래... 실컷 재미있어 해라...
지후: 이 정도에 불평하지 마. 가을이가 네 아버지한테 겪은 수난에 비하면 새발의 피다.
이정:(뜨끔) 알았어, 알았다고.
실컷 놀려대긴 해도 풀이 죽은 이정을 본 F3의 마음은 즐겁기만 한 건 아니었다.
3년 반전 은재가 갑자기 죽고 절망에 빠졌던 이정이 이렇게 사랑하는 사림을 만나 결혼허락을 받으려고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있자니 다행이라는 생각도 드는 친구들이었다.
우빈: 그래도 보기 좋다, 이정.
이정: ? 뭐가?
우빈: 지금 네 모습 아주 좋아 보여. 예전엔 네가 이렇게 행복한 고민을 할 날이 올거라고 상상 못했는데 말야.
준표:(고개 끄덕) 그건 그래. 나도 네가 행복에 겨워 투정부리는 걸로밖에 안보여.
지후: 동감이야. 지금 너... 정말 행복해보여.
이정은 친구들의 말에 자신이 지금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깨달았다.
과거 누구도 사랑하지 않고, 사랑받을 꿈도 꾸지 못했던 자신이 이렇게 일기일회의 사람을 만나 함께 할 미래를 꿈꾸고 있는게 얼마나 행복하고 감사한 일이라는 걸 왜 잊었나 싶었다.
이정: 그러게... 나 지금 행복한 투정을 하고 있는 거네...
준표:(이정 어깨를 치며) 알면 됐다 임마.
우빈: 잘 해봐 my bro. 내가 화려한 싱글 생활 청산할 맘이 들 수 있게.
지후: 지금 그 마음 잊지 마라 이정.
F4는 이심전심으로 웃고는 건배를 했다.
-같은 시간, 잔디의 집-
가을은 잔디가 근무하는 복지관의 자원봉사가 끝나고 잔디와 함께 잔디의 집으로 왔다.
어제 일에 대해서 좀 따질 것도 있고 해서 아예 하룻밤 자기로 하고 아버지에게도 허락을 받아놨다.
가을:(원망스럽게) 하여튼 아빠가 너한테서 오빠가 옛날 바람둥이었단 말을 듣고 얼마나 우리가 곤란했는지
몰라.
잔디:(난감) 아니 그게... 난 분명히 그 때 선배가 이젠 너한테 꼼짝 못하는 신세가 되어 정말 대단하다고 말을
했는데.. 왜 아저씨는 앞말만 들으셨던 건지 진짜 알다가도 모르겠다.
분명 가을의 집에 놀러갔을 때 잔디는 이정이 선물한 로즈마리 꽃밭 사진을 보면서 감탄을 금치 못해 그렇게 말을 했었다.
설마하니 그 말을 가을의 아버지가 들으리라고는, 그것도 과거 바람둥이라는 앞말만 들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었다.
거의 2년 전의 일인데 그걸 지금까지 잊지 않고 계셨다니 왠지 오싹해지는 잔디였다.
잔디: 그래도 아저씨 반대하신건 아니잖아. 지켜봐주신다며... 이정 선배 할아버지랑 같은 말씀이네...
가을:(한숨) 경우가 달라. 아빠는 진짜 오빠가 못마땅하지만 '할 수 없이 봐준다' 이런 인상을 팍팍 줬다고.
잔디:(애써 웃으며) 아무튼. 아저씨도 결국은 허락하실걸. 너 수녀원 들어가는 꼴을 보느니 선배한테 시집
보내실 분이잖아.
가을: 그래도 아빠한테 협박하는 거 같아서 기분 안좋다. 나 어떻게 키워주셨는데...
착잡해하는 가을의 얼굴을 보자니 잔디의 마음도 덩달아 무거워졌다.
맨 처음 이정에게 첫눈에 반했다는 가을의 말만 듣고 이정에게 다가가라고 등떠밀어서 가을이 상처입는데 일조한 것도 자신이었고, 지금 사실상의 결혼 허락을 구하는데 장애물을 추가로 만들어 준 것도 자신이니 말이다.
명색이 베스트 프렌드인데 왜 항상 가을에게 도움을 주기는 커녕 고민거리를 안겨주나 싶어 기분이 착잡했다.
잔디: 가을아 미안... 난 왜 맨날 일을 키우는지 모르겠다. 친구가 되어서 도움은 못될 망정...
가을:(화들짝) 아냐! 그런 말 마, 잔디야. 내가 얼마나 너한테 많은 도움과 위로를 받았는데.
잔디: 딴 건 몰라도 네 연애문제 만큼은 진짜 일만 벌이는 거 같아. 시작부터 지금까지...
가을:(고개 저으며) 아니라니깐. 그런 말 자꾸 하면 나 화낼 거야.
잔디: 고맙다...
가을은 잔디에게 괜히 화풀이를 한 거 같아 미안해졌다.
항상 무조건적으로 제 편을 들어주는 소중한 친구인데...
가을: 미안해. 내가 그냥 너한테 하소연 좀 한 거야.
우리 아빠가 너희집처럼 오빠 환영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싶어서...
엄마가 계셨다면 분위기가 조금은 좋았을텐데... 오빠 완전히 긴장해서 난리도 아니었어...
잔디: 선배의 그런 모습 못봐서 좀 아쉽네. 선배 추종자들이 알면 분명 모두 기절할텐데 큭큭.
가을: 피식, 그런가?
잔디: 어쨋든 너무 염려 마. 아저씨는 네 말 안들어주신 적 없잖아.
지금이야 아저씨가 선배한테 삐딱하게 대하셔도 결국엔 아들 하나 생겼다고 좋아하실 거야.
가을:(희망섞인 표정) 그런 날이 오겠지?
잔디:(강하게) 그러엄~ 그러니까 아무 염려 마.
가을: 고마워, 잔디야.
가을은 열심히 제 불안을 달래주는 잔디가 고마워 꼬옥 껴안았다.
준표와 이정이 옆에 있으면 당장 떼어냈겠지만 오랜만에 단짝을 끌어안으니 긴장된 마음이 풀리는 것 같았다.
잔디 역시 착하고 예쁜 제 친구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을 꿈꾸는 모습이 보기 좋아 가을의 등을 토닥여줬다.
잔디: 가을아 네가 행복해져서 난 진짜 기뻐.
가을: 알아 잔디야... 그래서 난 항상 너에게 감사해... 늘 날 걱정해줘서...
잔디: 진짜 우리가 전생에 친자매였는지도 모르지.
가을: 어쩌면 부부였거나.
잔디와 가을은 포옹을 풀고는 꺄르륵 웃었다.
오랜만에 같이 신나게 수다떨면서 밤을 보내는 두 아가씨의 모습에는 불안의 그림자조차 범접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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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이정이가 가을이 아버지에게 인사드리는 내용을 짧게 쓰려고 했는데 어찌하다보니 길어졌네요...
만화나 드라마 보면 선뜻 딸내주는 아버지 거의 없던데... 너무 가을이 아버지 미워하지 마세요~~
어쨋거나 가을이 아버지도 반대는 안하셨어요 쿨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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