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부야 K클럽 안쪽은 밴드 공연으로 무대 조명만 환했다.
일주일에 두 번은 가수들이 한국 가요를 부르는 이 클럽에는 유학생과 한류 애호가들이 몰려들었다.
밤 9시부터 11시를 책임지는 4인조 밴드 'Hana'는 두 달 전 보컬을 교체한 후부터 인기를 더 끌고 있었다.
이정은 자주빛 조명이 내려앉은 무대를 바라봤다.
"기억나지 않아 어젯밤 꿈 조차
지우려고 했던게 아닌데
잠들지 않도록 널 부르며 눈감았지
사무쳐 그립지는 않았지
미안해 널 미워해 이대로인걸
이해해 넌 그렇게 그대로인걸
꿈꾸지 않기를 눈 감으며 기도했지
사무쳐 그립지는 않았지
미안해 널 미워해 이대로인걸
이해해 넌 그렇게 그대로인걸"
자우림의 '미안해 널 미워해'를 너무나도 멋지게 부르는 보컬은 다름 아닌 가을이었다.
이정은 물끄러미 무대위에서 노래를 부르는 가을을 바라봤다.
4년만에 보는 가을은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 많이 달랐다.
큰 눈을 강조하는 무대화장에 긴 웨이브 머리를 늘어뜨리고 단풍잎처럼 붉은 홀터넥 드레스를 입은 가을은 성숙하고 신비로운 느낌을 주는 여인이 되었다.
지금 부르고 있는 자우림의 노래와 가을의 분위기가 완벽하게 맞아 떨어져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래, 나 널 지우려고 해
널 보내려고 해. 이젠 지쳤어
미안해 널 미워해 이대로인걸
이해해 넌 그렇게 그대로인걸
미안해 널 미워해 이대로인걸
이해해 넌 그렇게 그대로인걸
어느새 난 빗물에 젖어 슬픈 새..
미안해 널 미워해 이대로인걸
이해해 넌 그렇게 그대로인걸..."
노래가 끝나자 가을은 약간은 음울하고 쓸쓸한 분위기에서 벗어나 관중들을 향해 환하게 웃었다.
이정이 기억하던 가을의 얼굴을 보게 되자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우뢰같은 박수와 환호가 쏟아지는 가운데 잠시 가을이 이정이 서있는 쪽을 쳐다봤지만 미처 발견하지 못했는지 곧 고개를 돌렸다.
* * * * * * * * * * * * * * * * *
"수고했어 모두들."
"보름달도 떴는데 술 한잔 안하고 헤어져서 섭하구만."
"운치 찾는 건 좋지만 난 내일 오전 수업이 있다고."
"골든 위크가 끝난지 얼마나 됐다고. 준페이는 너무 술을 좋아한다니깐."
Hana 멤버들은 공연이 끝나고 클럽을 빠져나오면서 왁자지껄하게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보름달이 떴으니 술을 하자고 조르는 드럼 연주자 준페이의 요청을 가을과 기타리스트 세이는 가볍게 무시하는 중이었다.
결국 준페이는 만만한 술친구이자 베이시스트인 현수에게 매달리기 시작했다.
가을은 못말린다는 표정으로 준페이와 현수를 보다 고개를 저으며 앞을 본 순간 걸음을 맘춰버렸다.
멤버들과 열걸음쯤 떨어진 앞쪽에 이정이 팔짱을 낀 채 가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 말 없이 갑자기 멈춰버린 가을을 보고 밴드 멤버들은 가을의 시선을 따라가다 화보처럼 서 있는 이정을 발견했다.
모두들 잘 생겼다는 감탄사를 내뱉으며 이정과 가을을 번갈아 살폈다.
"아키랑 아는 사람이야?"
"혹시 한국에 두고 온 남자친구?"
"어디선가 본 거 같은데 누구더라?"
재일교포 3세인 세이와 일본인인 준페이는 가을을 일본식으로 아키라고 부르고 있었다.
가을처럼 유학생인 현수는 이정의 얼굴을 보면서 언제 봤는지 기억을 떠올리려고 애썼다.
먼저 이정이 가을에게 다가왔다.
조금은 쑥쓰러워하며 하지만 가을의 남자 동료들까지 넋을 잃게 할 만큼 멋진 미소를 지은 채로 말이다.
"오랜만이야, 가을양."
