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약속

약속, 영원으로 만들다 07

지혜의 여신 2010. 2. 20. 00:38

 

 

 

-이정의 집-

 

나현:(깜짝 놀라) 밀라노?


모처럼 제 집에 놀러온 현애와 차를 마시던 나현은 뜻밖의 말에 놀라서 찻잔을 떨어뜨릴 뻔 했다.

반면 현애는 생글생글 웃으며 설레임을 감추지 않았다.

 

현애:(고개 끄덕) 응. 가을이도 데려갈 거야. 외국에서 우리 예쁜 딸네미랑 실컷 데이트나 하려고.

나현: 정말 좋은데서 학회하네. 부럽다.

 

나현의 목소리에는 부러움이 가득했다.

그런 나현에게 현애는 같이 가자는 말을 하려다 뭔가 생각난듯 멈칫했다.

 

현애: 어쨌든 운이 좋았어. 학회 일정이 설연휴랑 겹쳐서 환자들에게도 덜 미안하게 됐고 말이지.

나현:(짐짓 비꼬듯) 김현애 선생님 일중독을 누가 말리겠어~

현애:(손 내저으며) 아유~ 누가 들으면 내가 진짜 일중독자인줄 알겠다.

나현: 왜 아니야? 내가 내려가도 너 환자 돌보느라 늘 시간도 못내잖아.

현애: 글쎄 그건 네가 타이밍이 항상 나빠서 그런거라니깐.

       그래도 저번 크리스마스엔 다같이 오키나와에서 잘 놀았잖아.

 

나현과 현애는 지난 크리스마스에 가을과 이정을 데리고 오키나와 여행을 다녀왔었다.

겉으로는 다 함께 여행을 다녀온지 너무 오래됐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속마음은 이정과 가을의 사이를 점검하기 위해서였다.

오키나와에서 엄마들은 이정이 가을에게 진심이라는 걸 확인하고 기뻐했지만 가을이 계속 이정을 동생으로만 보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어 약간은 실망했었다.  

현애는 나현이 가을에게 이정의 마음을 알아달라고 부탁하려는 걸 말리느라 진땀을 흘렸다.

 

나현: 그나저나 밀라노에만 있다 올 거야? 이왕 이태리 간 김에 다른 도시도 좀 보고 오지 그래?

현애:(방긋 웃으며) 그렇잖아도 피렌체에도 가기로 했어. 가을이가 꼭 거길 가고 싶다고 해서 말야.

나현:(눈 동그랗게 뜨며) 그래? 왜 하필이면 피렌체야? 거기보단 로마가 더 낫지 않아?

현애: 큭큭. 냉정과 열정사이땜에 그래.

나현: 응? (뭔가 생각하더니) 아~ 그 일본 소설 말하는 거야?

현애:(고개 끄덕) 응. 가을이가 그 소설 엄청 좋아하거든.

       첨에 밀라노로 학회 간다는 말을 듣자마자 바로 자기도 데려가달라고 조르더라니깐.

나현: 얘도 참.. 그냥 아무때나 같이 여행가자고 말하면 될 걸...(한숨)

 

나현의 목소리에서 서운함과 아쉬움을 감지한 현애는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항상 나현이 제 딸을 사랑하고 예뻐해주는 건 고마웠지만 그 마음이 가을에게 부담이 되지 않을까 늘 우려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현애는 가만히 손을 뻗어 나현의 손을 잡아주었다.

 

현애: 알잖아. 우리 가을이 독립심 강한 거.

나현: 그건 알지만...

현애:(짐짓 명랑하게) 우리 딸 끼고 사는건 바로 너잖아. 이 기회에 나도 엄마로서 점수 좀 따야지.

        이제 유학가면 더 얼굴보기 힘들어 질텐데.

 

유학이라는 말에 바로 나현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가을이 이정과 제 곁을 떠날 날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고 생각하니 걱정이 앞섰다.

 

나현: 가을이 조기 졸업이 가능하다며?

현애:(활짝 웃으며) 그렇다네. 지금 독일에 있는 학교를 알아보는 중이야.

