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기억의 주인_다음 이야기

04. 반격 준비 上

지혜의 여신 2009. 7. 26. 22:26

-F4 아지트-

 

이정과 지후, 우빈이 가볍게 술을 한잔씩 하는 가운데 준표가 들어왔다.

 

이정: 제일 바쁜 구준표가 드디어 왔네.
준표:(의자에 앉으며) 도대체 뭔 일이길래 사람을 부르는 거야? 또 가을이가 화냈냐?
우빈:(빙글빙글 웃으며) 유감스럽게도 이번엔 그게 아니랜다.
지후: 그래도 가을이 일인거 맞지?

 

이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젯밤 현섭의 전시회때 이정과 가을이 예상보다 훨씬 빨리 들어간 걸 이상하게 생각했던 터라 F3의 표정이

약간 굳었다.
 
지후: 리라에게 얘기 들었어. 가을이랑 너 갑자기 표정이 굉장히 나빠져서 무슨 일이 생긴 거 같았다고.
준표:(걱정스럽게) 혹시 너희 아버지가 또 일 벌였냐?
우빈:(이정 얼굴 보고는) 저 녀석 얼굴 보아하니 맞는 거 같은데.

 

항상 직설적인 준표덕분에 이정은 말을 꺼내기 편해졌다.
그 지나친 솔직함으로 잔디에게 많이 구박도 먹고 F4 친구들에게도 놀림도 받았지만 지금 이순간만큼은 준표

의 그 성격이 매우 고마웠다.

 

이정: 아버지가 가을이에게 날 떠나라고 명령했어.
지후:(차분하게) 역시 그랬군.
우빈: 가을이 널 떠날리가 있냐? 너희들같은 닭살 커플이 또 어디있다고.
준표:(툴툴) 우리 마귀할멈이나 네 아버지나 하여튼...
이정: 게다가 내가 곧 선을 보고 결혼을 할 거라고 하시더라.
우빈, 준표:(경악) 뭐?
지후: 그러니까 이정 널 정략결혼시킬테니 미리 알아서 떠나라 이거군.
이정: 그렇지.

 

준표는 예전의 힘겨웠던 고3시절이 떠올라 파르르 몸을 떨었고 우빈과 지후는 이정을 살펴봤다.
일단 이정의 눈에는 분노가 담겨있었지만 표정은 비교적 차분했다.

 

준표: 잔디밭이 이 얘기 들으면 걔가 먼저 소이정 죽여놓을걸.
우빈: 굳이 상상을 안해도 그냥 눈앞에 그림이 떠오른다.
지후: 어떤 여자야?
이정: 몰라. 선 얘기는 하지도 않았어. 그냥 절대로 선도 안볼거고 결혼은 무조건 가을이랑 할 거라고

      선전포고만 했어.
준표:(만족스럽게) 잘했어. 네가 세게 나가야해. 안그럼 네 아버지가 막무가내로 밀어붙인다니까.
우빈: 그럼 언론 플레이를 하실 확률이 크겠네. 준표네도 예전에 그랬잖아.
지후:(고개 끄덕이며) 그게 정석이지. 그건 어떻게 대처할 거야?
이정: 그래서 너희들에게 도움 좀 청하려고.

 

준표, 우빈, 지후의 눈이 이정에게 고정되었다.
이정은 단호한 표정으로 제 형제같은 친구들을 바라보았다.

 

이정: 일단 언론을 최대한 막아줘. 분명 아버지는 어디론가 내 약혼설을 흘릴 거야.
준표: 염려 마. 누가 뭐래도 신화는 언론계의 최대 광고주라고.
지후: 하지만 신화와 수암, 일심이 힘을 합친다해도 100% 막을 수 없다는 거 알지?
이정: 먼저 상대방을 알아내서 정략결혼 따위 꿈도 꾸지 못하게 만들어야지.
우빈: 그럼 뒷조사는 내몫이 되겠군. 어떤 여자인지 말만 해.
       확실히 물러나게 만들어줄게.
이정: 고맙다.
지후: 하지만 이런 일 앞으로도 또 벌어지면 그 때마다 우리에게 손 벌리려는 생각은 아니지?