"선배..."
"이제 돌아왔어."
"유학은... 끝난 거에요?"
"응. 한국으로 들어가려다 그대가 여기에 있다길래 먼저 들렀어."
"어째서...?"
"약속했잖아. 4년후 가장 먼저 가을양을 만나러 오겠다고."
"기억하고 있었네요."
이정은 준비한 말을 하나씩 꺼냈지만 가을은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겨우 대꾸를 했다.
가을의 뒤에서 대화를 듣던 밴드 동료들은 무슨 말이 오가는 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한국말 실력이 딸리는 세이와 준페이는 물론, 현수조차 눈앞의 상황을 파악할 수 없었다.
단지 두 사람이 보통 사이가 아니라는 것만 느낄 수 있었다.
절대로 그냥 아는 사람이라거나 친구가 아니라 헤어진 연인의 분위기가 강하게 느껴졌다.
이정은 굳어버린 가을의 얼굴을 보며 조심스럽게 제의했다.
"잠시 이야기할 수 있을까?"
"저기... 지금은 너무 늦었으니까... 내일 얘기해요."
"후우~ 그럼 시간도 늦었으니까 집까지 바래다 줄게. 위험하잖아."
"괜찮아요. 저 혼자 들어가는게 아니니까 염려안해주셔도 돼요."
"그래도..."
"실례합니다. 두 사람 무슨 사연인진 몰라도 벌써 11시 반인데 그냥 내일 다시 만나는 게 어때요?"
어느 틈에 세이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렇잖아도 지금 헤어지려고 했어. 그만 가, 세이."
"가을양!"
"전 세이랑 같은 아파트에서 살아요. 그러니깐 너무 걱정말고 들어가세요 선배.
그리고 내일 수업은 세 시에 끝나니까, 세 시 반에 학교 정문앞에서 만나기로 해요.
여기도 알 정도면 제가 어느 대학원 다니는 줄도 알겠죠?"
"그건 그렇지만..."
"그럼 내일 뵈요.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저희들 다음 공연은 금요일에 있으니까 그 때까지 여기 머무르면 보러 오세요."
가을은 이정에게 눈인사를 한 다음 세이와 함께 자리를 떠나버렸다.
제 눈앞에서 가을이 다른 남자와 함께 걸어가는 모습을 볼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이정은 잠시 뒷모습을 보다
고개를 젓고는 주차해 놓은 곳로 걸어갔다.
남은 준페이와 현수도 멍하니 사람들이 떠나는 걸 보다가 술을 마시러 늘 가는 선술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 * * * * * * * * * * * * * * * *
이정은 운전을 하면서 우빈과의 통화를 떠올렸다.
-추가을 지금 일본에서 유학중이야.
귀국을 결정하고 우빈에게 연락을 했을 때 예상밖의 소식에 잠시 놀라긴 했었다.
유학이라니... 자신처럼 가을도 한국을 떠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유학? 뭐 공부한다고?
-금잔디 말에 따르면 한일 양국의 고대사에 관심이 많다나 뭐라나.
-가을양이 학구파인줄은 몰랐는 걸.
-지난 2월에 졸업하자마자 도쿄로 날아갔어.
-가을양네 집이 유학을 보내줄 정도로 넉넉했던가?
준표와 잔디의 연애때문에 한 때 가을양의 아버지가 실직됐던 걸 기억하는 이정이었다.
-추가을 국립대로 간데다가 대학다닐 때 장학금 많이 받아서 학비 별로 들지 않았어.
금잔디가 늘 우리들한테 제 친구 장학금 탄 거 자랑하느라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었거든.
-그래? 대단하네. 고3때 도예배우고 하면서 제대로 공부안하는 줄 알았는데.
-너 스웨덴 간 뒤로는 정말 열공모드였어. 대학때도 쭉 그랬고.
-새로운 모습이군. 그건 그렇고 도쿄는 물가도 비싼데 가을양 거기서도 죽집 아르바이트 하는 거 아닌가 몰라.
-금잔디 말로는 현재 추가을은 시부야에 있는 클럽에서 노래부르면서 생활비 해결하고 있대.
-뭐? 노래? 클럽에서?
오랜만에 듣는 가을의 소식은 계속 이정을 놀라게 만들었다.
-한류가 새로 불고 있어서 클럽에서 가요를 부른대.