나현:(놀라서) 독일? 미국이 아니고?

현애: 가을이 아빠 친구들한테 조언을 구하더니 독일로 가겠다고 하네.

        원래 가을이가 미국보다는 유럽을 더 좋아했잖아. 시스템도 같이 공부하려면 공공의료가 발달한 유럽이

        낫다고.

나현:(힘없이) 그럼 올 가을엔 독일로 유학가겠네.

현애: 그렇지... 얘가 벌써 독일어 시험도 다 봤더라고.

       (너털웃음) 하여튼 엄마한테 말안하고 저 혼자 처리하는 거 보니까 다 컸다 싶어 흐뭇하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하고 그러네.

 

나현과 현애는 가을이 홀로서기를 준비하는 모습을 보면서 대견함과 서운함을 동시에 느꼈다.

특히 나현은 불안함까지 추가로 느끼고 있었다.

 

나현: 이제 좀 있으면 나와 정이 곁을 떠날테지... 우리집에 데려온게 엊그제 같은데...

현애:(달래듯) 너무 불안해하지 마... 저 애들이 정말 인연이라면 잘 될 거야...

나현: 하지만 가을이 독일에서 다른 사람 만나기라도 하면...

현애:(말 자르며) 그건 모르는 거야. 혹시 알아? 가을이가 독일에서 이정이의 빈자리를 깨닫게 될지.

나현: 그럼 좋겠지만...

현애: 난 인연을 믿어. 억지로 인연을 만들 수는 없는 거야...

나현: 그런... 걸까?

현애:(고개 끄덕) 우린 할만큼 했어. 앞으로는 애들 몫이야.

 

현애는 다정하게 나현의 손을 잡고 손등을 토닥여주었다. 

일현이 집을 나간 날, 나현이 얼마나 슬퍼했는지 생생하게 기억하는 현애였다.

앞으로 가을이 유학을 떠나는 건 일현과는 다른 경우지만 나현이 또 다시 마음이 무너지는 슬픔을 느낄 거라는 걸 알았다.

 

현애:(부드럽게) 우리가 사돈이 되지 않아도 우린 계속 지금처럼 지낼 수 있을 거야.

        네가 가을이에 대한 애정을 거둘 일이 없을 것처럼 나도 계속 이정이 예뻐할 테니까.

나현:(한숨내쉬며) 사람일이란 참 묘한 거 같아. 내가 원한건 그저 행복한 가정을 갖는 거 뿐이었는데...

현애: 원래 인생은 계획대로 진행되는 게 아니야. 왜 그 유명한 말도 있잖아.

        인생은 예측불허. 그리하여 삶은 의미를 가진다. 

나현: 정말 그런걸까?

현애:(씩 웃으며) 무엇보다 우리가 지금까지 절친으로 지낼 거라고 그 누가 생각했겠어.

        생각 안나? 맨 처음 우리 고등학교에서 한반이 됐을 때, 넌 나한테 관심도 안가졌잖아.

        너 완전히 도도 공주님이어서 나같은 평민같은거 완전히 안중에도 없었잖아.

나현:(웃음 터트리며) 맞아, 생각난다. 

 

어느 새, 추억을 떠올리며 웃고 떠드느라 나현과 현애는 이정과 가을도 다 잊고 고등학생으로 돌아간 듯한 기분에 젖어들었다.          

 

 

 

 -신화호텔 라운지-

 

잔디:(눈 동그랗게 뜨며) 설연휴에 밀라노랑 피렌체에 있을 거라고? 좋겠다 가을아~

 

잔디는 부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가을과 손바닥을 부딪혔다.

가을도 꺄르륵 웃으면서 연신 좋다는 말을 반복했다.

두 사람을 보면서 준표는 맘에 안든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지후는 모두 귀엽다는 듯 미소만 지었다.

 

잔디와 가을은 같은 동네에서 함께 자란데다 가을 모녀가 잔디네 세탁소의 단골이었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알고 지냈다.

