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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너 마리아 릴케_엄숙한 시간

지혜의 여신 2010. 4. 18. 11:59
지금 세상 어디선가 누군가 울고 있다.
세상에서 하염없이 울고 있는 사람은
나 때문에 울고 있다.


지금 세상 어디선가 누군가 밤에 웃고 있다.
밤에 마냥 웃고 있는 사람은
나를 웃고 있다.


지금 세상 어디선가 누군가 걸어 가고 있다.
세상에서 마냥 걷고 있는 사람은
나에게로 걸어오고 있다.


지금 세상 어디선가 누군가 죽어가고 있다.
세상에서 하염없이 죽어가고 있는 사람은
내 모습을 살펴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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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어머니때문에 매우 정신적으로 힘든 유년기를 보냈다고 한다.

21세가 되어 당시 36세였던 루 살로메에게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들어 평생 사랑을 바쳤던 이유는 아마 그녀에게서 완벽한 어머니의 모습을 봤던 게 아닐까 하고 혼자 추측도 했다.

'레몬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고'라는 시집을 보면 루 살로메를 얼마나 절절히 사랑했는지 그 어떤 소설이나 시보다도 내 가슴을 흔들었다.

그래서 내겐 사랑의 대명사로 각인된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엄숙한 시간'같은 묵직한 시를 썼다는 게 의외였다 싶었다.

 

세상 어딘가에서 울고, 웃고, 걷고, 죽어가는 사람은 모두 나와 관련이 있다는 시를 읽으니 며칠전 MBC 특집 다큐멘터리 '승가원의 천사들'이 떠올랐다.

양팔도 없도, 그나마 있는 다리는 기형에 입천장도 뚫려있고 알지도 못하는 선천적인 질병을 갖고 태어나 버림받은 태호가 5년을 살지, 10년을 살지 모른다는 말을 비웃듯 열한 살 일반 초등학교에 다니면서 씩씩하게,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멀쩡하게 잘 살고 있는 내가 얼마나 축복받은 존재인지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나를 더 부끄럽게 만든 건 몸이 불편한 태호가 올해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뇌장애를 가진 동생 성일이를 끔찍하게 챙겨주는 모습이었다.

 

이 시를 읽고서 태호는, 성일이는, 성가원에서 서로를 따듯하게 보듬어주는 장애 아동들은 못나고 못난 어른들의 허물을 덮어주기 위해 장애를 갖고 태어난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허물속에는 내 허물도 들어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미안하고 마음이 아프고 눈물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