-거기 어딘지 조사해 줄 수 있어?
-왜? 걱정되냐?
-당연하지.
-염려마라. 벌써 금잔디 성화로 확인해봤는데 그 클럽도 멀쩡한 곳이고 추가을도 노래만 부르고 있어.
-나한테 그 조사 자료 넘겨줄 수 있지?
-너 설마... 추가을에게...
-부탁할게, 우빈아.
-...... 후우~ 알았다 임마. 그나저나 너 언제 귀국하는 거야?
-곧 할 거야.
-빨리 와라. 보고싶다고.
이정이 예상했던 가을과의 재회는 조금 전과 달랐다. 그것도 아주 많이.
소녀티를 어느 정도 벗을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무대에서 노래하던 가을은 너무나도 성숙한 여인의 모습이었다.
화장을 지우고 평범한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은 모습마저도 20대 중반 답지 않게 슬픔과 상처를 아는 여인이었다.
그리고 자신을 보는 눈빛도 놀라움만 있었을 뿐, 반가움이 담겨있지 않았다.
지난 2월 발렌타인 데이 초콜렛을 끝으로 이정은 더 이상 가을에게 연락을 받지 못한 상태였다.
우빈의 말대로라면 가을은 유학을 떠난 후 자신에게 한 번도 편지를 보내지 않은 거였다.
단순하게 유학생활에 적응하느라 바빠서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더구나 클럽에서 들었던 노래 가사도 어쩐지 마음에 걸렸다.
-미안해 널 미워해. 널 지우려고 해. 널 보내려고 해. 이젠 지쳤어.
설마... 가을이 4년간 연락없던 자신에게 지쳐서 마음을 정리하려고 했던 걸까.
4년동안 가을을 그리워하며 다시 만날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는데, 가을도 자신을 소울메이트라 믿고 기다릴 거라 생각했는데...
조금 전 가을의 태도를 떠올리자 자신이 너무 늦게 도착한 걸까 싶어 이정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오늘 밤은 잠들긴 틀린 것 같다 싶었다.
* * * * * * * * * * * * * * * * *
가을과 세이는 지하철 역에서 내려 아파트를 향해 나란히 걸어갔다.
엘리베이터도 없는 낡은 아파트의 7층에 가을이, 5층에 세이가 각각의 룸메이트와 함께 살고 있었다.
평소에는 즐겁게 수다를 떨면서 걸어갔지만 오늘은 그다지 말이 없이 조용했다.
어쩐지 침묵하는 분위기가 거북해진 가을이 뭐라고 말을 하려고 했지만 세이가 더 빨랐다.
"그 사람 아키가 말한 사람이야? 4년동안 스웨덴으로 유학가서 연락 한 번 없었던 사람?"
"응 맞아."
"오늘 갑자기 찾아왔나보네. 아키 아까 정말 당황했더라."
"응... 깜짝 놀랐어..."
세이에게 이정의 얘기를 하자니 저절로 움츠러드는 가을이었다.
하지만 지금 세이는 가을을 걱정하고 있었다.
"정말 멋있는 사람이네. 남자가 봐도 여성들을 사로잡는 매력이 넘친다는게 느껴져."
"멋진 남자이긴 하지만 좋은 남자는 아닌걸."
"아키가 오랫동안 좋아할만 한 사람이야. 깨끗하게 인정할게."
"세이!"
가을은 화들짝 놀라 세이를 바라봤다.
우려와는 달리 세이는 가을을 보며 웃고 있었다.
"정말 다행이야."
"뭐가?"
뜻밖의 말에 가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세이를 바라봤다.
"아키의 첫사랑이 저렇게 멋있는 사람이니까 말야.
난 알 수 있어. 그 사람은 4년간 떨어져있어도 아키덕분에 멋진 남자가 되어 다시 찾아왔잖아.
만약 아키때문에 저 사람이 잘못 되었더라면 아키는 두고두고 미안해했을 거니까.
저렇게 멋진 남자라면 아키도 이제는 안심할 수 있잖아."
가을의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정말 세이의 말대로 가을은 더욱 더 근사해지고 단단해진 이정을 보고 마음 한 편으로 안도하고 있었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정이 기어이 이겼다 싶어서 기뻤다. 그동안 연락이 없어 원망했던 마음과는 별도로.
