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약속

약속, 영원으로 만들다. 05

지혜의 여신 2009. 12. 15. 13:33

 

 

 

 

파티장은 평소처럼 지루했다.

그나마 우빈이 없다면 금방 빠져나갔을 거라고 생각하는 이정이었다.

 

유치원부터 같이 다닌 우빈은 이정의 소중한 친구였다.

어릴 땐 형, 가을과 함께 노느라 친구네 집에 놀러간 적도, 친구를 집으로 초대한 적도 거의 없었지만 학교에서 우빈은 항상 이정에게 살갑게 대했다.

가을이 신화중이 아닌 일반 공립 중학교로 진학해 집에 놀러오는 일이 부쩍 줄어들면서, 이정은 우빈과 어울리는 시간이 크게 늘어났고 둘 사이의 우정도 차곡차곡 쌓여갔다.

 

자신과 정반대로 활발하고 자신감 넘치고 붙임성 많은 우빈을 이정은 진심으로 좋아했다.

언젠가 우빈에게 왜 어릴때부터 자신에게 친밀하게 대했냐고 물었을 때, 우빈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맘에 들었으니까"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을 했었다.

 

"누나는?"

 

우빈이 샴페인잔을 건네주며 물었지만 그렇게 궁금해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이모 보고싶다고 내려갔어."

 

이정도 아무렇지 않다는 표정으로 잔을 받으며 대답했다.

 

"약혼 타령으로 네 어머니에게 시달리기 싫어서 내려간 거 아냐?"

"유감스럽게도 더 이상 약혼 이야기는 안나오고 있어."

"누나 태도는 어때? 평소와 똑같아?"

"응."

"고생이 많다, 친구."

 

우빈은 이정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말없는 우빈의 위로에 이정도 고개를 끄덕였다.

 

 

"소이정 넌 뭐가 고생이 많다는 거야?"

"또 전시회 일정 잡힌 거야?"

 

어느 새 준표와 지후가 이정과 우빈의 곁으로 다가와서 말을 건넸다.

약간은 나이차이가 났지만 두 사람은 일현의 친구였기 때문에 이정에게도 자연스럽게 동생처럼 대해주었다.

하지만 이정은 일현이 집을 나간 뒤로 두 사람을 보면 약간은 거북한 마음이 들었다.

 

"이정아, 가을인 오늘 같이 안왔어?"

"우리 누난 왜 찾아?"

 

지후가 가을을 찾자 이정은 저도 모르게 약간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준표와 우빈은 하루이틀이 아니라는 듯 그냥 바라봤다.

지후 역시 표정변화없이 웃는 얼굴이었다.

 

"이번달 병원 공연 때문에 좀 상의를 할게 있거든. 오늘 여기서 보면 얘기하려고 했는데."

"우리 누나는 집으로 내려갔어. 중간고사 끝나자마자 바로."

"그랬군. 알았어. 전화로 상의해야겠네."

 

지후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 묘한 웃음을 지으며 이정의 어깨를 툭 쳤다.

그 웃음의 의미가 과연 무엇인가 싶어 신경이 쓰이는 이정이었다.

 

 

지후가 준표와 함께 다른 곳으로 가자 이정은 양미간을 찌뿌렸다.

그런 이정을 보고 우빈은 우습지도 않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경계할 거 없어, 이정. 지후형에겐 민서현이 있잖아."

"그건 아는데... 그냥 기분이 좀 나빠."

 

 

지후와 가을은 일현을 통해 오래전부터 알고 지냈다.

수년 전, 병원에서 자원봉사를 하다 만난 후로는 의기투합해서 한달에 한번씩 환자들을 위해 자선공연을 하는 두 사람이었다.

이정도 가을의 주선으로 가끔 병원에서 도예 치료 봉사를 하긴 했지만 자신의 일정이 바쁜 탓에 그 회수가 압도적으로 적었다.

그래서인지 은근히 지후가 맘에 안들었다.

톱모델이자 국내 최대 로펌의 상속녀 민서현과 공개적으로 교제하면서 왜 가을과 가깝게 지내나 싶어서 만나면 저도 모르게 불퉁하게 대했다.

물론 가을은 그런 이정의 모습을 볼 때마다 혼을 내줬지만 고쳐지지 않았다.

 

 

"하여튼 네 놈 질투는 하늘을 찌르는구나. 누나가 이 사실을 알면..."

 

우빈은 못말린다는 듯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송우빈, 넌 어떻게 연상녀들을 다 사로잡은 거야?"

"또 시작이네. 몇 번이나 반복하는 말이지만 그 사람들은 지금의 내 모습만 보는 것뿐이야.

그 여자들이 보는 나는 돈많고 잘생기고 매너 최고인 일심의 송우빈이라구.

하지만 가을 누나 앞에선 난 그냥 동생 친구일 뿐이라 누나는 절대 내게 반하지 않는 거라니깐."

 

늘 반복되는 이야기였다.

이정은 우빈의 여러가지 부분을 부러워했지만 역시 가장 탐내는 건 연상 여인을 능숙하게 다루는 태도였다.

우빈은 이정을 동생으로만 보는 가을의 마음도 알기 때문에 부러워할 거 없다고 달래줄 뿐이었다.

 

"두 사람은 너무 가깝게 있어서 문제인 거야.

차라리 좀 떨어져있다 보면 누나도 너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을걸."

"하지만 난 추가을 없인 한 순간도 못견뎌."

