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현섭과 함께 그의 연구실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갑작스럽게 연락을 받고 오는 길이었다.
현섭: 아가씨가 우리 이정이와 오래 사귀었다는 건 들었는데.
가을: 사귄 지 2년이 넘었습니다.
현섭: 이정인 날 닮아 여러 여자 만나는 걸 좋아하는 애인데 의외다 싶었어.
가을: 저 이전에는 차은재씨만 사랑했다는 거 알고 있습니다.
현섭:(놀란 눈치) 은재도 알고 있나?
가을: 이정 오빠와 함께 납골당에 찾아가서 인사했었습니다.
현섭: 호오~ 보통이 아니군.
가을은 현섭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봤다.
확실히 이정과 닮은 구석이 많았다.
눈매, 얼굴 윤곽, 분위기.. 그런 것들은 두 사람이 부자지간이라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현섭에게서는 이정에게 볼 수 있는게 없었다.
진실, 사랑, 헌신같은 가을이 사랑하는 이정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현섭: 이제 아가씨는 졸업반이라고 들은 거 같은데.
가을: 네.
현섭: 졸업후엔 뭘 할 생각인가?
가을: 사서가 되려고 합니다.
현섭: 이정이와의 결혼을 꿈꾸는 게 아니고?
가을: 제 꿈은 사서가 되는 겁니다. 결혼은 그 다음 문제입니다.
현섭: 의외로군.
가을: 이정 오빠에게 도예가 있듯이 저에겐 책이 있습니다.
저희들은 서로의 꿈을 존중하고 있습니다.
현섭: 우송의 안주인이 아니라 도서관 사서를 꿈꾼다라. 진심이라면 정말 재미있는 얘기로군.
가을: 제게 있어 이정 오빠는 우송의 후계자가 아닌 자신의 꿈을 빚는 도예가일 뿐입니다.
현섭은 너털 웃음을 터트렸다.
현섭: 아가씨는 역시 순진하군. 오랫동안 심장병을 앓았다고 들었는데 그래서 세상물정을 잘 모르는 모양이야.
가을:(한숨쉬며) 어쩌면 그럴 지도 모르겠네요.
현섭: 이정인 우송의 당주가 될 거야. 그러기 위해서는 결혼은 걸맞는 집안의 규수와 해야만 해.
가을: 저는 평범한 서민이라 안된다는 말씀이군요.
현섭: 어차피 이정이에게 허락된 자유는 연애뿐이야. 그 말은 아가씨와의 관계는 끝이 보인다는 얘기지.
가을: ...
현섭: 다행히 아가씨는 자신의 꿈이 있으니 이정이와 헤어져도 문제없을 것 같은데.
이정이한테 말해봐야 애비 말은 듣는 척도 안하니 아가씨가 알아서 정리해주면 좋겠는데.
가을: 제가 먼저 이정 오빠를 떠나라는 말씀인가요?
현섭:(만족스럽게 웃으며) 부탁하지.
가을은 잠시동안 말없이 현섭을 바라봤다.
아들에 대한 배려라고는 조금도 없는 사람.
이래서 이정 오빠가 아버지를 끔찍히도 싫어했구나 싶어 가슴이 아파왔다.
가을: 교수님은 지금 아버지로서 제게 부탁하시는 건가요? 아니면 우송의 당주로서 명령하시는 건가요?
현섭:(멈칫) 그게 무슨 소리인가?
가을: 아버지로서 아들의 장래를 걱정하느라 부탁하셨다면 저도 고민을 했을 겁니다.
현섭: 그런데?
가을: 지금 교수님은 당주로서 제게 명령을 내리시는군요. 그렇다면 저도 고민할 게 없습니다.
현섭:(눈빛 매서워진다) 거절한단 소린가?
가을:(차분한 표정과 말투) 교수님은 한 번이라도 이정 오빠에게 아버지가 되어주셨나요?
현섭: 무슨 말을 하려는 건가?
가을: 왜 이정 오빠가 저를 오랫동안 만났는지 생각해보신 적 있으셨나요?
교수님 말씀대로라면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을텐데요.
현섭: 그 녀석 속을 낸들 알겠나.
가을: 아버지로서 이정 오빠에게 평생 관심이 없으셨으니까요.