그것이 자신 덕분인지 은재 덕분인지 알 수는 없어도 늘 가슴 한구석에 남아있던 응어리가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내 꿈을 찾아서 유학을 오면서도 그 사람을 완전히 떨쳐낼 수 없었어.
미련일지 몰라도 바보처럼 늘 걱정이 됐어."
가을이 재빨리 손등으로 눈물을 훔쳐내자 세이는 다정하게 손을 잡아주었다.
가을은 자신에게 따듯하게 웃어주는 세이를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손을 잡으며 걷다가 아파트에 도착했다.
세이는 여느때처럼 7층까지 함께 올라가 가을을 배웅해주었다.
"잘 자, 아키."
"으응... 굿나잇 세이."
세이는 가을의 이마에 입을 맞춘 후 계단으로 몇 걸음을 걷다가 확 돌아와 가을 앞에 섰다.
가을은 진지해진 세이의 얼굴을 바라봤다.
"나 노력할게, 아키."
"뭐가?"
가을은 뜬금없는 말에 당황했지만 세이는 아랑곳않고 말을 이었다.
"나 그 첫사랑보다 더 멋진 남자가 되도록 노력할게.
그래서 아키가 내 마음 받아준 거 후회하지 않게 해줄게."
사려깊은 다정한 말에 가을은 또 다시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꾹 참고 세이의 두 손을 잡았다.
"지금 내겐 세이가 더 멋있어. 정말이야. 다정하고 한결같이 진실한 세이가 좋아"
세이는 환하게 웃으며 가을을 꼭 안아주었다.
가을도 세이의 허리에 팔을 두르며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 * * * * * * * * * * * * * * * *
다음 날 오후, 마지막 수업이 끝나자 가을은 서둘러 가방을 챙겼다.
하지만 조별 토론이 길어졌기 때문에 약속시간이 5분밖에 남지 않은 상태였다.
전속력으로 학교 정문으로 달려가니 이정이 보였다.
"미안해요... 헉헉.. 토론이... 길어졌어요..."
"괜찮아. 먼저 숨부터 돌리도록 해."
가을은 허리를 숙이고 손을 가슴위에 올린 채 숨을 헐떡였다.
이정은 화사한 분홍 꽃무늬 셔츠에 진한 분홍 플레어 스커트와 어울리지 않게 땀범벅이 된 가을을 물끄러미 봤다.
약속시간을 지키려고 옷이나 화장에 신경쓰지 않고 열심히 뛰어온 가을이 예전과 똑같다 싶어 조금 반가웠다.
마침내 가을이 허리를 펴고는 이정에게 미안해하며 배시시 웃었다.
"정말 미안해요, 선배."
"괜찮아. 나도 기다린지 얼마 안됐으니까."
거짓말이었다. 이정은 학교에 한 시간 전에 도착해서 교정을 둘러보고 가을의 강의실까지 살짝 엿봤다.
하지만 겨우 5분 늦었다고 미안해 어쩔 줄 몰라하는 가을에게 사실을 말할 맘은 조금도 없었다.
"어디 조용히 얘기할 만한 곳으로 자리 옮겼으면 하는데."
"아, 좋은 곳이 있어요."
가을은 방긋 웃더니 이정을 데리고 교정으로 들어가 벚나무가 가득한 곳으로 안내했다.
5월 중순이라 벚꽃은 오래전에 저버렸지만 싱그러운 신록으로 기분이 좋아졌다.
가을은 먼저 벚나무 사이의 벤치에 앉았고, 이정도 가을의 옆에 앉았다.
"좋은 곳인데."
"가끔씩 여기에서 책을 읽어요. 특히 머리아플 때 여기 앉아있으면 기분까지 좋아진다니까요."
어젯밤과는 달리 자신에게 환하게 웃어주는 가을을 보며 이정은 어쩐지 안심이 되었다.
"가을양 잘 지내는 거 같아. 좋아보여."
"첨에 여기 왔을 땐 은근히 걱정도 많았죠. 근데 좋은 사람들 많이 만나서 빨리 적응하게 됐어요."
"다행이네. 근데 클럽에서 노래부르는 모습 보고 좀 놀라긴 했어."
가을은 이정의 말을 예상했다는 듯 쿡쿡 웃으며 설명을 해줬다.
"그게 말이에요... 몇 가지 우연이 겹친 결과에요.
