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이러지 않아도 되는데..."
"아직까지 가을양 몸상태 정상이 아니란 거 다 알아."
퇴원 후 이정은 매일 아침 저녁으로 가을을 집에서 학교로, 학교에서 집으로 데려다주었다.
가을은 그런 이정의 배려가 고맙고 기쁜 한편으로 미안함도 갖고 있었다.
아직까지 잊어버린 기억이 돌아오지 않아서 마치 마감기한을 지난 리포트를 쓰는 기분이었다.
벌써 퇴원한 지도 2주가 지나 더이상 등하교시 태워주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건만 이정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아직도 격주로 병원에 가는 만큼 가을은 환자라고 못박는 이정에게 더 이상은 반박할 말도 없었다.
지금 이정과 가을은 병원에서 가을의 집으로 가고 있었다.
아직 가을이 두통을 호소하는 있음을 알게 된 이정은 우려를 감추느라 표정이 딱딱해졌다.
가을은 이정의 눈치를 보느라 조용히 있었다.
무거운 분위기가 답답해 이정은 라디오를 틀었다.
오 그대는 아름다운 여인 그리고 행복한건 나
메마른 내 맘에 단비처럼 잊혀진 새벽에 내음처럼
언제나 내 맘 물들게 하지
오 그대는 아름다운 여인 그리고 외로운건 나
그대가 내곁에 있다 해도 두 손에 못잡는 연기처럼
언제나 내 맘 외롭게 하지
차마 사랑한다고 말하기에는 그댄 너무 좋아요
그대 말없이 내게 모두 말해요
오 그대는 아름다운 여인 그리고 행복한건 나
메마른 내 맘에 단비처럼 잊혀진 새벽에 내음처럼
언제나 내 맘 물들게 하지
차마 사랑한다고 말하기에는 그댄 너무 멀어요
그댄 멀리서 손짓만 할건가요
들국화의 '오 그대는 아름다운 여인'이 차안을 가득 채웠다.
가을은 눈을 감고 가만히 노래를 음미했다 노래가 끝나자 환하게 웃으며 다시 눈을 떴다.
이정은 그런 가을을 보면서 살짝 웃었다.
"가을양 이 노래 좋아해?"
"예, 집에 LP도 있어요. 아버지가 못말리는 들국화 팬이라 어릴때부터 많이 들었는데 참 노래도 가사도 고와서 좋아해요."
"그대가 옛노래를 좋아하는 줄은 몰랐어."
가을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불쑥 내뱉듯 속마음을 드러냈다.
"이 노래를 들으면 어쩐지 선배가 떠올라요."
"어째서지?"
"글쎄요... 모르겠어요, 그냥..."
얼굴이 상기되어 난처하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보는 가을이 너무나 사랑스럽게 보였다.
하지만 이정은 가을의 눈속에 담긴 미묘한 감정을 눈치챘다.
가을의 말대로 이 노래의 가사는 아름다웠지만 멀리서 바라보는 사람의 외로움과 쓸쓸함이 배어있었다.
결국 자신이 다가가려고 노력한다고 하지만 고백했던 순간의 기억을 잃어버린 가을에게 아직 자신이 먼 존재인가 싶어 절로 한숨이 나왔다.
-이 환자의 상태로 봐서는 사고 당시 뇌가 받았던 충격이 워낙 컸기 때문에 외상성 기억 장애가 생긴 것 같습니다.
혹시 사고 당일밤, 깨어난 후에도 했던 말을 반복하지 않았던가요?
-그랬어요... 검사를 받았는데도 금방 잊어버리고 검사받으러 가야하는 거 아니냐고 묻고...
-2주가 지난 지금까지도 사고 당일밤의 기억이 돌아오지 않았다면 영구적으로 그 기억이 손상됐을 확률이 큽니다.
이정은 의사의 최종 진단을 듣고서 가을의 기억을 되살리려는 계획을 포기했다.
하지만 가을이 자신의 고백을 잊었다고 해서 이정 자신의 마음까지 사라진 건 아니었다.
지후와 우빈에게 슬며시 말을 돌려서 논의를 했을 때, 지후는 어이가 없을 만큼 간단하게 대꾸했다.
-그럼 이정 네가 다가가면 되잖아. 꼭 추가을만 소이정에게 다가가야 하는 건 아니잖아.
-천하의 카사노바 소이정이 너 좋다는 사람 맘도 못잡는다니 말도 안된다. My bro, 이건 지나가는 개가 웃을 일이라고.
우빈도 이정의 얘기를 듣고 키득거리기만 했다.
친구들과의 이야기를 통해 이정은 앞으로 가을과 자신의 관계가 자신의 손에 달렸음을 깨닫고 나름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아직도 가을은 자신을 어려워하고 있다고 하니 결국 다시 고백해야겠다 싶었다.
어느 새 차가 가을이 사는 아파트앞에 도착했다.
가을은 재빨리 안전벨트를 풀고는 차에서 내렸다.
이정도 서둘러 차에서 내려 가을에게 다가갔다.
"선배 데려다 줘서 정말 고마웠어요."
"얼른 쉬도록 해. 안색이 안좋아."
