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빈:(고개 갸웃) 평소에는 그렇게 닭털 날리면서 어째서 지금까지 가을이를 안지 않았다는 거야?
이해가 안간다.
준표:(투덜투덜) 잔디밭이랑 똑같이 그런 눈치가 아예 없는 거 아냐? 친구아니랄까봐.
지후:(눈빛 날카로워지며) 설마... 가을이가 항응고제로 지혈을 잘 못하는 거 걱정해서?
가을이 수술받은지도 벌써 3년 반이 지났는데
F3는 나름 진지하게 이정과 가을의 현 상황에 대한 원인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냥 놔뒀다간 F4 우정에 금가는 말이 나오겠다 싶어 이정은 말을 꺼낸 자신을 탓하며 답을 하기 시작했다.
이정: 첨엔 지후 네 말대로였어. 살짝 베인 걸로 병원까지 와야했던 그 날의 소동이 자꾸 떠올랐거든.
준표: 하긴.. 그 날 손수건이 새빨갛게 물드는 거 보니 섬뜩하긴 했다.
우빈: 근데 지금도 가을 지혈 안돼?
지후: 하지만 지금은 항응고제 복용하지 않을 거야.
할아버지 말씀으로는 보통 심장이식 수술을 받고 1년동안 복용한다고 하던데.
F3가 의구심에 찬 눈길로 이정을 보자 이정은 알았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이정: 수녀님과 약속했어...
지후: 안나 수녀님?
이정은 고개를 끄덕였고 우빈도 기억을 더듬더니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오직 준표만 이해를 제대로 하지 못해서 이정과 지후를 번갈아봤다.
이정: 알잖냐 가을이에게 안나 수녀님은 엄마나 다름없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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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반 전, 가을과 교제를 시작하고 첫번째 크리스마스를 맞기 전에 가을은 이정을 신화대 병원 원목실로 데려가서 인사를 시켜줬었다.
이정도 가을이 힘들 때마다 곁에서 많은 위로를 주고 힘을 주셨던 안나 수녀를 만나 반가움과 따스함을 느꼈다.
안나 수녀는 이정에게 반가움을 표시했고 그 후 셋이서 다가오는 크리스마스 계획에 대해 신나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가을은 전화로 잠시 자리를 비웠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안나 수녀는 이정에게 당부의 말을 꺼냈다.
수녀: 스텔라가 올 초에 이정군 때문에 많이 혼란스러워했는데 이렇게 두 사람이 다정한 사이가 되어 기뻐요.
이정:(뜨끔해서) 제가 부족한 점이 많아 가을이에게 상처를 많이 줬었죠.
수녀: 처음에는 다 시행착오를 겪기 마련이랍니다. 중요한 건 현재에요.
이정: 예....
수녀: 두 사람 서로를 진심으로 위하고 아끼고 있다는 거 느낄 수 있어요.
저야 뭐 스텔라를 수녀로 만들 기회를 놓친게 아깝긴 하지만 다 주님의 뜻이니 받아들일 수 밖에요.
이정:(진지하게) 지금 가을이가 수녀가 된다면 아마 저는... (말을 잇지 못한다)
수녀:(방긋 웃으며) 스텔라는 이정군을 만나서 위로하기 위해서 새 생명을 얻었다고 말했어요.
처음 수술받은 뒤에는 다시 살아난 게 주님의 뜻이라고 했던 아이였는데 말이죠.
스텔라는 하느님 대신 이정군을 선택했답니다. 아주 확고하게요.
그러니 걱정할 거 없어요.
이정은 안나 수녀의 말을 듣고 새삼스럽게 감격했다.
쑥스럽게 웃으며 차를 한 모금 마시는 이정을 보면서 안나 수녀는 말을 이었다.
수녀: 오랫동안 스텔라를 지켜본 사람으로서 이정군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해도 될까요?
이정: 말씀하십시오.
수녀:(이정의 눈을 보며) 스텔라를 지켜주세요. 몸도 영혼도 모두.
이정: 예?
수녀: 사랑이란 자신보다 상대방을 배려하고 아껴주는 거랍니다.