첨에는 나랑 같이 사는 언니 생일 축하를 위해 큰 맘먹고 지금 알바하는 클럽으로 갔어요.
분위기가 꼭 홍대앞 클럽같아 좋다고 그래서요.
그러다 다른 친구들까지 불러서 같이 술을 마셨는데 그 사람들이 언니한테 선물을 주는 거에요.
난 아무 것도 주지 못해서 미안한 맘에 밴드가 연주를 잠시 쉬고 있을 때 양해를 구하고 생일축하노래를 불러줬어요.
그런데 알고보니까 그 밴드의 기타리스트가 나랑 같은 아파트에 사는 데다가 학교까지 같았던 거에요."
"그럼 그 기타리스트는 클럽에서 가을양을 알아봤던 거야?"
"네. 그동안 학교랑 아파트 계단에서 마주쳤는데 내가 못알아봤던 거죠.
어쨌든 다음날 아침 등교하는데 아파트 우편함에서 마주치고 같이 지하철역까지 걸어가다 서로 같은 학교 다닌다는 걸 확인한 거에요.
재미있는 우연이니 친하게 지내자고 했는데 일주일도 안돼서 보컬이 그만뒀다고 나보고 노래를 같이 하자는 제의했어요.
첨엔 좀 망설였는데 아는 친구도 있고, 시급도 높고해서 결국 수락했던 거에요."
"한국 노래니까 부담이 없었던 게 아니고?"
이정의 짖궃은 질문에 가을은 꺄르륵 웃고 말았다.
"역시 선배는 날카롭군요. 사실 그게 제일 컸어요.
난 아직 일본어가 좀 서툰 편이라서 가사를 다 외운 J pop은 손으로 꼽을 정도에요."
"여전히 솔직하네 가을양은. 아마 금잔디라면 J pop도 부를 수 있다고 큰소리쳤을텐데."
"언제 어디서나 당당한게 잔디의 매력이잖아요."
가을의 밝은 모습에 이정은 안도했지만 조금 전 얘기를 듣다 보니 어젯밤 자신들의 대화에 끼어들고 가을을 데려갔던 세이가 떠올라 약간 기분이 거북해졌다.
그 사람과 가을이 어떤 사이인지 확인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기타리스트와 많이 친한 거 같네."
"세이요? 맞아요. 지금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에요."
"그 친구도 대학원생?"
"아니오, 세이는 학부생이에요. 심리학과 3학년이에요."
이정은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는 말에 흠칫했다 재빨리 세이의 나이를 계산하고는 가을보다 두 살이 어리다는데 안도했다.
한편 이정의 마음을 모르는 가을은 새삼 세이와의 추억을 떠올렸다.
클럽에서 노래를 불러도 되냐고 조심스럽게 물어봤을 때, 자신을 반가운 눈으로 보고는 흔쾌히 반주까지 해주었던 세이였다.
그 전까지는 전혀 모르는 타인이었지만 그 때를 계기로 세이는 아는 사람이 되었고 곧 밴드까지 하면서 단짝이 되었다.
-그 남자는 정말 천하의 바보인 거야. 어떻게 아키를 한국에 혼자 있게 하면서 연락도 안하는 거야.
-그땐 그럴 수 밖에 없었어.
-나라면 맨날 맨날 아키한테 전화하고 틈만 나면 편지도 쓰고 선물도 보낼 거야.
그렇게 아키를 방치하다니 연인도 아냐.
-그런 거 아니라니깐. 그냥 나혼자 짝사랑하는 거야.
조심스럽게 남자친구가 있냐는 질문에 이정이 스웨덴에 있고, 4년간 아무런 연락을 받지 못했다고 가볍게 말하자 세이는 화를 펄펄 냈었다.
그 후로 세이는 전보다 훨씬 더 다정하게 연인처럼 대해주었고 가을도 그런 세이에게 고마움과 함께 상처를 치유받고 있음을 느꼈다.
갑자기 가을이 말없이 행복하다는 듯이 미소짓자 이정은 불안해졌다.
빙빙 말을 돌릴까 했지만 결국 지금이 본론을 말할 때다 싶어 이정은 속마음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가을양의 소울메이트... 찾았어?"
조심스러운 이정의 질문에 가을은 웃음을 거두고 이정을 보며 차분하게 대답했다.