"임마, 넌 그래서 안되는 거야. 엄마 얼굴 잠시라도 못보면 불안해하는 어린애같이 구니깐 누나도 널 그냥 어리광쟁이 동생으로만 보는 거야.

솔직히 너 누나한테 하는 거 보면 우리집 쌍동이 여동생같다니깐."

"그럼 나보고 어쩌라고."

"넌 먼저 어른이 되어야 해. 추가을의 보호 없이는 살 수 없는 아이같은 모습을 버려야 한다구.

누나가 힘들 때 의지하고 기댈 수 있는 어른이 되지 않으면 절대로 널 남자로 보지 않는다는 거 알잖아."

 

정답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다시 한번 우빈으로부터 그 정답을 확인받자니 참담한 기분이 들었다.

가을은 언제나 누군가에게 힘이 되어주고 상처를 보듬어주는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정작 가을 본인에게는 지치고 힘들 때 의지할 사람이 없었다.

듬직한 아버지도 어린 날 돌아가셨고, 거의 평생을 좋아했던 형도, 새로 생긴 남자친구도 모두 제 갈길을 찾아 떠나가버렸다.

가을 곁에 있어주는 사람은 이정이었지만 항상 의지하고 위로받는 사람은 가을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었다.  

 

"꼭 떨어져 있어야만 어른이 되는 건 아니잖아."

"하지만 넌 지나치게 누나와 가까워서 네 자신도 모르게 힘들면 누나한테 의지하잖아.

그러니깐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거야."

 

이정의 투정에 바로 정곡을 찌르는 우빈이었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아예 확실히 못을 박아야겠다 싶어 우빈은 모질게 덧붙였다.

 

"현실을 말해줄까? 누나는 아직 네안에 남아있는 상처받은 아이의 모습을 보고 있기 때문에 널 남자로 보지 않는 거야.

누나에게 있어서 진정한 남자란 아버지처럼 자신이 힘들 때 의지할 수 있고 기대어 쉴 수 있게 해주는 사람이고.

그러니 늘 자신의 곁을 떠나지 말아달라고 투정부리는 동생이 남자로 보이겠냐고.    

가족에게 받은 상처를 니가 스스로 극복하고 어른이 되지 않는 한, 누나의 이상형이 나타나면 게임은 끝나." 

 

지독한 아이러니였다.

가을이 원하는 남자가 되기 위해서는 잠시나마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우빈의 말에 반박할 수 없는 이정이었다.

 

"나란 놈은 왜 이렇게 약한 걸까? 난 왜 형처럼 강하지 못한 거지?"

 

잠시동안의 침묵 후 이정의 입에서는 자조적인 한탄이 흘러나왔다.

우빈은 이정의 어깨를 꼭 잡아주었다.

 

"약한 빗방울도 오랜 시간을 들이면 강한 바위를 뚫을 수 있어. 

중요한 건 약하고 강하고가 아니라 포기하지 않는 마음인 거야."

"포기하지 않는 마음..."

"일현형에겐 분명 제 것이 아닌 것을 과감하게 포기하는 용기가 있어. 그건 정말 존경스러운 성품이지.

하지만 세상을 살아가려면 제몫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투쟁심 또한 필요해.

이정, 기운 내라.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노력하면 누나도 달라진 널 알아볼 날이 올거야."

 

친구의 진심어린 충고가 고마웠다.

피를 나눈 가족이 아니어도 이렇게 제 고민을 들어주고 힘을 주는 친구가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새삼스럽게 깨닫는 순간이었다.

 

"고맙다."

 

이정의 어깨에서 손을 거둬낸 우빈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이정에게 잔을 내밀었다.

이정도 씩 웃으며 건배를 했다.

 

"잘 해봐. 어머니가 항상 노래하는 그 해피 엔딩이라는 거 실제로 일어나는지 보고 싶으니까."

"피식, 알았다. 절대 포기하지 않을테니 잘 보도록 해."

 

잔을 비운 이정은 시간을 확인했다.

우빈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결국 한 시간도 안채우고 가는 거냐?"

"얼굴도장만 찍음 됐지. 그래도 니 덕분에 유익한 시간이었어."

 

이정의 눈이 유난히 빛나는 것을 보고 우빈은 피식 웃었다.

 

"뭔가 영감이 떠오른 거냐?"

"알면서 뭘 묻냐. 난 이만 사라질 테니 저기 애타게 널 바라보는 여인들이나 구제해줘."

 

이정이 턱으로 가리키는 곳에는 과연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화려한 차림새의 여성 둘이 우빈을 황홀하다는

듯이 바라보면서 자기들끼리 소근대고 있었다.

 

"작업 잘해라. 얼마나 멋진 작품이 나올지 기대된다."

"너도 실력 발휘 잘해보라고."

 

이정은 출구로 가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손만 흔들었다.

친구의 뒷모습이 생각보다 가벼워보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 우빈이었다.

 

"우리가 속한 세상에서 너처럼 치열하게 사는 놈도 드물거다.

계속 자신의 위치가 옳은 것인지 자문하고, 한 여자만 바라보며 끝없이 노력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혼잣말을 내뱉은 우빈은 친구에 대한 걱정을 떨쳐내고 자신을 바라보던 여인에게로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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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마음은 심난하고, 일은 손에 안잡히고, 잠은 쏟아지고...

해서  어젯밤에 쓰던 소설 마무리지어 올립니다..

완전히 배째라 자세로 임하는 불량 직딩입니다 ㅋㅋ

이젠 다시 업무에 복귀해야겠죠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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