"조심해서 가세요, 선배."
가을은 꾸벅 인사를 하고는 서둘러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이정의 말이 가을의 발목을 붙잡았다.
"혹시 내일 시간 있어?"
"네? 왜, 왜요?"
"데이트 신청하려고."
"예에?"
놀라서 말까지 더듬는 가을에게 이정은 개구장이같은 미소를 보여주었다.
"내일 가을양 오후 수업 없잖아. 할일도 없으면 나와 함께 데이트 하지 않겠어?"
"저기... 저, 사실은...."
가을은 뜻밖의 데이트 신청에 어쩔 줄 몰라하다 겨우 말을 이었다.
"저 사실... 학교 시네마떼끄에서 '이터널 선샤인' 볼 계획이었어요."
"이터널 선샤인? 그거 오래된 영화 아냐?"
"워낙 좋아하는 영화라서요... 보면 볼수록 빠져드는 영화에요. 선배 혹시 봤어요?"
"아니, 무슨 내용이지?"
"간단하게 정리하면 기억을 지운 연인이 다시 사랑을 하게 되는 내용이에요."
가을의 수줍은 설명 중에서 이정의 귀에 남은 말은 '기억'이었다.
그러고보니 예전에 지후도 이 영화에 대해서 호평을 했던 게 생각났다.
지후는 사랑은 머리가 아닌 가슴이 하는 것이라고. 설령 기억이 지워진다 해도 사랑하는 마음은 남는 것이라는 걸 설명해주는 영화라고 말했었다.
사라진 기억때문에 현재 난감한 상황에 빠진 이정과 가을에게 딱 맞는 영화라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 내일 같이 볼까?"
"예? 선배 괜찮겠어요? 아무리 시네마떼끄라고 해도 20~30명이 같이 보는 건데."
"괜찮아. 어차피 강의도 여럿이 함께 듣는 걸."
이정이 사람 많은 곳을 싫어하는 것을 잘 아는 가을은 망설였지만 결국 괜찮다고 몇 번씩이나 말하는 이정을 이기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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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이정은 정확히 영화가 시작하는 시간에 시네마떼끄로 들어가 맨 뒷자리에 앉아있던 가을의 옆자리에 앉았다.
가을은 익숙한 향기에 이정이 약속대로 자신과 함께 영화를 보러 왔음을 알고 마음이 들뜨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영화가 본격적으로 기억 지우기 작업을 보여주자 옆에 이정이 앉아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영화에 빠져들었다.
이정은 영화에 몰두하는 가을의 옆얼굴을 보면서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영화 속에서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기억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면서 제 일인양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너무나 사랑스러워 저도 모르게 가을의 손을 잡았다.
가을은 잠시 놀라서 이정을 보다 얼른 손을 빼고는 다시 영화 속 세상에 잠겼다.
이정도 영화가 하이라이트로 치닫자 집중했다.
그렇게 이정과 가을은 영화에 몰두해서 푹 빠져들었지만 여자들이 몰려들세라 끝이 나자마자 즉시 시네마떼끄를 빠져나왔다.
뒤에서 "F4 소이정이다"라고 탄성을 지르는 여자들의 목소리가 나왔지만 두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고 얼른 건물밖으로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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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은 덕분에 좋은 영화를 봤노라고 감사한다며 가을을 도예실로 데려와서 차를 끓여줬다.
가을도 원래 이정의 도예실에 오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밝은 표정으로 차를 마셨다.
"정말 좋은 영화였어. 과연 지후가 극찬할만 해."
"그쵸? 봐도 봐도 새로워요. 멋진 대사도 많구요."
"망각한 자는 복이 있나니 자신의 실수조차 잊기 때문이라.
평소에도 참 근사한 말이라고 생각했지만 저 영화만큼 잘 인용한 영화는 상황은 없는거 같아."
"난 알렉산더 포프의 시가 참 좋아요.
행복은 순결한 여신만의 것일까!
잊혀진 세상에 의해 세상은 잊혀진다.
티 없는 마음의 영원한 햇살.
여기엔 성취된 기도와 체념된 소망 모두 존재한다."
황홀한 듯이 시를 읖조리는 가을을 보면서 이정은 빙긋 웃었다.
이정이 저를 보며 다정하게 웃어주자 가을은 어쩐지 쑥쓰러워 차를 더 마셨다.
그런 가을을 보면서 이정은 용기를 내어 말을 하기 시작했다.
"사실 말야... 나 은근히 가을양이 기억을 잃은 게 원망스러웠어.
그런데 오늘 이 영화보니까 내가 얼마나 옹졸하게 굴었는지 알겠더라."
"네? 무슨?"
가을이 동그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이정은 저도 모르게 헛기침이 나왔다.
"결론을 먼저 말하자면 그대가 그날 밤의 기억을 영원히 못해낸다해도 상관없다는 얘기지.
어쨌든 난 그런 사고가 아니었으면 내 마음 확실히 깨닫지 못하고 계속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을 테니까.
그리고 그 마음을 내 입으로 직접 표현했기 때문에 그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내 맘은 더 견고해져가니까 그날 밤은 내게 확실한 전환점이 되었거든.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어."