"언젠가 영화를 봤을 때 너무 감동깊어 머리속에 박힌 대사가 있었어요.
인연이란 시작할 때 하는 말이 아니라 끝이 났을 때 하는 말이라고...
소울메이트도 똑같은 거 같아요.
막연히 만나길 기다리는 게 아니라 두 사람이 서로에게 최선을 다하면 소울메이트인지 아닌지 비로소 알 수 있는게 아닐까 싶어요.
그래서 나 지금 세이가 내 소울메이트인지 알기 위해 만나고 있어요."
이정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가을을 봤다.
조금도 흔들림없이 말갛게 자신을 보면서 다른 사람과 교제한다고 말하는 가을이 너무나도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그럼 나는?"
기억속의 이정답지 않은 다급한 말투에 가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정을 바라봤다.
이정은 어느새 절박한 표정이 되었다.
"내가 그 지옥같은 4년을 견딘건 다 가을양때문이었어.
더 이상은 한심한 모습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그대앞에 떳떳하게 서기 위해서였다고."
"선배..."
"내가 어떤 마음으로 스웨덴에 있었는 줄 알아?
1분 1초라도 그대 생각 하지 않는 순간이 없었어.
가을양 편지를 읽는 그 순간만이 유일한 휴식이었어."
4년내내 자신을 그리워했다는 이정의 말에 가을은 놀라고 감동받았지만 입에서는 원망섞인 질문이 튀어나갔다.
"그런데 왜 한번도 답장을 써주지 않았어요?"
"한번 내 마음을 드러내면 봇물처럼 쏟아져서 모든 걸 포기하고 그대에게 가버릴 걸 알았으니까.
그리고 그렇게 되면 내가 가을양 지킬 수 없게 된다는 걸 알았으니까 겨우겨우 마음을 가둬놓았던 거야.
그래서 혼잣말로도 보고싶다는 말조차 못한채 필사적으로 재활치료를 받고 공부하고 도자기를 빚었어.
그대에게 떳떳한 모습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가을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이더니 한방울 두방울 떨어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서로 마음이 닿지 않았네요. 그래서 엇갈려버린 거에요."
"아직 너무 멀리가지 않았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갈 수 있어."
이정은 다급하게 손을 뻗어 가을의 손을 꼬옥 잡았다.
"4년동안 단 한 번만이라도 내게 선배의 그 마음을 알려줬다면... 그랬다면...
나도 잔디처럼 끝까지 버틸 수 있었을 거에요.
하지만 난 너무 힘들어서... 외로워서... 지쳐버리고 말았어요...
선배가 내 소울메이트일 거라고 믿으며 기다리려고 했지만... 난 잔디처럼 강하지 못했어요."
"정말 미안해 가을양. 혼자 외롭게 해서, 힘들게 해서.
내가 4년간의 힘든 시간을 보상해 줄 수 있도록 다시 한 번 기회를 줘."
가을은 고개를 가로 저으며 이정의 손에서 제 손을 빼냈다.
"우리는 끝이 나버렸어요. 그래서 인연이 아니었던 거에요.
정말 우리가 인연이었다면 마음이 엇갈리지도 않았을테니까...
난 알아요. 이제 내 맘속에 선배 자리가 사라졌다는 거.
소이정이란 사람이 내 소울메이트가 아니었을까 기대했던, 선배를 막연히 기다리던 그 시절은 이제 추억이 되었어요."
"난 끝나지 않았어!"
어느새 이정은 소리를 질러버렸다.
"내 가슴은 가을양밖에 없다고, 가을양이 내 일기일회라고 외치고 있는데...
어째서 가을양은 끝이라는 말을 하는 거야?"
가을의 눈에는 지금 이정이 어린아이로 보였다.
필사적으로 듣기 싫은 말을 거부하며 제 고집만 부리는 어린애 같았다.
"선배가 어린애같다는 생각 참 많이 했어요.
착하지만 여려서 상처를 받으면 무서워 다시는 똑같은 시도를 하지 못하는 그런 사람이었어요... 선배는.
그래서 난 늘 선배를 볼 때마다 항상 마음을 놓을 수 없었어요.
어떨 땐 내게 더할 수 없이 다정했다가 다음 순간에는 심장이 얼어붙을 만큼 차가워지고, 그러다 슬픔을 내뱉기도 하고.