그래서 오빠가 은재씨를 잃고 1년 넘게 힘들어하는 것도 방치하셨던 거고, 그 다음으로 저와 계속 사귀는 것도 이해못하시는 거겠죠.
현섭: 지금 날 비난하는 건가?
현섭의 날카로운 눈빛을 가을은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바라봤다.
인생을 헛되이 사는 사람을 가장 싫어하는 가을로서는 현섭에게 약한 모습을 보일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두 사람 사이의 긴장감이 최고조로 치닫고 있었다.
가을: 저는... 이정 오빠의 멍든 가슴을 봤습니다.
무관심했던 아버지와 너무나 연약해서 선배에게 신경써줄 수 없는 어머니 때문에 새카맣게 타버린 그 가슴을요.
그래서 오빠가 저를 필요로 하는 한, 절대 떠나지 않기로 약속했습니다.
현섭: 만약 이정이가 아가씨를 선택한다면 지금껏 갖고 있는 걸 모두 잃게 될텐데 그래도 좋은가?
가을: 처음부터 저는 소이정 한 사람만을 봐왔습니다.
설령 이정 오빠가 우송 후계자의 자리를 잃는다해도 제게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현섭: 그렇다면 아가씨때문에 이정이가 모든 걸 다 잃어도 상관없단 소리군.
가을: 오빠와 저 사이의 일은 저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시작도 저희끼리 했으니 마무리를 한다면 그 역시 다른 사람 간섭없이 하겠습니다.
현섭:(비웃는 말투로) 병원에 오래 지낸 데다 공부만 했으니 순진한 소리만 하는군.
가을:(냉정하게) 더 이상 드릴 말씀이 없으니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오늘 일은 이정 오빠에게 말하지 않겠습니다.
가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허리숙여 현섭에게 정중히 인사를 하고는 밖으로 나왔다.
문을 닫자마자 가을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어차피 한 번은 겪을 일이라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저토록 차가운 소교수와 대화를 하니 그동안 이정이 얼마나 상처받았는지 짐작할 수 있어 슬펐다.
'내가 오빠를 계속 지켜줄 수 있을까요?'
가을은 고개를 가로젓고는 다시 씩씩하게 걸음을 옮겼다.
이미 화살은 시위를 떠나버렸으니 되돌릴 길은 없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계속 이정곁에서 그가 상처를 입으면 보듬어주는 것 뿐이었다.
이정이 자신을 다시 찾아와 모든 상처를 다 보여주었던 그 날, 절대로 헤어지지 말자던 약속을 지키고 싶었다.
그러려면 강해져야했다. 그래서 눈물조차 흘릴 수 없었다.
-일현의 카페-
이정이 선물한 자기 풍경에서 맑은 소리가 흘러나오자 일현은 입구를 바라봤다.
가을이 카페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방긋 웃으며 자신을 보는 가을의 표정이 어쩐지 그늘이 진 거 같아 일현은 걱정스럽게 가을을 봤다.
가을은 일현을 마주보고 카운터앞 자리에 앉았다.
가을: 안녕하세요 일현 오빠.
일현: 무슨 일 있는 거니?
가을: 예? 무슨 인사가 그래요?
가을은 일현이 자신의 우울한 기분을 눈치챘을까 싶어 짐짓 가볍게 농담조로 말했다.
그렇지만 가을의 시도는 통하지 않았다.
여전히 일현의 표정에는 염려가 깃들어 있었다.
일현: 넌 포커페이스가 안된다는 거 잊었니?
가을: 손님한테 뭐 마시겠냐고 묻지도 않고 너무해요.
일현:(한숨) 그래 뭐 마실래? 티라떼말고 딴 게 마시고 싶은 거니?
가을:(생긋 웃으며) 핫 초콜렛이요.
일현은 일단 가을이 원하는 대로 핫 초콜렛를 만들어주었다.
핫 초콜렛 거품 위에 그려진 별을 보고 가을은 일현에게 감사의 미소를 지었다.
가을: 오빠가 워낙 예쁜 작품들만 주니까 다른 카페에 가기 힘들다니까요.
일현:(싱긋 웃으며) 이제야 진짜로 웃는구나.
가을: 하여튼 일현 오빠도 지후 오빠만큼 무섭다니까요.