스텔라는 이정군에 대한 마음이 앞서 자신이 세운 원칙을 저버릴 수 있어요. 워낙 착하고 순수한 아이라.
이정: 저는... (머뭇거리다) 가을이에게 정말 많은 상처를 주었고 많은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하지만 가을이는 그런 저를 용서해주고 받아줬어요.
그렇게나 착한 가을이... 더 이상 저때문에 고민하고 상처받는 일 없을 겁니다.
약속드리겠습니다. 제가 꼭 지켜준다고요.
이정은 결의에 찬 표정으로 안나 수녀를 보며 굳게 다짐을 했다.
안나 수녀는 흐뭇하게 이정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 순간, 가을이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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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후:(만족스럽게) 그래서 충실하게 그 약속을 지키고 있다는 거구나.
우빈: Yo~ 멋있는데 my bro. (휘파람 분다)
준표: 하기사 네가 지은 죄가 오죽 컸어야 말이지.
F3의 불신과 의혹의 시선이 감탄과 찬사로 바뀌자 이정은 쑥쓰러워졌다.
하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뿌듯함도 느껴졌다.
이정: 수녀님 말씀대로 하느님대신 날 선택해주었는데 확실히 지켜줘야지.
우빈:(짖궃은 표정과 말투) 그런데 말야, 이정 너 한번도 그 결심 흔들린 적 없었냐?
준표: 그러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호기심 어린 시선)
이정은 그런 반응이 나올 줄 알았다는 듯 피식 웃었다.
묘한 웃음에 우빈과 준표의 머리위로 물음표가 떠올랐다.
이정: 수녀님께서 날 위해 적절한 처방전을 내려주셨지. 가을이에게도 안전 장치를 주셨고.
지후는 '아~'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준표와 우빈은 서로 얼굴을 쳐다봤다.
준표: 그게 뭔데 그래? 처방전과 안전 장치라니?
이정: 그런게 있다. 너무 자세히 알려고 하지 마라.
이정은 이제 느긋한 표정이 되었다.
지후도 차를 마시면서 더 이상 이 화제에 신경쓰지 않는다는 티를 확실히 냈다.
우빈: 그건 그렇고... 지금이라도 가을 아지트로 부를까? 화는 풀게 해줘야지.
준표: 잔디밭 부르면서 같이 부르면 오지 않겠어?
이정은 잠시 잊고 있었던 고민거리가 다시 생각나자 축 늘어졌다.
장거리 비행의 피로가 다시 밀려오는 것 같았다.
그런 이정을 보고 지후는 조용히 휴대 전화를 꺼내 어디론가 문자를 보냈다.
잠시 후 문자가 왔다는 알림음이 들리자 지후는 전화 액정을 보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지후: 가을이 집근처 공원에 가봐. 좀있다 나올 거야.
준표:(놀라서) 어떻게 한 거야?
지후:(씩 웃으며) 오빠랑 면담 좀 하자고 했지. 가을이도 많이 속상할 테니깐 하소연 할 사람이 필요할 거야.
우빈: 역시 지후 넌 무서운 녀석이야. 가을이 얼굴도 안보고 속마음 읽어내다니.
이정: 언제 보기로 했는데?
지후:(시계 보고) 지금 출발하면 될 거야. 내가 지금 가는 길이라고 했거든.
이정:(맘에 안든다는 표정으로) 아무튼 고맙다, 윤지후.
이정은 서둘러 아지트를 빠져나갔다.
우빈과 준표가 말을 걸 틈도 없었다.
우빈:(고개 저으며) 저게 정녕 그 옛날 냉혈 카사노바 소이정이란 말인가.
준표: 야 임마, 넌 아직 진정한 사랑을 안해봐서 모르는 거야.
지후: 피식, 리라는 동생이 없어서 다행이야. 이정이처럼 저렇게 오해할 일도 없고 말야.
준표:(느긋하게) 잔디밭도 동생이라곤 강산이밖에 없어 편하다.
우빈: 그나저나 오늘밤 안으로 두 사람 화해할까?
지후: 할 거야. 가을이도 이정이한테 오래 화 못내는 애니까 말야.
