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약속

약속, 영원으로 만들다. 06

지혜의 여신 2010. 1. 3. 01:28

 

 

 

 

작업실에는 물레가 돌아가는 소리만 나왔다.

이정은 얼마 남지 않은 전시회 준비를 위해 도예 작업에 여념이 없었다.

어릴 때나 지금이나 흙덩어리가 자신의 손길에 따라 아름다운 모습으로 탈바꿈하는 걸 보는게 좋았던 이정이었다.

흙을 만지고 있을 땐 모든 것을 다 잊고 작업에만 몰두해 시간 가는 걸 늘 잊어버렸다.

 

조금은 휴식을 취해야겠다 싶어 물레앞 의자에서 일어나 시간을 확인한 이정은 벌써 점심시간이 다가왔음을 알고 오전 내내 작업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러고보니 배도 고픈 거 같고...”

 

이정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부엌으로 가서 차를 끓였다.

출입문에 달아놓은 풍경이 울리자 이정은 가을이 왔을까 싶어 기대에 찬 표정으로 문을 바라봤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작업실로 들어오는 사람은 다름 아닌 은재였다.

 

 

은재 역시 우빈과 함께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같은 학교를 다녔지만 이정은 은재에게 별다른 감정이 없었다. 하지만 은재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건 알았다.

은재는 어릴 때부터 그 마음을 숨기지도 않고 해바라기처럼 이정만 바라봤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도 다 알았다.

우빈도 자신이 가을 때문에 마음 앓이를 할 때 가끔 차라리 은재에게 마음을 돌리는 게 어떻겠냐고 얘기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정으로서는 짝사랑의 아픔을 너무 잘 앓았기 때문에 은재에게 헛된 기대를 품게 만들고 싶지 않아 항상 친구 이상으로는 대하지 않았다.

 

사실 이정은 사람들이 자신을 카사노바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억울해했다.

자신은 가을 하나뿐인데, 단지 어머니와 가을이 여자들에게 무조건 친절하게 대해줘야 한다고 해서 그 말을 따를 뿐이었다.

그렇지만 여자들은 자신의 예의와 친절을 곡해해서 항상 달라붙었다.

 

물론 대학에 들어간 뒤로 한동안은 연상의 여자들에게 필요 이상으로 다정하게 대해주긴 했다.

하지만 그건 모두 가을에게 써먹기 위한 연습일 뿐이었다.

그리고 아쉽게도 가을의 반응은 항상 다른 여자들과 너무 틀려서 우빈에게 하소연했다가 당장 중단하라는 말만 들었다.

설상가상으로 가을은 이정을 철없는 바람둥이 동생으로 보기 시작했다.

이제는 자신에게 몰려드는 여자들을 세련되게 떼어내는 법을 익혔지만 가을의 고정관념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은재는 항상 친구로서 예의를 항상 잃지 않았기 때문에 이정으로서는 떼어낼 방법도 찾을 수 없었다.

 

 

“여전히 작업하느라고 바쁘네.”

 

은재는 수줍게 웃으면서 들어왔다.

 

“이제 곧 전시회가 있어.”

 

이정도 미소를 지으면서 은재에게 자리를 권하고는 차를 대접했다.

은재는 행복하다는 듯 미소지으며 차를 음미했다.

 

“어디 여행 갔다고 들은 거 같은데.”

“응, 사촌 언니가 뉴욕에서 결혼식을 올렸거든.”

“그랬구나. 학기 중만 아니면 좀 더 느긋하게 머물다 왔을텐데 아쉬웠겠네.”

“그래도 쇼핑할 시간은 있었어. 덕분에 소호 안티크숍에서 아주 멋진 물건도 발견했고.”

 

은재는 약간 볼이 상기되어 탁자위에 작은 상자를 올려놓았다.

이정이 ‘내 선물이야?’ 하는 표정으로 은재를 보자 고개를 끄덕였다.

포장을 풀자 아주 아름답게 세공한 오팔 커프스 단추가 나왔다.

뭔가 아련한 사연을 담은 듯한 커프스 단추를 보며 이정은 은재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맘에 들었음 좋겠어. 오팔은 자신이 사는 거보다 선물로 받는 게 더 좋대.”