일현: 사람 표정 보는 게 내 일이잖니.
가을은 별이 망가질까 조심하면서 핫 초콜렛을 한 모금 마셨다.
따듯한 음료를 마시자 아까보다 기운이 나는 것 같았다.
가을: 오빠가 보기에 난 얼마나 강한 거 같아요?
일현: 왜 그런걸 묻니?
가을:(컵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오늘... 꼭 눈의 여왕같이 차디찬 사람을 만났어요.
가까이 하면 심장까지 얼어붙을 것만 같은 그런 사람이었어요.
일현: 그 사람이 너에게 뭐라고 했니?
가을:(가볍게 한숨) 말할 수 없어요. 미안해요.
일현은 잠시동안 가을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무슨 사연인지 알 수는 없어도 매사 긍정적인 가을이 저런 말을 하는 걸 보면 지금 힘들어한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하필이면 이정이 전시차 해외에 나간 지금 가을에게 안좋은 일이 생겨 일현은 안타까웠다.
그래서 자신이 대신 가을을 위로해야겠다고 맘을 먹었다.
일현: 내가 아는 추가을은 외유내강이란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이야.
이정이를 구해준 천사니까 말이야.
가을: 오빠의 멍든 가슴... 아직 완전히 아물지는 않았겠죠?
일현: 그런 건 평생을 가는 거라는 걸 너도 알잖니.
하지만 중요한 건 가을이 네 덕분에 이정인 아픔을 씻어버렸다는 거지.
가을: 난 그래도 내가 조금 더 강해졌으면 좋겠어요.
동화 속 겔다가 온갖 역정을 다 이기고 카이를 찾아가서 얼어붙은 심장을 녹여버린 것처럼요.
일현: 지금도 넌 충분히 강해. 너무 스스로를 몰아붙이지 마.
가을:(일현을 보면서) 정말 그럴까요?
가을은 '나 이정 오빠를 아버지에게서 지켜줄 수 있을 만큼 강할까요?'라고 묻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일현은 가을의 얼굴을 보고는 더 이상은 나아가면 안된다는 것을 직감했다.
일현:(다정하게 웃으며) 물론이야.
일현은 가을의 잔을 흘깃 보고는 마시멜로를 한웅큼 넣어주었다.
그 모습을 보는 가을의 눈이 동그래졌다.
가을: 일현 오빠!
일현:(장난스럽게 윙크하며) 힘내라고 주는 거야.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 해도 때론 이런 처방전이 필요하니까 말야.
가을은 더 이상 묻지 않고 기운을 불어넣어주는 일현이 고마웠다.
형제라서 그런 건지 일현도 이정처럼 늘 가을에게 자상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가을은 환하게 웃으면서 장난스럽게 말했다.
가을: 그래도 늘 이렇게 특별 처방전 주면 곤란할텐데요. 사장님한테 걸리면 어떻게 해요.
일현:(가을 머리 쓰다듬으며) 염려 마, 내가 매출 올려주는 거에 비하면 마시멜로 몇 개는 별 거 아니거든.
가을: 아~ 맞아요. 바리스타 챔피언에게 박하게 대할 사장님은 이 세상에 없겠네요.
일현: 그렇지. 역시 가을인 과수석이라 이해가 빠르다니까.(짐짓 너스레)
가을: 잘 마실게요 오빠. 무지무지 고마워요.
가을은 편안해진 표정으로 핫 초콜렛을 마저 마셨다.
그런 가을을 일현은 흐뭇하게 봤다.
다시 풍경소리가 들리자 일현은 새로 들어오는 젊은 여성 두 명에게 영업용 미소를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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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흐르고 흘러 기억의 주인 에필로그를 쓴 시점에서 1년 반이 지난 후의 이야기입니다.
가을은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여름방학을 보내고 있는 중이며, 이정은 2년 반동안 우송의 이사로 일하면서틈틈이 전시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해 세계적인 도예가이자 우송의 후계자로서의 입지를 굳히고 있습니다.
이정과 가을의 나이도 25세, 24세가 되었으니 슬슬 결혼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해 소교수가 두 사람을 떼어낼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지금까지의 한없이 행복했던 시간에서 벗어나 시련에 부딪힌 두 사람입니다.
과연 어떻게 헤쳐나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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