4년 후 가장 먼저 날 보러 오겠다는 일방적인 약속을 들었을 때, 난 정말 혼란스러웠어요.
내가 선배 마음속에 얼마나 들어있는지 전혀 짐작을 할 수 없어서 답답했어요.
난 선배에게 내 마음을 전해주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지만 답이 없어서...
선배가 여전히 은재 선생님을 그리워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선배를 내 마음에서 놓아버리기로 결심했던 거에요."
"가을양!"
이정은 다급하게 가을을 불렀다.
하지만 이정의 겁먹은 표정을 보면서도 가을의 머리속에 떠오른 사람은 세이였다.
항상 환한 얼굴로 자신을 도와주던 세이.
-세이라고 불러도 돼?
-괜찮긴 한데... 왜? 세이이치는 너무 길어?
-세이(誠)는 정성, 진실이란 뜻이잖아. 그래서 난 세이라고 부르는 게 더 좋아.
"세이는 이름 그대로 언제나 내게 진실하고 연극따위는 모르는 순수하고 다정한, 항상 날 도와주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난 세이와 함께 있으면 날 생각해주는 그 마음이 전해져서 편안하고 즐거워요.
그리고 세이는 내 상처를 보듬어주고 날 새로 태어나게 도와줬어요.
소이정을 너무너무 그리워하다 미워하고 원망하는 마음을 갖게 된 추가을이 아니라 일본에 유학와서 열심히 공부하고 즐겁게 노래부르는 아키로 지낼 수 있도록 말이에요."
"그럼 난 어쩌라고! 가을양만 생각하며 4년을 버틴 난 이제 앞으로 어떻게 살라는 거야?"
그 언젠가 은재의 마음을 대신 알려줬던 날처럼 지금 이정은 무너지고 있었다.
어젯밤 보았던 단단해진 모습은 사라져버렸다.
그런 이정을 어린애처럼 안아주며 괜찮아질 거라고 다독여주고 싶었지만 그러면 안된다는 것을 아는 가을이었다.
한참동안 절규하는 이정을 바라보다 마침내 잠잠해지자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산중수복의무로 유암화명우일촌(山重水復疑無路 柳暗花明又一村).
선배는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죠?"
뜻밖의 질문에 이정은 멍하니 가을을 바라봤다.
왜 지금 한시의 뜻을 묻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산 넘고 물 건너 길이 없는 줄 알지만, 버드나무 우거지고 활짝 꽃이 핀 마을이 또 있도다."
마침내 이정의 대답이 나오자 가을은 살짝 웃으며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세상을 살다가 보면은 앞길이 꽉 막혀 살길이 막막해 보일 때가 있고 어려움이 있지만 그래도 참고 견디면, 그 아무것도 없을 것 같은 깊은 산중에도 꽃이 피는 마을이 있듯이 열심히 노력하면 반드시 희망을 찾을 수 있다는 뜻이죠.
내가 4년이라는 힘든 시간을 보내고 여기 일본에서 세이를 만난 것처럼, 선배도 그 4년간의 노력을 밑거름삼아 열심히 살면 언젠가 선배도 육우처럼 우일촌(又一村)을 만날 거에요.
그 때 선배가 해야할 일은 그 사람에게 마음을 표현하는 거에요.
그럼 은재 선생님이나 나처럼 마음이 엇갈려서 헤어지지 않을 거에요."
새로운 사랑을 만나서 마음을 보여주라니, 이정은 가을이 제게 너무 잔인하게 말한다 싶었다.
"가을양은 정말로 내 우일촌이 되어주지 않을 거야?"
"지금 선배를 마주보면서도 다른 사람을 떠올리고 있는 걸요.
그러니까 아닌 거에요."
"그런 거야..."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이정은 지금 상황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고, 가을은 이정에게 미안한 마음과 그동안 풀지 못한 숙제를 끝낸듯한 후련함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그 침묵의 시간은 아주 긴 것 같기도 하고, 반대로 아주 짧은 것 같기도 했다.
결국 말문을 먼저 연 사람은 가을이었다.
"저 이제 그만 가볼게요. 도서관 가서 내일까지 내야 할 리포트 자료를 찾아야 하거든요."
가을은 벤치에서 일어나 치마를 톡톡 털고는 몸을 돌려 이정을 바라봤다.
처음 재회했을 때 얼핏 내비쳤던 감정적인 동요가 완전히 사라진 평온한 얼굴이었다.