좀 더 이정이 안절부절 못하게 만들어도 되는데 말야, 워낙 착한 애라서 참..
지후의 음흉한 미소에 우빈과 준표는 지후가 지금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근린공원-
길고 긴 한여름의 낮이 끝나고 완전히 어둠이 내려앉은 시간에 가을은 가로등 아래서 책을 읽느라 정신이 없었다.
낮에 있었던 이정의 엉뚱한 오해에 화가 잔뜩 나서 정우를 데리고 도서관으로 가서 사과를 거듭한 후 집으로 들어와버렸다.
집에 와서도 화가 가라앉지 않아 잔디와 전화통화를 하면서 이정의 행동을 실컷 성토하자 겨우 맘이 조금 풀렸다.
겨울은 친구들과 영화를 보고 온다고 연락했고, 아버지도 야근이라 집에서 혼자 저녁을 먹자니 허전했다.
이정도 사과하다 지쳤는지 더이상 전화도 없고 문자도 보내지 않았다.
결국 지후가 면담하자는 문자를 보내자 즉시 책을 들고 공원으로 나왔다.
리라와 연애를 하면서도 늘 동생이라며 자신을 챙겨주는 지후에게 항상 고마워하고 있던 터였다.
가져온 책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에 푹 빠져있느라 가을은 어느새 이정이 제 앞에 서있다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정은 잔뜩 긴장한 채로 가을의 앞에 섰다.
눈을 반짝이며 책에 푹 잠겨버린 가을의 얼굴은 정말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아직 저에게 얼마나 화가 났을까 걱정스러워 함부로 말을 걸 수도 손을 뻗을 수도 없었다.
결국 가을이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어 제 앞의 이정을 발견했다.
놀라서 손에서 책이 떨어졌다.
가을: 이정 오빠...
이정: 지후대신 내가 왔어... (가을 눈치 살피며) 정말 정말 미안해. 그만 화 풀어주지... 않을래?
보름동안 네 얼굴 못봐서 정말 미치는 줄 알았는데...
가을은 서둘러 책을 주워들고는 벌떡 일어났다.
눈을 가늘게 뜨고서 이정을 째려보는 가을의 얼굴에는 아직 화가 남아있었다.
가을:(원망섞엔 말투로)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이정:(한숨쉬며) 내가 미친 거지. 나중에야 정우가 기억나더라고.
어떻게 겨울 남친 얼굴을 그렇게 완벽히 잊어버렸는지 나 스스로도 참 어이가 없더라.
가을: 정우 겨울이랑 200일 이벤트하고 싶다고 나한테 도와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리라 언니가 나한테 준 뮤지컬 초대권 정우한테 준건데....
어떻게 불쑥 나타나서는 냅다 주먹부터 날릴 수 있어요? 것도 얼굴에..
두 사람 200일 망치면 오빠가 책임질 거에요?
이정:(두 손 앞으로 들며) 두 번 다시 이런 일 없을 거야. 맹세할게.
그리고 겨울이랑 정우는 내가 근사한 레스토랑 예약해놓을게.
가을은 필사적으로 사과하는 이정의 얼굴을 보고있자니 더이상 화를 내기 힘들었다.
누가 뭐래도 이정은 우송의 이사이자 세계적인 도예가로서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아무리 가슴속에 상처가 많다 해도 자신의 잘못에 대해 이렇게까지 몸을 낮춰 사과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지금 이순간 강아지같은 눈빛을 하고 열심히 미안하다 말하는 이정에게 가을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거둬들였다.
이정:(머뭇) 가을..아?
가을은 고개를 숙이고 억지로 서글픈 목소리를 지어냈다.
가을: 나중에 집에서 계속 드는 생각이 뭐였냐면요... 오빠는 그렇게나 날 믿지 못할까 하는 거였어요..
난 첫눈에 오빠한테 반해서 지금도 그 마음 그대로인데.. 아니 점점 더 좋아지고 있는데...
오빠 졸업한 뒤로 사회생활하느라 너무 바빠서 예전처럼 자주 못봐서 아쉬운 건 나인데...