 

자꾸만 딴지를 거는 듯한 지후의 태도가 맘에 안드는 준표는 큰 소리를 벌컥 냈다.

 

준표: 얌마 윤지후! 너 왜 자꾸 초치는 말만 하는 거야?
       너 가을이 오빠라며! 그럼 잘 되는 방향을 같이 모집해야지.
우빈: 큭큭 구준표, 모집이 아니라 모색이야.
준표: 그거나 이거나.
지후: 오빠니까 냉정하게 따지는 거야. 예쁜 내 동생 또 이정이 때문에 우는 거 보고싶지 않으니까.
이정: 그래. 지후 말이 맞아. 나역시 나때문에 가을 마음 다치게 할 수 없어.
      지금은 너희들의 도움을 받겠지만 앞으로 정략결혼이라는 말을 다시는 꺼내지 못하게 확실히 못을

      박을 생각이야.
우빈: 어떻게?
이정:(자신만만하게 웃으며) 히든 카드를 써야지. 아버지와 이사회를 평정할 카드를 쓸 때가 된 거 같아.

 

이정의 눈에는 어느새 분노가 사라지고 자신감이 넘쳐났다.
지후는 그런 이정이 마음에 들어 이정의 어깨위에 손을 올렸다.

 

지후:(짐짓 싸늘하게) 생각해보니 참 기분나쁜데. 감히 이 윤지후의 의동생을 우습게 여기는 사람이 있다니

       말야.
준표: 동감이다. 걔는 이 구준표님의 약혼녀의 베프인데 말야.
우빈: 그래 우리 F4의 여자를 우습게 여긴다는 건 결국 우리 F4도 우습게 여긴다는 뜻이지.
이정: 그러니까. 소이정의 여자 함부로 건드릴 수 없다는 거 이 기회에 확실히 보여주겠어.

 

F4는 서로 얼굴을 바라보고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준표가 잔을 꺼내 제 앞에 놓자 이정은 자신과 친구들의 잔을 가득 채웠다.

 

지후:(잔을 높이 들며) 내 소중한 동생 가을과 우리들의 형제인 이정의 사랑을 위해 건배를 해볼까.  
준표: 소이정. 나와 잔디밭처럼 멋지게 사랑 지켜내라구.
우빈: 그래. 우리 F4의 우정만큼 견고한 사랑이니까 멋지게 이 고비 넘기리라 믿어.
이정: 고맙다 친구들아.

 

F4는 건배를 하고는 깨끗하게 잔을 비웠다.
20년 가까이 쌓은 우정과 형제애가 네 사람을 굳건하게 묶어주고 있었다.

 

 

 
-우송 소유 고택-

 

서울 교외에 아주 멋진 한옥이 우뚝 솟아있었다.
아흔아홉칸짜리 거대한 집은 아니었으나 넓직한 마당에 복숭아나무와 오동나무, 은행나무와 연꽃이 가득 피어 있는 연못이 있었고, 뒤뜰은 대나무숲이 울창해서 끊임없이 솨-하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 한옥의 주인은 바로 우송의 창업주이자 국보급 도예가이며 이정의 할아버지인 소윤환이었다.
그는 아들 현섭에게 우송을 물려준 후, 우송의 명예고문이 되어 서울 교외에 있던 전통 한옥을 대폭 수리해서 살았다.
이 집에서 윤환은 도예사를 정리하는데 온힘을 기울이는 한편, 문화재 환수 작업을 막후에서 지휘하고 있었다

.

 

7월의 어느 토요일, 손자 이정이 저를 찾기 위해 이 고택을 찾아왔다.
대학을 졸업한 후, 우송의 이사로서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는 이정이 대견해 이 뜻밖의 방문이 마냥 반가

웠다.
윤환은 손수 차를 내어 손자에게 대접했다.
어린 날 차가 쓰다며 얼굴을 찌뿌렸던 이정은 이제 맛을 음미하며 차를 마시고 있었다.