 

은재의 사려깊은 말에 이정은 고마움과 함께 부담을 느꼈다.

짧게 한숨을 내쉬며 이정은 커프스 단추 상자를 다시 은재에게 밀었다.

 

“정말 고마워. 하지만 내가 받기엔 너무 과분한 선물인 거 같아.”

 

은재의 얼굴이 금방 굳어버렸다.

 

“과분...하다니? 이거... ”

“여기에 담긴 네 마음을 아니까. 단순히 친구끼리 주고받는 선물의 수준을 넘었어.”

“이정아...”

 

이정이 재빨리 선수를 치자 은재는 난감해졌다.

처음 소호에서 이 커프스 단추를 보자마자 이정이 생각나서 샀는데 기쁘게 받지 않고 부담스럽다고 말하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차은재... 네 마음 잘 알아... 하지만 난 널 같은 학교 친구 이상으로 볼 수 없어.”

 

이정은 이 기회에 못을 박아버려야겠다고 다짐했다.

지금 이 순간 은재에게 바라는 건 오직 눈물만 흘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뿐이었다.

은재의 얼굴은 실망과 슬픔으로 가득했다.

 

“난 그냥... 친구로서...”

“난 남녀간에 우정이 생길 수 없다고 생각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넌 날 친구로 보는 게 아니라는 거 알아.

그러니까 이제 그만해. 우린 연인도, 친구도 될 수 없어.“

“추가을, 그 사람 때문인 거니?”

 

예상치 못한 말에 이정은 주춤했다.

그런 이정을 보면서 은재는 정답을 알아차리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왜 하필 그 사람이야? 나도 알아. 그 사람 오랫동안 네 형 좋아했잖아.

그리고 얼마 전까지는 다른 사람이랑 사겼고.

그 사람은 널 동생으로만 보는데... 난 어릴 때부터 너만 쭉 바라봤는데 왜 나는 안된다는 거니?“

 

은재는 결국 참고 참았던 질문을 하고야 말았다.

언제나 이정의 대답이 두려워서, 그냥 곁에 있으면 언젠가는 제 마음을 받아줄 거라고 믿고 싶어서 차마 할 수 없었던 질문이었다.

잔뜩 긴장한 은재의 얼굴을 보면서 이정은 최대한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말을 고르면서 대답했다.

 

“내 가슴이 추가을 밖에 없다고 말하니까. 추가을이 내 일기일회라고 내 심장이 말하니까.”

“네가 얼마나 고독하게 자랐는지 알아. 넌 사랑과 동경을 혼동하는 거야.”

 

은재는 필사적으로 이정의 대답에 반박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이정의 말에 결국 더는 반박하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래, 어렸을 땐 그냥 함께 놀아주니까 좋았어.

내가 갈구했던 다정함과 따스함과 사랑을 아낌없이 줘서 좋았어.

그게 전부였어. 그 때는 추가을 때문에 슬픔도, 아픔도, 고통도 느끼지 않았어.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내 마음은 추가을에 대한 감정으로 넘쳐났어.

이젠... 날 보고 웃어주면 기쁘고, 내게 손을 내밀어주면 가슴 벅차게 행복해.

한집에 살고 있어도 잠시라도 내 눈에 보이지 않으면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 생각뿐이야.

그리고 내가 아닌 다른 남자에게 웃어줄 때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아.

내게서 눈길을 돌릴 때마다, 내 손을 놓아줄 때마다 가슴이 무너져내려.

잠깐 떨어져있어도 미칠 듯이 보고싶고 달려가고 싶은 충동에 시달려.

추가을의 모든 것이 다 내게 의미가 되고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돼.

내게 있어 천국이란 추가을의 웃는 얼굴이 있는 곳이야.

그녀가 없는 세상이란 내겐 지옥의 다른 이름일 뿐이야.

이런 마음이 사랑이 아니라면 과연 어떤 게 사랑이란 거지?“

 

마치 가을이 눈앞에서 제게 미소를 짓는 것처럼 행복한 미소를 짓는 이정을 보며 은재는 절망했다.

이정의 말은 바로 자신의 마음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었기에 은재는 부정할 수도 없었다.