하지만 지금처럼 단짝이 된 건 잔디가 신화대에 진학한 후, 준표와 교제를 시작한 뒤였다.

처음으로 준표와 함께 파티에 참가했을 때, 가을이 자연스럽게 잔디의 곁에 있어주면서 진한 동지애가 생겼다.

이정과 일현덕분에 가식적인 상류사회의 파티장의 생리를 일찍 파악한 가을은 잔디에게 여러 가지로 많은 도움을 주었고, 준표와도 어느 정도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가을은 잔디와 준표 커플과 가끔 밥을 먹거나 차를 마시곤 했다.

 

잔디:(흥분) 그럼 드디어 그 유명한 피렌체의 두오모로 가는구나.

가을: 응~ 꼭 그 두오모의 쿠폴라로 올라갈거야.

잔디: 그럼 냉정과 열정 사이처럼 준세이같은 운명의 남자를 만나게 되는 거 아냐?

가을: 준세이처럼 멋진 남자 만나면 바랄게 없지. 큭큭

 

끝없이 이어지는 여자들의 수다에 준표가 슬슬 짜증을 내려던 찰나, 지후가 불쑥 말을 내뱉었다.

 

지후: 떠나간 사람과 버스는 기다리는게 아니다.

준표:(의아) 넌 갑자기 또 뭔 헛소리야?

 

잔디와 가을도 호기심어린 얼굴로 지후를 바라봤다.

 

지후: 갑자기 영화 봄날은 간다가 생각나서.

잔디:(고개 갸웃) 내 기억에 그 대사는 원래 '떠나간 여자와 버스는 기다리는 게 아니란다' 같은데?

준표: 그게 그거지. 잔디밭 넌 뭘 또 따지고 드냐?

잔디: 구준표, 아 다르고 어 다른 법이야. 

 

준표와 잔디 사이에 싸움의 조짐이 보이자 지후는 느긋하게 말을 덧붙였다.

 

지후: 냉정과 열정 사이 얘기를 하니까 갑자기 봄날은 간다가 생각나더라고.

잔디: 하나는 헤어진 연인이 결국 재회하고 하나는 끝내 이별하고.. 완전 반대네?

가을: 둘 다 참 감동적인 영화였어요.

지후:(가을보며) 그래? 난 봄날은 간다 보면서 가슴이 아렸는데.

       헤어진 연인들은 냉정과 열정사이 처럼 기적적으로 다시 만나기 보다는 두 번 다시 돌이키지 못하는

       경우가 많잖아. 그래서 참 현실적이다 싶었어.

준표: 정말 사랑하면 헤어지지 말아야지. 헤어졌다는 건 결국 사랑이 끝났다는 소리야.

가을:(준표보며) 그렇게 생각해요?

준표: 당연하지.

잔디: 난 그래도 두 사람이 인연이라면 다시 만날 거라고 생각해.

 

대화는 어느 새 인연이라는 게 존재할까 하는 약간은 철학적인 주제로 넘어갔다.

이야기를 나누는 가을의 얼굴에는 조금 전의 들뜬 기색은 사라지고 없었다.

 

 

 

-이정의 집-

 

모처럼 두 가족이 함께 근사한 저녁을 먹은 후, 가을은 제 방으로 올라가 오디오룸에서 볼 DVD를 고르기 시작했다.

맨 처음에는 여행을 위해 냉정과 열정 사이를 집었지만 저도 모르게 눈길이 봄날은 간다 DVD에 멈췄다.

한참 DVD를 바라보던 가을의 머리속에서 낮에 있었던 일현과의 대화가 떠올랐다.

 

일현:(환하게 웃으며) 밀라노와 피렌체에 간다고? 잘됐네.

가을: 응. 드디어 냉정과 열정사이의 무대로 가는 거야.

일현: 아주 신났네, 우리 가을이. 

가을: 당연하지. 오빠가 예전에 피렌체에서 엽서 보내줬을때부터 얼마나 가고 싶어했는데.

일현:(가을 머리 쓰다듬으며) 그래, 그럼 오빠가 좋은 곳 다 알려줄게.

