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아~ 서둘러, 빨리 나가야 해."
가을은 화사한 연두색 쉬폰 원피스를 입고 머리를 깔끔하게 올려 묶은 차림으로 계단을 내려오며 이정을 불렀다.
나현은 거실에서 차를 마시다 외출을 나가려는 가을을 봤다.
봄처녀처럼 화사하게 차려입고 뺨에 약간 홍조까지 띈 가을은 무척이나 예뻐보였다.
"가을아 정이랑 어디 가니?"
"오늘 지후 오빠하고 수암병원에서 자선공연 하거든요. 정이도 같이 가기로 했어요."
"그러니? 난 또 너희들이 데이트라도 한다고..."
"호호 이 좋은 봄날에 왜 정이랑 데이트해요. 차라리 지후 오빠가 훨 낫지."
"하여튼 말 한번 예쁘게도 해요. 내가 누구때문에 이 좋은 봄날에 병원에 가는데..."
나현은 혹시나 기대하고 조심스럽게 행선지를 물었지만 가을의 대답에 실망했다.
이정 역시 계단을 내려오면서 나현과 가을의 대화를 듣고는 실망을 감추지 못해 불퉁하게 말이 나왔다.
하지만 두 모자의 속마음을 전혀 헤아리지 못하는 가을은 쾌활 명랑 그 자체였다.
"어머~ 그래서 삐졌어? 그럼 나 혼자 갈게, 넌 집에서 쉬도록 해."
"아,아냐. 가자, 가."
"피식, 그러게 왜 투덜대냐고. 이모 저희들 다녀오겠습니다."
"다녀올게요 어머니."
가을과 이정은 예전과 똑같았다.
여전히 이정은 가을에게 속절없이 휘둘리는 동생이었고, 가을은 제게 은근히 마음을 드러내는 이정을 모르는 척하며 잘 다루는 누나였다.
오늘 자선공연도 이정이 일방적으로 가을을 따라가는 길이었다.
이정과 가을이 집을 나간 후 나현은 차 마시는 것도 잊고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겨울 방학이 끝날 무렵, 다시 집으로 올라온 가을은 한결 밝아졌다.
원래 밝고 명랑한 아이였지만, 뭔지 모를 개운함 같은 것이 느껴져서 즉시 현애에게 연락을 취했다.
현애에게 들은 말로는 피렌체에 갔을 때, 가을은 두오모에 갔다가 이정과 함께 돌아온 후로 일현에 대한 부질없는 기다림을 버렸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이정에게도 이제 기회가 오려나 기대했지만, 여전히 가을이 이정을 바라보는 눈빛이며 친동생처럼 대하는 태도는 똑같았다.
이대로 가을이 기약없이 훌쩍 유학을 가버리겠다 싶어 갑자기 울적해지는 나현이었다.
'도대체 저애들은 어찌 되려는 건지...'
"아주 예쁘다. 꼭 실프같아."
"정말요? 내가 요정처럼 예뻐요?"
강당에 먼저 도착한 지후는 가을을 보자마자 미소지으며 말했다.
가을은 지후의 칭찬에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응. 그 연두색 원피스 입은 네 모습이 꼭 봄을 맞아 초록빛을 띄기 시작하는 숲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공기의 요정처럼 보여."
"정아, 들었지? 나보고 요정같대~"
이정은 지후의 칭찬에 좋아서 팔짝 뛰는 가을의 모습도 마땅치 않았지만, 지후의 칭찬 자체도 맘에 들지 않았다.
피렌체에서 돌아온 후, 이정은 가을을 볼 때마다 공기의 요정처럼 금방 어디론가 훌쩍 떠나버릴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일현에 대한 미련을 버린 것은 이정에게도 반가운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을이 자신까지 버리길 바란 건 아니었다.
그래서 실프같다는 지후의 칭찬이 더 신경쓰였다.
이정이 심난해하거나 말거나 가을과 지후는 최후 리허설을 하는데 집중했다.
봄을 맞아 가벼운 곡을 연주하자는 가을의 제안대로 두 사람이 연주하는 음악은 더 없이 발랄하고 경쾌했다.