 

기어이 은재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두 방울 흐르기 시작했다.

소리 없이 우는 은재를 보면서 이정은 마음이 착잡해졌지만 그냥 바라만 봤다.

미안한 마음에 눈물을 닦아주고 싶었지만 그 행동은 은재에게 희망고문일 뿐이었다.

끝까지 제게 곁을 내주지 않는 이정을 보면서 은재는 정말로 자신의 짝사랑이 영원히 이루어지지 않겠다는 걸 절감했다.

 

 

 

은재가 얼마나 울었는지 미처 헤아리기도 전에 다시 현관문의 풍경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정아, 배고프지? 누나가 지금... !!”

 

가을은 소리죽여 울고 있는 은재와 미묘한 표정으로 은재를 바라보고만 있는 이정을 보고 하던 말을 멈췄다.

어젯밤에도 이정이 집에 안들어와서 또 작업하느라 잠도 제대로 안자고 밥도 대충 먹겠다 싶어 나현의 집 가정부에게 부탁한 도시락을 가져온 참이었다.

도예에 열중하는 이정을 깜짝 놀라게 해주려고 했는데 예상과 달리 은재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가을은 난감해졌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은재가 이정에게 고백했다 거절당한 것 같았다.

내심 은재가 이정에게 좋은 연인이 될 거라 생각했던 가을로서는 울고 있는 은재의 모습이 안타까웠고, 달랠 생각도 없어보이는 이정이 조금 괘씸해보였다.

하지만 제3자인 자신이 지금 뭘 할 수도 없는 상황이라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은재는 놀람과 당혹감이 섞인 가을의 얼굴과 어느새 눈빛이 달라진 이정을 번갈아봤다.

가을을 보며 천천히 환해지는 이정의 얼굴을 보면서 은재는 더 이상 이정에게 다가갈 수 없음을 절감했다.

더 이상은 비참해지고 싶지 않아서 은재는 천천히 몸을 움직여 가방과 외투를 집어들고는 인사도 없이 가을을 지나쳐 작업실 밖으로 나갔다.

이정은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서서히 가을에게 다가갔다.

 

“나 점심 주려고 온 거야? 나 지금 배고픈 거 어떻게 알았어?”

 

어느새 웃음띈 얼굴로 아직 멍하니 서있는 가을에게서 도시락통을 집어든 이정이었다.

 

“뭐 가져왔어? 물론 추가을표 도시락이 아니란 건 알지만 말야.”

 

마치 은재가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가볍게 말하며 도시락을 꺼내는 이정을 보고 마침내 가을은 정신을 수습해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은재가 왜 울었어? 네가 울린 거지?”

“와~ 초밥이네. 마침 나 초밥 생각이 났는데 어떻게 내 맘 알았어?”

 

자신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는 이정에게 슬슬 열이 받기 시작하는 가을이었다.

하지만 하룻밤새 까칠해진 이정의 얼굴을 보자니 제대로 밥부터 먹이는게 순서겠다 싶어 일단은 넘어가기로 했다.

 

“그래. 일단은 먹고 보자.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고운 법이니깐.”

“조금만 늦게 도착했음 나 배고파 쓰러졌을 거야. 고마워.”

 

퉁명스럽게 말은 했지만 가을이 점심상을 차려주는 모습을 보면서 이정은 어쩔 수 없이 행복을 느꼈다.

점심을 다 먹으면 자신을 마구 다그치겠지만 일단 제 몸상태를 먼저 신경써주는 가을이 고맙기만 했다.

자리에 앉으면서 가을이 보지 못하도록 커프스 단추가 든 상자를 슬쩍 치우는 이정이었다.

 

점심을 다 먹고 이정이 우려낸 녹차까지 다 마시자 가을은 본격적으로 이정을 추궁하기 시작했다.

 

“소이정, 너 어쩌다가 차은재 울린 거야? 걘 너 진심으로 좋아하는 착한 애잖아.”

“나도 울리고 싶진 않았어. 하지만 이 세상엔 어쩔 수 없는 일이란 게 존재하잖아.”

“너 설마 그 애 고백 거절한 거니? 그래서 은재가 울면서 나간 거야?”

“결과만 말하자면 그래.”