 

윤환: 네가 얼마나 바쁜지 잘 알고 있다. 얼마 전에는 프랑스에서 전시를 하고 왔다지?
이정: 예, 할아버지.
윤환: 그곳의 평은 나도 들었다. 이제는 너도 네 세계를 완벽하게 구축해서 흐뭇하단다.  
이정: 아직 할아버지의 그 깊이에 견주어보면 어림없습니다.
윤환:(흐뭇하게 웃으며) 그건 네 연륜이 쌓이면 얻게 될 게다. 그나저나 오늘 여기는 어쩐 일이냐?
      파리 전시회때 작품이라면 이미 나도 다 보았거늘.
이정: 새로운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너무 건방진 말일 수 있겠지만 지금까지 제가 만든 작품가운데 가장 나은 작품이라 감히 자부합니다. 
     꼭 할아버지께서 먼저 평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이정은 조심스럽게 비단에 싼 상자를 윤환앞에 내밀고는 차례 차례 포장을 풀기 시작했다.
윤환은 이정의 표정을 보고 이 작품에 확신이 있음을 알아차렸다.

 

잠시 후 아름다운 청화백자 접시가 모습을 드러냈다.

가장자리는 로즈마리잎으로 테두리를 둘렀고, 중심부는 로즈마리 꽃과 잎이 일정한 무늬를 만들고 있었다. 
투명하리만치 깨끗한 흰색은 푸른 꽃을 더욱 생생하게 피어난 듯 보이게 해주었다. 
 

윤환은 손자가 어느 새 이만큼 성장했나 싶어 속으로 감탄을 했지만 얼굴에 드러내지 않고 냉철하게 그릇을

살펴보았다.
한참 윤환이 살피는 동안 이정은 잔뜩 긴장해서 제 할아버지를 바라볼 뿐이었다.

 

윤환: '청화백자보상화당초문접시(1994년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308만달러(한화38억원)에 낙찰됨)와 비슷

        한 형식이구나.
이정: 예 할아버지.
윤환:(접시 그림을 뜯어보며) 그래.. 하지만 네 것이 훨씬 더 단순하면서도 자연스러운 느낌이 드는 것이

     오히려 마음을 끄는구나.
     음... 아주 단정하면서도 멀리 가는 향기를 품고 있는 꽃이로고.
     허나 지금까지 이런 꽃을 자기에서 본 적은 없다. (이정을 보며) 이건 무슨 꽃이냐?
이정: 로즈마리입니다.

 

윤환은 놀라서 이정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정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윤환:(놀란 어조) 서양꽃을 그려넣었단 말이냐?
이정: 중국에서는 이 꽃을 미질향(迷迭香)이라고 부를 정도로 오래전부터 약재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굳이 중국을 들먹이지 않아도 로즈마리는 동양란처럼 향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사랑과 정절을 뜻하는

     고운 꽃입니다.
     그리고... (잠시 머뭇)
윤환: 말해보거라.
이정:(윤환의 눈을 보며 단호히) 제 사람의 꽃입니다.
윤환:(경악) 무엇이라?!

 

윤환은 제 손자가 당당히 사랑하는 여인을 닮은 꽃이라고 말하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저도 모르게 두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떡 벌린 채로 이정을 바라보았다.
이정의 뺨에 살짝 홍조가 돌아 생기있어 보였고 표정에는 제 사람을 떠올리는지 설레어하는 티가 역력했다.

 

도예가로서 맨 처음 전시회를 열었을 때, 아직 어렸던 이정은 차분하고 침착했지만 10대다운 생기라던가 패기

는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오만하다는 평이 추가되었을 뿐이었다.
대학을 들어간 후, 은재와 교제하면서 젊은이다운 발랄한 모습도 조금씩 보여준다고 안심했었다.
그마저도 은재의 갑작스러운 사망 이후 완전히 사라지고 더 없이 싸늘하고 공허한 모습을 한 이정을 많이 걱

정했던 윤환이었다.
이 꽃의 주인이 제 손자를 그리 바꾸었나 싶어서 윤환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윤환: 허허... 지금 네 얼굴을 보고 있자니 이 꽃을 닮았다는 그 아이가 참 궁금해지는구나.
이정: 할아버지도 분명 좋아하실 거에요.
윤환: 그럼 이 그릇은 그 아이를 생각하며 만든 것이렷다.
이정: 예. 세상 사람들에게 소이정의 사람을 소개하고 싶었습니다.
     은재를 잃고 방황하던 저를 다시 살게 해준 그녀가 얼마나 아름답고 강한 사람인지 알게 해주려고요.
윤환: 그렇게나 그 아이가 좋은 게냐?
이정:(단호히) 제 하나뿐인 인연입니다. 평생 제 곁에 둘 겁니다.
윤환:(고개 끄덕이며) 그러냐... 