이정은 대꾸도 없이 멍하니 가을의 얼굴을 바라봤다.
"이렇게 만나러 와줘서 고마워요. 언제 한국으로 돌아갈진 몰라도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준표 선배랑 지후 선배, 우빈 선배에게도 안부 전해주시구요."
가을은 마지막으로 따듯한 미소를 지어주고는 몸을 돌려 걸어갔다.
아무말도 하지 못한채 멍하니 가을의 뒷모습이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벤치에 앉아있던 사람은 이정이었다.
조금 전 가을과의 대화가 너무나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져서, 꼭 꿈을 꾼 것 같아서 이정은 움직일 수 없었다.
그렇게 한참동안 이정은 가만히 앉아서 벚나무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을 바라봤다.
* * * * * * * * * * * * * * * * *
금요일 밤, 시부야 K클럽의 무대에는 Hana가 공연중이었다.
가을은 박화요비의 '당신과의 키스를 세어보아요'를 다 부르고 잠시 관객들을 보다 이정을 발견했다.
늘 반듯했던 평소와는 달리 잔뜩 흐트러진 이정이 텅빈 표정으로 가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을은 그런 이정을 보며 자신이 결국 상처를 주고 말았다는 걸 절감했다.
이제 와서 새로 시작할 수도 없기에 어떤 방식으로 위로를 해도 소용이 없다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무언가를 해주고 싶었다.
가을은 세이에게 다가가 무언가를 속삭였다.
세이는 즉시 준페이와 현수에게 지시를 내렸다.
가을은 무대 뒤 상황을 점검하고는 마이크를 고쳐잡고 관객들에게 말을 했다.
"다음 곡은 김윤아의 '봄날은 간다'입니다.
특별히 오늘밤엔 긴 엇갈림 끝에 사랑을 놓쳐버려 마음아파하는 분들을 위해 부르겠습니다."
반주가 시작되자 가을은 시선을 이정에게 고정하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눈을 감으면 문득 그리운 날의 기억
아직까지도 마음이 저려 오는 건
그건 아마 사람도 피고 지는 꽃처럼
아름다와서 슬프기 때문일 거야, 아마도.
봄날은 가네 무심히도
꽃잎은 지네 바람에
머물 수 없던 아름다운 사람들
가만히 눈 감으면 잡힐 것같은
아련히 마음 아픈 추억같은 것들
봄은 또 오고
꽃은 피고 또 지고 피고
아름다와서 너무나 슬픈 이야기"
이정은 자신에게 보여주는 가을의 미소에 가슴이 아파왔다.
예전 은재가 자신은 공기가 아닌 바람이었다고 말하면서 지어주었던 웃음과 똑같았기에.
추가을에게 이제 소이정은 가버린 봄날처럼 과거의 추억이 되어버렸다는 걸 알게 되어서, 또 다시 자신이 사랑을 놓쳤다는 것을 지금 다시 깨달아서 슬펐다.
'정말 끝인거구나...'
"봄날은 가네 무심히도
꽃잎은 지네 바람에
머물 수 없던 아름다운 사람들
가만히 눈 감으면 잡힐 것같은
아련히 마음 아픈 추억같은 것들
눈을 감으면 문득 그리운 날의 기억
아직까지도 마음이 저려 오는 건
그건 아마 사람도 피고 지는 꽃처럼
아름다와서 슬프기 때문일 거야, 아마도... "
가을은 이정의 얼굴을 보고 그가 이 노래에 담은 자신의 마음을 파악했음을 알았다.
가버린 봄날처럼 아름답지만 돌아갈 수 없는 추억이 되어버린 이정에게 진심으로 새로운 사람이 생기길 기원했다.
'행복하세요...'
노래가 끝나고 반주까지 끝나자 가을은 관객들에게 인사를 하고는 고개를 돌려 세이를 봤다.
가을과 세이의 눈빛이 만나자 두 사람은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애정어린 미소를 지었다.
그런 두 사람을 보고 이정은 조용히 클럽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클럽안에서는 계속 공연이 진행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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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갑자기 가을양이 이정군을 차버린 내용이 떠올라 써봤습니다...
작가와 PD의 탓이 엄청 크긴 하지만 저는 도저히 4년간 어중간한 약속 하나만 남기고 연락안한 이정군을 이해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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