 

은재에게 전혀 미안해하지 않는 이정을 보고 있자니 가을은 화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정아, 너 언제까지 의미없는 만남만 계속 할 거니?

은재같이 그냥 너 자체만 좋아하는 애 만나기 얼마나 힘든 줄 알면서.“

“내가 좋아하지 않아. 상대가 진심이라고 내가 꼭 받아줘야 하는 건 아니잖아.

울리고 싶지 않다고 무한정 다가오는 거 봐줄 수 없어.

전혀 맘이 없는데 상대에게 헛된 희망을 안겨주는 게 더 잔인한 거잖아.”

“그건 그렇지만... 꼭 울려야 했니? 상대의 맘을 소중히 여겨주지 않으면 나중에 너 천벌 받는다.”

 

냉랭하게 대꾸하는 이정의 말에 가을은 기가 막힐 뿐이었다.

우빈과 더불어 신화대 최고의 카사노바로 악명을 떨치는 이정에게 늘 충고를 해주고 싶었지만 지나친 참견이라고 할까 늘 참던 가을이었다.

애정결핍이 이정의 여성편력의 주원인이라고 굳게 믿는 가을이었기에 이 기회에 한소리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정아, 너 이렇게 여자들이랑 가벼운 만남만 전전하면 나중에 네 인연을 만날 때 미안해지지 않겠니?”

“우선 확실히 말해두겠는데, 난 지금까지 모든 여자들에게 예의바르게 대한 죄밖에 없어.

그 누구도 내가 먼저 유혹한 적도 없고, 조금이라도 내가 자기 좋아한다고 착각할 만한 말도, 행동도 안했어.“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니?”

“사실이 그런걸.”

 

당당한 이정의 태도에 가을은 그저 황당할 뿐이었다.

 

“설령 그게 사실이라 해도 기분 나쁠걸. 네 과거 행각을 알게 되면 널 믿지 않게 될 거야.”

“누나도... 그래?”

“당연하지. 네 상처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나지만 그래도 기분 나빠.

여자는 말야 해바라기같이 나만 바라봐주는 남자를 좋아하는 법이야.

오직 내 여자에게만 친절하고 다른 여자들을 돌처럼 보는 남자가 이상형이라구.“

“그 마음을 표현을 못한 거 뿐이라면? 단지 그 사람이 둔해서 내 마음을 몰라주고 오해한 거라면?”

“그럼 그 무수한 여자들이 다 질투를 불러일으키기 위한 수단이였단 말야? 그건 더 나빠!”

 

가을이 자신을 구제불능 바람둥이로 본다는 걸 알았지만 이렇게나 오해가 심했나 싶어 사뭇 당황한 이정이었다.

이정의 안색이 달라진 것을 보고 가을은 자신의 충고가 먹히고 있다고 착각했다.

 

“아직 안늦었어. 정아, 제발 아무 여자하고 순간적인 유희만 즐기지 말고 좀 진지해져 봐. 준표 오빠나 지후 오빠처럼 네가 아니면 안되는 사람을 찾아보라고.”

 

준표와 지후의 연애담은 신화대의 전설이었다.

신화 그룹의 후계자 준표는 안하무인으로 악명이 높았지만 대학 새내기 시절, 정의감 높은 서민 장학생 금잔디를 만나 환골탈태했다.

지후 역시 어린 날부터 서현만을 바라봤던 그 순애보 때문에 많은 여학생들이 지후와 서현을 흠모의 눈길로 바라봤을 뿐, 감히 접근할 생각도 못했었다.

 

“준표형이나 지후형에게 다른 여자들이 들러붙지 않은 건 두 사람이 워낙 유별났기 때문이야.

천상천하유아독존 구준표와 4차원 윤지후였기에 그런 거였다고.

나도 그런 성격이었다면 아무도 내게 접근하지 않았을 거야.“

 

엉뚱한 비교에 기가 막힌 이정의 말투가 불퉁해졌다.

가을은 가을대로 이정이 말도 안되는 변명만 늘어놓는다고 생각했다.

 

“단지 예의바르게 대한 거뿐이라고? 내가 보기엔 여자를 대하는 네 태도는 타고난 거 같은데. 부... 흡!”