"그날 밤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가을은 이정의 다정한 말과 눈빛에 저도 모르게 설레임으로 가슴이 떨려왔다.
설마 지금 이정이 자신의 마음을 받아주려는 것일까?
다정하게 대해줬다가 다음 순간 싸늘해졌던 이정의 모습을 떠올리며 너무 기대를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래도 자꾸만 희망을 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날 밤 난 가을양이 내게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겨우 알게됐다고 고백했어."
"예에?"
가을의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이 살짝 벌어졌다.
이정은 예상했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가을의 옆에 앉았다.
"가을양이 버스에 치였다고 연락을 받았을 때 난 심장이 멈춰버리는 줄 알았어.
내 자격지심으로 은재를 놓쳐버린 지 얼마나 됐다고 또 다시 똑같은 실수를 하나 싶었어.
병원에 도착해서 가을양이 새하얀 얼굴로 응급실에 누워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정말 세상이 끝나는 것 같았어.
그러다가 가을양이 깨어나서 날 바라보고 알아봤을 때에야 난 제대로 숨을 쉴 수 있었어."
"선배...."
어느 새 가을의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이정은 부드럽게 한 손으로 가을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대가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고 고백하면서 애매하게 굴어서 미안했다고 사과했어.
그리고 그대가 내게 괜찮다고 용서해주었을 때 난 구원을 받는 기분이 들었어."
"그랬...어요...?
"응. 정말 기뻤어."
그런데 말이야, 다음 날 아침에 가을양이 모든 걸 다 잊어버려서 정말 미쳐버리는 줄 알았어."
"선배... 그래서..."
가을은 이제서야 이정이 왜 그렇게 황당하고 조금은 억울해하는 표정을 지었는지 이해가 갔다.
기껏 고백을 했는데 상대방이 그걸 기억하지 못한다면 그보다 더 억울한 일이 또 있을까 싶었다.
"미안해요 선배. 정말 미안해요."
"아냐, 가을양이 클레멘타인처럼 일부러 기억을 지운 것도 아니잖아. 그러니까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풋, 선배도 참..."
가을의 뒤늦은 사과에 이정이 이터널 선샤인에 비유하며 괜찮다고 하자 가을은 그만 살짝 웃고 말았다.
이정은 진지한 표정으로 손을 뻗어 가을의 양손을 잡았다.
'두근 두근'
가을의 가슴이 주체할 수 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난 사실 가을양이 내 맘을 받아주지 않아도 할 말 없는 사람이라는 거 알아.
제대로 용기도 낼 줄 모르는 바보가 바로 나니까 말야."
"선배, 그렇지 않아요."
이정은 가을의 맑은 눈을 들여다보면서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영화 속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과거에 실컷 싸우다 못해 서로에 대해 마구 험담한 테이프를 듣고 난 다음에도 괜찮다고 말하면서 다시 사랑을 시작하는 것처럼....
나도 그렇게 가을양에게 내 지금까지의 잘못 다 용서해달라고, 그리고 정식으로 우리 관계를 시작해보자고 청하고 싶어.
이렇게 한심한 나라도 괜찮다면 말야...."
"선배...."
가을의 눈에 또 다시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이정이 미처 눈물을 닦아주기도 전에 가을은 이정의 손에서 제 손을 빼내 눈물을 훔쳤다.
"너무... 기뻐요... 지금 이순간이 꿈일까 두려울 정도로요..."
"꿈이 아니야..."
이정은 두 손으로 가을의 얼굴을 감싸쥐고 가볍게 입을 맞춰주었다.
가을은 놀라서 그만 눈물까지 멈춰버렸다.
"! ....."
"하지만 이번엔 기억 제대로 할 거지?"
이정의 장난스러운 말투와 미소에 가을은 조용히 웃었다.
"설마요... 이번엔 꼭 기억할게요."
"그럼 이건 약속의 표시야."
"예?"
가을이 무슨 말이냐고 미처 묻기도 전에 이정은 다시 한 번 가을의 입술을 제 입술로 덮었다.
조금 전의 가벼운 베이비 키스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뜨거운 열기에 가을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양손으로 이정의 가슴을 밀어내려고 했지만 오히려 이정의 손에 제압당해버려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실컷 가을의 입술과 입안을 음미한 후 이정은 아쉬운 듯이 입술을 떼어내자 가을은 겨우 숨을 몰아쉬었다.
"달콤한 걸."
이정이 만족스럽게 웃자 가을은 얼굴이 새빨개졌다.
"서... 선배..."
이정은 어쩔 줄 몰라하는 가을이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또 다시 가을의 입술에 '쪽' 소리를 내면서 베이비 키스를 해줬다.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가을의 손을 잡고 이정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을양, 가자."
"네?"
"우리 오늘부터 정식으로 사귀기로 했잖아. 그러니까 나가서 데이트하자."
"예? 예에...."
가을은 볼에 홍조를 띄고는 이정이 이끄는 대로 도예실을 나갔다.
밖으로 나가자 계절의 여왕답게 아름다운 5월의 풍경이 새로 시작하는 연인을 축복하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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