 

윤환은 이정의 의도를 파악하고 곰곰히 생각에 잠겼다.
지금 우송은 이정의 결혼을 슬슬 준비하고 있었다.
쟁쟁한 문화계 인사와 재계는 물론이고 정치권에서도 혼담 제의가 들어오고 있었다.

 

현섭이 정략결혼으로 든든한 처가를 확보했고, 뛰어난 도예솜씨를 선보인데다 탁월한 기획능력으로 우송을 국내 최대 개인박물관으로 입지를 튼튼히 했지만, 끊임없는 여성편력으로 정작 자기 집안을 엉망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처음 기대했던 큰 손자 일현은 결국 현섭에게 반발해 집을 뛰쳐나갔고, 작은 손자 이정은 뛰어난 도예능력을

뽐냈지만  불행한 뒷모습을 보였다.

 

우송의 주인이 흔들리면 우송 역시 흔들릴 수 밖에 없기에 윤환은 늘 며느리와 손자를 걱정했다.
몇 번이고 현섭을 불러 가족을 챙겨야 한다고 역정을 냈건만 대꾸는 항상 같았다.
"우송에게는 아무런 피해를 주지 않는다"라고.

그랬기에 윤환은 이정의 결혼은 우송의 발전보다는 개인의 행복에 초점을 맞춰야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현섭이 자신처럼 이정 역시 정략결혼을 해야한다고 주장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현섭은 우송을 스미소니언 박물관 같은 세계적인 박물관으로 성장시키고 싶어했다.
그리고 그런 현섭의 야심을 이사진 대다수가 지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윤환 자신이 우송의 창립자이자 대주주로서 이사진에게 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우송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지금 이정이 결혼을 원하는 사람을 직접 만나서 판단을 내려야만 했다.

 

이정은 생각에 잠긴 제 할아버지를 물끄러미 바라만 봤다.
윤환은 일단 결단을 내리면 그 누구도 저지할 수 없었지만 그 결단을 내리기까지 두고두고 심사숙고하는 사람

이었다.
예술가로서의 고집이 매우 센 반면, 남의 말을 들을 줄 아는 융통성이 있어 이정도 현섭보다 윤환이 더 대화

하기 편했다.
무엇보다도 윤환은 가족이 안중에도 없는 현섭과 달리 어머니와 형, 자신을 사랑해주었으니까 말이다.

 

한동안 두 사람은 말없이 차를 마시면서 이정이 가져온 작품을 틈틈히 살펴봤다.
윤환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윤환: 이정아, 네 말대로 이 작품은 지금까지 만든 것중에서 최고의 작품이 될 거다.
     이보다 더 네 혼을 실어넣은 건 없을테니 말이다.
이정: 예 맞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불후의 걸작을 만들 수 없는 법이니까요.
윤환: 좋다, 그 아이를 한 번 데려오너라. 내가 직접 봐야겠다.
이정:(반색) 정말이세요?
윤환: 허허, 이 놈 보게. 손주 며느리로 허락하겠단 말이 아니라 한 번 보겠다는 거 뿐이라니까!
이정:(싱글벙글) 알고 있습니다. 언제가 좋으세요?
윤환:(일부러 무뚝뚝하게) 내가 어디 갈 일도 없고 하니 너희들이 시간나면 오도록 해라.
이정:(환하게 웃으며) 알겠습니다.

 

이정은 입이 귀에 걸려서 차를 탄산음료마냥 단숨에 마셔버렸다.
조금 뜨거웠지만 그조차 인식하지 못한채 싱글벙글 웃으며 접시와 할아버지를 번갈아 살펴봤다.
 
지금까지 저토록 환한 손자의 모습을 또 봤을까 싶어 윤환은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억지로 웃음을 삼키고는 차를 더 마셨다.
어떤 규수인지 미리 사전조사를 좀 할까 싶다가 선입견을 갖지 말고 자신의 사람보는 눈을 믿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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