 

가을은 하마터면 부전자전이라고 말할 뻔해서 재빨리 두 손으로 자신의 입을 막았다.

평생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던 현섭으로 인해 이정이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가을로서는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는 말이 이정에게 비수일 뿐이라는 것도 잘 알았다.

하지만 눈치 빠른 이정은 가을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다 알아차렸다.

 

“누나도 내가 아버지를 닮아서 여자들을 좋아한다고 생각해?”

“아냐! 내가 하려던 말은 그게 아니었어.”

 

필사적으로 부인하는 가을의 얼굴을 보면서 이정은 마음이 착잡해졌다.

동생으로만 보는 것도 부족해서 아버지를 닮은 바람둥이라고만 보고 있다니 최악이었다.

저도 모르게 이정은 가을에게 다가가 양손으로 가을의 어깨를 잡았다.

가을은 놀란 얼굴로 이정의 굳은 얼굴을 바라봤다.

 

“잘 들어 추가을. 내 맘속엔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사람으로 가득해서 다른 사람이 끼어들 틈이라곤 전혀 없어. 없다구!”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에 가을은 제 이름을 불렀다고 화를 내는 것도 잊고 멍하니 이정을 바라봤다.

꼬맹이 때 빨리 일현과 자신이 결혼해서 매일 같이 놀면 좋겠다고 말했던 이정이 지금 자신을 여자로 보고 있다고 말하다니!

 

“정아, 너 지금... 내가... 좋다고 말하는 거니? 여자로서?”

“그냥 좋아하는 게 아냐. 사랑해.”

 

지금 자신을 절박하게 바라보는 이정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가을의 머리속에서 일현이 떠나간 날이 떠올랐다.

이제야 일현이 왜 자신을 떠났는지 그 맘을 알 수 있었다.

가을은 조용히 팔을 들어 제 어깨를 꽉 잡고 있는 이정의 손을 떼어냈다.

처음 놀라서 마구 뛰었던 심장도 평소 속도로 되돌아갔다.

 

“정아... 네가 왜 그렇게 말하는지 잘 알아.”

 

차분한 가을의 말이 불길하게 들리는 이정이었다.

은재와 같은 말을 하려는 게 아닐까 싶어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뭘 안다는 거야? 내가 동경과 사랑을 혼동하는 거라고 말하려면 관둬!”

 

가을은 미소를 지으며 한 손으로 이정의 얼굴을 쓸어주었다.

이정의 손이 자동적으로 가을의 손을 잡았지만 가을은 가볍게 제 손을 빼냈다.

 

“알아, 나도 그랬으니까.”

“뭐가? 그냥 안다고만 말하면 내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건데?”

 

가을은 그저 말없이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그 미소를 보자니 가슴이 답답해지는 이정이었다.

결국 가을도 은재와 똑같은 생각을 하는게 분명했다.

 

“정아... 내게 넌 처음부터 동생일 뿐이었어. 그리고 지금도 그래...”

“난 아냐, 나한텐 추가을은 누나도, 미래의 형수도 아냐. 그냥 한 여자일 뿐이야.”

“하지만 내게 있어 소이정이란 사람은... 정말 소중한 동생이야.

누구보다도 사랑받아야 할 부모에게 없는 자식 취급받고, 부모 대신 사랑해준 형까지 잃어버린 상처가 미처 아물지 않은... 약하디 약한 남자아이.

사랑을 갈구하지만 섣불리 마음도 열지 못하는 불안정한 아이. 그게 내가 보는 너야.“

 

얼마 전 파티 때 우빈이 해줬던 말이 생각나 이정의 몸이 뻣뻣해졌다.

가을은 다정하게 양손으로 이정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을 이었다.

 

“내겐 네가 너무나도 소중한 동생이기 때문에, 현이 오빠에 이어 나마저 떠나가 버릴까 겁에 질린 너를 그냥 지켜 보기만할 수는 없었어.

나란 존재는 네게 남은 마지막 희망이라는 걸 알았으니까.

그래서 최대한 오빠의 빈자리를 메워주겠다고 결심했어.

하지만... 난 영원히 네 곁에 있어줄 수는 없어. 우린 더 이상은 아이가 아니니까.