시간이 지나, 환자들이 강당으로 들어오고 공연이 시작됐다.
가을과 지후의 연주를 처음 보는 사람들은 두 사람이 참 잘 어울리는 선남선녀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렇잖아도 심난한 이정은 그 말을 듣고 더 신경이 씌였다.
문득 피렌체에서 우연히 들었던 가을과 현애의 대화가 생각났다.
* * *
"난 현이 오빠가 떠난 후로 제대로 애도를 못했던 거야.
그래서 약속대로 정이를 잘 돌봐주면 오빠가 내게 다시 돌아올 거라고 내 맘대로 기대한 거야."
"애도라... 어쩌면 맞는 말이겠구나... 넌 나한테도 늘 괜찮다고만 말했으니깐.
엄마라는 사람도 딸에게 의지가 되기보단 잔소리나 듣는 존재였으니... 후~"
호텔로 돌아온 다음, 현애는 담담하게 일현을 맘속에서 떠나보냈다는 가을의 말에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딸의 얼굴을 쓸어주었다.
하지만 가을의 표정은 밝았다.
"아냐, 엄마. 나 오늘 똑똑히 알았어. 난 두오모에서 오빠가 다시 내게 오길 바란게 아니라 과거 함께했던 시간이 다시 돌아오길 바랬다는 걸 말야.
이 도시는 과거에 얽매여있어도 아름답지만... 사람은 과거에 얽매이면 안된다는 걸 뼈저리게 배웠어."
"그래,,, 큰 깨달음을 얻어서 정말 다행이구나. 여기에 온 보람이 있어 다행이네."
"응, 정말 피렌체에 오길 잘했어. 여기에 와서 난 비로소 과거에서 풀려나 자유를 얻은 거야."
"그래, 지금 네 얼굴 아주 환해.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반짝반짝 빛이 난다."
"정말? 나 그럼 한국으로 돌아가면 바로 멋진 남자친구 만들 수 있을까?"
"당연하지. 내 딸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예쁘지, 날씬하지, 똑똑하지, 사려깊지 뭐 하나 빠지는 게 없구만."
"꺄~ 엄마 사랑해~"
가을은 환하게 웃으며 희망적인 말을 해주는 현애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그런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현애는 조심스럽게 이정에 대한 말을 꺼냈다.
"근데 가을아, 기왕 남자 친구 찾을 거 주변부터 보는 거 어때?"
"엄마 설마 정이 말하는 거야?"
"왜? 싫어?"
"에이~ 정이는 동생이잖아."
"왜? 요즘은 연상연하 커플이 유행인데 뭐 어때."
"난 연하 싫어. 어른스럽고 성숙하고 굳이 말하지 않아도 내 맘 다 알아주는 그런 사려깊은 사람이 좋단 말야."
가차없이 자신을 싫다고 말하는 가을에게 서운한 맘이 안들리 없었다.
가을이 형을 마냥 기다리다 상심에 빠질까 걱정이 되어 날아왔던 이정으로서는 다소 맥이 빠지는 이야기였다.
결국 이정으로서는 피렌체행은 절반의 성과밖에 얻지 못한 셈이었다.
* * *
공연이 끝나고 가을과 이정은 지후, 서현과 함께 저녁을 먹으러 이동했다.
파스타를 좋아하는 여자들을 위해 선택한 이태리 레스토랑이었다.
함께 저녁을 먹으면서 자연스럽게 가을의 밀라노, 피렌체 여행에 대한 대화가 시작되었다.
쥰세처럼 멋진 남자를 만났냐는 지후의 질문에 가을은 묘한 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쥰세는 못봤지만 그 대신 큰 깨달음을 얻었어요."
"뭔데?"
"과거에 시간이 멈춘 도시는 아름답지만, 과거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보기 좋지 않다는 거요."
"멋진 말이네. 피렌체에 가면 항상 중세에 머물러 있는 것 같이 좋긴 하지만 지금을 중세로 착각하몀 사는 사람 보면 답답할 거야."
서현은 적극적으로 가을에게 맞장구를 쳤다.