정작 오빠는...
이정:(말 끊으며) 아냐, 내가 어떻게 네 마음을 의심하겠어.
문제는 나야. 네가 너무나 예쁘고 사랑스러워서 내가 없는 동안 이상한 놈들이 네게 접근할까 늘
걱정만 하는 못난 인간이 바로 나라구.
가을:(고개 들고) 나도 그래요. 난 너무 평범해서 언제 오빠가 가문에 어울리는 사람과 맺어질 지 몰라..
가을은 저도 모르게 현섭과의 대화가 떠올라 목이 정말 막히는 것 같았다.
가을이 제 아버지와 만났을 줄은 꿈에도 생각못하는 이정은 뜻밖의 말에 알 수 없는 화가 치밀어올랐다.
이정:(버럭) 누가 너보고 평범하다는 거야?
가을:(놀라서) 예?
이정:(가을 손잡으며) 넌 날 다시 살게 해줬잖아. 가을 네가 아니었음 난 몸만 살아가는 허깨비였을 거야.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내 곁에 있을 사람은 추가을 하나 뿐이야.
가을: 하지만... 오빠가 사는 세계에선 정략결혼이라는 게...
이정: 소이정에겐 정략결혼따위 없어!
가을: 오빠....
이정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를 보는 가을을 꼭 끌어안았다.
은재가 떠난 후 더이상은 제 것이 아닌 것만 같았던 행복과 사랑을 준 가을없이 살아갈 세상은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빠르게 뛰고 있는 두 사람의 심장소리가 서로의 귓속에 파고들어왔다.
두 사람은 서로가 서로를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는지 말로 하지 않아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이정:(속삭이듯) 아무데도 가지 마... 약속했잖아 우리 두 번 다시 헤어지지 않기로...
가을:(조용히) 응.. 그래요...
이정은 가만히 포옹을 풀고 두 손으로 가을의 얼굴을 감싸쥐었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속에는 간절함이 깃들어있었다.
조금 전까지 화를 내고 사과하던 것이 무색해지게 사랑이 가득 담긴 눈빛을 주고 받다가 서서히 두 사람의 얼굴이 가까워지더니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
전에 없이 뜨겁고도 절박함이 묻어나는 키스를 하는 두 사람이었다.
결국 가을은 숨이 막힌 듯 두 팔로 이정의 어깨을 밀어내자 겨우 이정이 떨어졌다.
두 사람은 무너지듯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한참을 말없이 숨을 고르다 결국 가을이 먼저 말을 꺼냈다.
가을: 그거 알아요? 아까 오빠한테 화났던 거 거짓말처럼 사라졌다는 거?
이정: 다행이네. 나 그럼 용서받은 거 맞지?
가을:(고개 끄덕이며) 그래요... 다신 오빠도 오해같은 거 안할테니까..
이정:(가을의 머리 쓰다듬으며) 그래...
두 사람은 다시 가벼워진 분위기 속에 마주보며 웃음을 나눴다.
가을: 오빠 피곤하겠어요. 얼른 들어가서 쉬어요.
이정: 조금만 더 같이 있자. 10분만 더.
가을:(시계 보고는) 그럼 20분만 더 앉아있다 일어나는 거에요. 약속하는 거죠?
이정은 생글생글 웃으면서 저에게 귀엽게 눈웃음치는 가을을 멍하니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을은 활짝 웃고는 머리를 이정의 어깨에 기댔다.
이정은 가을의 달콤한 향기에 취해 팔을 뻗어 가을의 어깨를 감쌌다.
가을: 전시회 어땠어요? 얘기 좀 해줘요.
이정: 뭐 똑같지...
약속한 20분이 훨씬 지나 밤이 깊어갔지만 두 사람은 조용조용 이야기를 나누느라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눈치 없는 매미만 노래를 부르는 가운데 한여름의 밤이 깊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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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을 커플은 나이를 먹었건만 아직 철없는 이 몸때문에 연애질은 여전히 사춘기 수준에서 머무를 뿐입니다....
앞으로도 므흣한 장면은 나오기 힘들거에요 아마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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