어른이 되어 각자의 삶을 살아야만 하니까... 이제는 홀로서기를 해야만 해. 너도, 나도 모두.“

 

가을의 말이 이정의 귀에는 사형선고처럼 들렸다.

조금 전 은재의 마음이 바로 지금 자신의 마음과 같았구나 싶어 가슴이 먹먹해졌다.

 

“날 남자로 봐주면 안 돼?”

 

부질없는 질문이라는 걸 알면서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너무나 간절한 목소리였지만 가을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내가 졸업하고 유학을 떠나면... 그래, 그 땐 네 마음을 정확하게 알게 될 거야...

난 지금 네 마음을 믿을 수 없어. 우린 너무 오랫동안 함께 있었으니까.”

 

항상 졸업을 하면 유학을 가겠다고 노래를 부르는 가을이었다.

나현과 자신도 항상 가지 말라고 완곡하게 말렸지만 현애가 찬성을 했기 때문에 가을은 벌써부터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결국 가을에게 제 진심을 알려주기 위해 우빈의 말대로 잠시나마 이별을 해야하나 싶었다.

 

지금 저를 바라보는 가을의 눈에 담긴 감정은 연민뿐이었다.

그런 가을에게 아무리 사랑한다 말해도 들어주지 않으리라는 걸 이정은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난 진심이야. 내 맘이 변할 일은... 없을 거야...

아무리 멀리 떨어져있어도, 아무리 오랫동안 못본다 해도...“

 

혼잣말에 가까운 중얼거림이었다.

가을은 다시 이정의 얼굴을 다정하게 쓸어주고는 빈 도시락 통을 가방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작업실을 나가기 전 몸을 돌려 아무런 말도 못들은 것처럼 쾌활하게 평소 말투로 잔소리를 했다.

 

“정아, 그럼 나 들어간다. 열심히 작품 만드는 건 좋지만 저녁은 거르지 마.”

“......”

“저녁 꼭 먹어야 해. 안그럼 혼날줄 알아.”

 

가을은 이정이 대답하거나 말거나 웃으며 으름장을 놓고는 작업실을 나갔다.

하지만 몸을 돌리는 순간, 가을의 표정은 다시 연민과 슬픔이 가득했다.

 

‘오빠... 그래서 그 때 날 떠났던 거구나...'

 

떠나던 날 일현이 왜 그토록 복잡미묘한 얼굴로 저를 봤는지 이제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어서, 지금 이정의 슬픈 마음도 너무나 잘 알아서 가을도 마음이 아팠다.

 

“미안해 정아... 하지만 나중엔 알게 될 거야... 지금 네 마음이 그 때 내 마음과 같았다는 걸...“

 

가을은 작업실 밖에서 흘깃 작업실을 보고는 혼잣말을 했다.

안에 있는 이정에게 들리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아까 할 수 없었던 말을 이렇게라도 하니 조금은 맘속의 답답함이 풀리는 것 같았다.

 

 

 

이정은 밖에 있는 가을의 혼잣말을 듣지 못한 채 멍하니 초벌구이가 끝난 작품만 바라봤다.

파티에서 돌아온 후 가을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담아 만든 아름다운 곡선의 화병이었다.

이 화병이 완성되면 가을에게 선물하면서 고백을 하려고 했었다.

그렇게 굳게 다짐하고 또 다짐하면서 삼일 밤낮을 꼬박 빚었는데 어쩌자고 이렇게 준비없이 불쑥 제 맘을 뱉어버렸을까 하는 자괴감이 절로 들었다.

 

“이왕 엎질러진 물이야... 난 절대로 포기 안해... 절대로.”

 

어느새 텅 빈 이정의 눈에 비장함이 깃들었다.

 

 

=========================================================================================

 

2010년 첫 글을 올리네요.

다시 한 번 모두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소설 > 약속'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약속, 영원으로 만들다 08  (0) 2010.03.07
약속, 영원으로 만들다 07  (0) 2010.02.20
약속, 영원으로 만들다. 05  (0) 2009.12.15
약속, 영원으로 만들다. 04  (0) 2009.12.05
약속, 영원으로 만들다. 03  (0) 2009.1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