이정은 복잡한 마음으로 서현에게 웃어주는 가을을 봤다.
"그러니까요. 사람은 미래지향적으로 살아야해요."
"앞을 보는 건 좋지만 주변도 살펴보면서 살도록 해.
저도 모르게 소중한 걸 잃어버릴 수도 있으니까 말야."
"당연하지. 그러니까 모든 것을 다 소중하게 여기며 살아야 하는 거야."
"물론이에요. 미래도 중요하지만 지금 이 순간도 소중하게 생각한다구요."
서현은 지후의 말속에 숨은 뜻을 파악하지 못했지만 가을과 이정은 어렴풋이 눈치챘다.
하지만 정작 말을 꺼낸 당사자인 지후는 아무렇지도 않게 화제를 돌렸다.
"어쨌든 오늘 수고했어 가을아. 이제 마지막 학기가 될지도 모르는데 연습 정말 열심히 했더라."
"맞아, 정말 오늘 연주 좋았어. 두 사람 모두."
"헤헤 뭘요. 지후 오빠야말로 바쁜데 이 공연까지 준비하느라 힘들잖아요."
"아냐, 오늘 피아노 연주 정말 근사했어. 봄의 생동감이 강하게 느껴지더라구."
이제 대화는 오늘 공연으로 넘어갔다.
저녁을 마치고 이정과 함께 차를 타고 돌아오면서 가을은 생각에 잠겼다.
밀라노에 가기 전에 봄날은 간다 얘기를 하면서 일현을 기다리지 말라고 조언을 했던 지후였다.
그래서 앞만 보지 말고 주변을 살펴보라는 말이 신경쓰였다.
'왜 모두 다 나랑 정이를 연결시키려고 하는 건지...'
일현이 자신을 동생으로만 본 것처럼 가을 역시 이정을 동생 이상으로 볼 수 없다는 걸 사람들이 몰라주니 좀 답답했다.
이정은 가을이 한숨을 내쉬자 슬쩍 가을의 얼굴을 살폈다.
"왜 그래?"
"아냐... 정아, 라디오 좀 틀어줄래? 음악 듣고 싶다."
라디오에서는 경쾌한 리듬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가을은 지금 나오는 노래가 토이의 '뜨거운 안녕'임을 알아차리고 반갑게 따라 흥얼거렸다.
조금 더 볼륨을 높여줘 비트에 날 숨기게
오늘은 모른 척 해줘 혹시 내가 울어도
친구여 그렇게 보지마 맘껏 취하고 싶어
밤 새도록 노랠 부르자
이 밤이 지나면 잊을께 너의 말처럼 잘 지낼께
가끔 들리는 안부에 모진 가슴 될 수 있길
어떤 아픔도 견딜 수 있게
소중했던 내 사람아 이젠 안녕
찬란하게 반짝이던 눈동자여
사랑했던 날들이여 이젠 안녕
달빛 아래 타오르던 붉은 입술
떠난다면 보내드리리
뜨겁게 뜨겁게 안녕
너를 품에 꼭 안고서 처음 밤을 새던 날
"이대로 이 세상 모든 게 멈췄으면 좋겠어"
수줍은 너의 목소리 따뜻한 너의 체온
이 순간이여 영원하라
이 밤이 지나면 잊을께 너의 말처럼 잘 지낼께
앞만 보고 달려가자 바보처럼 울지 말자
너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
부디 행복한 모습이길
언젠가 우리 다시 만나도
모른 척 스쳐 갈수 있게
멋있게 살아줘
뜨겁게 뜨겁게 널 보낸다
안녕......
이정은 흥겨운 이별노래를 흥얼거리는 가을을 보면서 지금 가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챘다.
다시 한 번 형에게 이별을 고하고 있는 가을의 옆얼굴을 바라봤다.
'나까지 형이랑 과거로 묶어서 보내려 하지 마.
추가을을 사랑하는 내 마음은 현재진행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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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이정이 앞에는 가시밭길이 좍~ 있네요.
뭐 어쩌겠습니까.. 감당하는 수밖에요.. (돌 날아오는 소리가 --;)
화창한 토요일입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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