가을:(눈 반짝이며) 정말? 그럼 나 매일 메신저 접속할게. 꼭 알려줘야 해.

일현: 알았다, 염려 마.

 

처음 엄마가 밀라노로 학회 참석차 간다고 말을 했을 때부터 가을은 일현을 떠올렸다.

냉정과 열정 사이의 무대인 밀라노와 피렌체는 가을에게 있어서 헤어진 연인이 다시 만나 시작하는 장소를 의미했다.

가을 자신도 피렌체의 두오모 쿠폴라로 올라가면 아오이가 준세이를 다시 만난 것처럼 일현과 다시 만나지 않을까 하는 그런 희망이 저도 모르게 들었다.

그래서 서울에 올라오자마자 제일 먼저 일현이 일하는 카페로 달려갔었다.

항상 변함없이 저를 따스하고 친밀하게 대하는 일현을 보고 있자니 어쩌면 이제는 일현도 자신을 여자로 봐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들었다.

어릴 때부터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일현은 가을이 뭘 원하는 지 곧잘 알아차리곤 했었다.

그런 일현이라면 피렌체의 두오모 쿠폴라에 오르겠다는 제 말이 뭘 의미하는지 알아차렸을 것 같았다.

 

그런데, 지후는 의도적인지 알 수는 없지만 이별을 이야기했다.

떠나간 사랑은 기다리는게 아니다... 설마 그 말이 일현을 기다리지 말라는 뜻이었을까...

항상 지후는 귀신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읽어내곤 했었다.

그런 지후라면 오래전부터 자신과 일현 사이를 잘 아는 만큼, 피렌체의 두오모에서 일현과 다시 시작하고 싶어하는 제 속마음을 알아차렸을지도 몰랐다.

 

'피렌체의 두오모에서 내가 맞이하게 될 건 뭘까...'

 

 

가을은 생각에 빠져있느라 이정이 제 방에 들어온 줄도 몰랐다.

생각에 잠긴 가을의 모습을 보고 이정은 발소리가 나지 않게 조용히 가을의 곁에 다가갔다.

 

이정: 지금 뭐하는 거야?

가을:(화들짝) 꺄악!  

 

가을은 놀란 나머지 비명을 지르며 들고 있던 DVD를 떨어뜨렸다.

이정은 키득거리면서 가을의 어깨를 잡았다.

 

이정: 무슨 생각에 잠겨있느라 사람 들어온 줄도 몰랐어?

 

가을은 정신을 수습하고는 DVD를 주우며 빙글빙글 웃는 이정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가을: 넌 인기척 좀 내! 

이정: 몇 번이나 불러도 대답안한 사람이 누군데?

가을: 부르긴 뭘 불러. 나 놀래킬려고 조용히 들어왔겠지, 안봐도 훤하다.

이정: 그건 그렇고 DVD 볼 거야?

가을: 응. 같이 볼래?

 

이정은 DVD 제목을 확인하고는 가을의 마음을 알 것 같아 순간 얼굴이 굳었지만 금방 다시 웃었다.

가을은 이정의 표정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정:(장난스럽게) 그래, 모처럼 오붓하게 둘만 있어보자고.

가을: 피식, 하여튼 말은 잘해.

 

이정은 자연스럽게 가을의 손을 잡고 가볍게 끌었다.

가을도 웃으면서 이정의 손을 맞잡고 1층 오디오룸으로 내려갔다.

거실에서 이정과 가을이 다정하게 손을 잡고 계단을 내려오는 모습을 보는 현애와 나현의 얼굴에도 미소가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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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글을 올리네요.

머리속으로는 오래 전에 다 정리했는데 막상 손으로 쓸 시간이 없었어요.

장거리 출퇴근을 하게 되니 넷북을 사야하나 심각하게 고려중이랍니다 ㅎㅎ

제가 냉정과 열정 사이 소설을 워낙 사랑했기 때문에 그 배경을 살짝 빌릴 예정이랍니다.

어색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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