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약속

약속, 영원으로 만들다. 01

지혜의 여신 2009. 11. 28. 17:00

 

 

 

 

 

넒기로 소문난 신화대학교 캠퍼스에는 나무도 많고 풀밭도 여기저기 많이 있었다.
그래서 지금처럼 햇살이 따사로운 가을에는 수많은 학생들이 곧잘 넓다란 캠퍼스의 풀밭에서 쉬고는 했다.

 

가을도 예외가 아니라 공강시간이면 인문대 건물 뒤에 있는 풀밭에서 곧잘 드러누워 책을 읽고는 했다.
단지 오늘은 읽고 있는 것이 책이 아니라 편지라는 것이 달랐다.

 

남미를 여행중인 예전 남자친구 진하가 쿠바의 아바나에서 멋진 쿠바 재즈 음악을 들으며 황홀한 시간을 보냈다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가을은 슬몃 미소를 지었다.
예전에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을 함께 보면서 꼭 쿠바에 가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던 진하를 떠올리고는 드디어 소원을 풀었구나 싶어 자신도 기분이 좋았다.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은 오래전에 사라졌다지만 아바나에는 정말 멋진 클럽이 많아.
가을이 너도 꼭 한번 이곳으로 오면 좋겠다.
넌 분명히 좋아라하면서 집으로 갈 생각도 안하고 클럽 문이 닫을 때까지 음악을 들을 걸."

 

가을은 진하의 편지를 다시 한 번 읽은 후, 눈을 감고 아바나의 이름 모를 재즈 클럽을 상상했다.
그러다 어느 새 자신을 따스하게 감싸주는 햇살의 포근함에 가을은 편지지를 얼굴위에 올려놓은 채 살풋 잠이 들고 말았다.

 

 

 

"하여튼 정말 겁도 없다니깐... "

 

이정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면서 누워있는 가을의 옆에 앉았다.
아무리 대낮이고 학교라지만 이렇게 풀밭에 대책없이 누워 자는 가을의 강심장에는 늘 혀를 내둘렀다.
꽤 예민한 이정으로서는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탁 트인 야외 공간에서 낮잠을 잔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가을의 낮잠자는 버릇을 들은 후 깜짝 놀라 위험하다고 걱정을 했지만 가을은 이정의 걱정을 잔소리라고 일축했다.
그래서 이정은 가을이 낮잠을 자는 모습을 볼 때마다 곁에 있어주었다.
물론 자신이 학교에 있을 때만 가능한 일이었다.

 

오늘은 또 뭘 읽다 잠이 들었나 싶어 이정은 가을의 얼굴에서 조심스럽게 편지지를 집어들고는 읽기 시작했다.
예전 남자친구였던 진하의 편지라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이정의 얼굴이 확 굳어버렸다.

 

가을은 대학에 합격하자마자 참여했던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진하를 만났다.
군대에서 제대하고도 1년간 더 휴학했다 복학했던 진하는 오리엔테이션에서 술을 잘 못마시는 가을의 흑기사가 되어주었다.
진하는 예비역들이 자주 듣는 말인 마초같은 모습이 전혀 없었다.
시원시원하면서도 자상하게 대해준 진하에게 가을은 완전히 반해버렸고, 정식으로 입학한 후에는 진하를 쫓아다녔다.
처음에는 진하도 가을의 마음이 진심일까 싶어서 선후배라는 거리를 유지했지만 금새 두 사람은 인문대에서도 소문난 캠퍼스 커플이 되었다.

하지만 2년 후, 진하는 졸업 직후 전세계를 떠돌면서 바람처럼 살고 싶다며 가을에게 이별을 통보했다.
가을 역시 앞으로는 좋은 오빠 동생으로 지내자며 이별을 받아들였다.

 

진하와 헤어졌던 날, 가을이 방에 틀어박혀서 펑펑 울었던 걸 기억하는 이정으로서는 아직도 연락을 주고 받는 두 사람을 이해할 수 없었다.
혹시 울었나 싶어 잠든 가을의 얼굴을 들여다봤지만 입가에 걸린 미소를 보고 고개를 저었다.

 

- 진하 오빠는 바람이야. 그래서 잡을 수가 없었어. 바람은 영원히 한 곳에 머무르지 않아.
- 그래도 누나를 사랑한다면 곁에 있어줘야 하는 거 아냐?
- 정아, 사랑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하는 거야.
  내가 바람이 될 수 없듯이 진하 오빠도 바람이 아닌 다른 것이 되라고 강요할 수 없어.
  본모습을 잃어버리면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니까...
- 하지만...
- 난 괜찮아.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이별 후 집에서 혼자 슬퍼하던 가을의 모습에 속상해서 이정이 투덜거리자 가을은 오히려 이정을 달래주었다.
진하는 졸업을 하자마자 세계여행을 하면서 틈틈히 가을에게 편지를 보냈고, 가을은 진하의 편지를 소중하게 간직하면서 이메일로 답장을 보냈다.

그런 두 사람을 보면서 이정은 가을이 여전히 진하를 너무나도 좋아하는 것 같아 불안했다.
지금 가을의 곁에 있는 사람은 바로 이정 자신이었는데도.

 

"아직도 헤어진 남친 편지에 좋아라하고... 정말 한심하다, 추가을"

 

퍼억-

 

어느 새 가을이 잠에서 깨어나 이정이 무심코 내뱉은 혼잣말을 듣고 바로 머리를 베고 있던 책을 이정의 뒤통수에 휘둘렀다.
이정은 순간적으로 눈물이 핑돌 정도로 아파 말도 못했다.
 
"하늘같은 누님한테 못하는 말이 없다, 너."
"어, 언제 잠에서 깬 거야."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감싸면서 이정이 툴툴댔지만 가을은 모른 척하며 풀밭에 떨어진 편지지를 주워 들고는 조심스럽게 접어서 책갈피에 끼워넣었다.
자신을 후려친 책의 엄청난 두께를 확인한 이정은 소리를 빽 질렀다.

 

"그걸로 내 머리를 치다니 이건 완전 살인미수야!"
"그러게 함부로 말하래? 나 없을 때 얼마나 내 험담하고 다니는 거야?"
"날 뭘로 보고."
"이번에 들은 거까지 열 번이 넘는다, 너."

 

냉담한 가을의 대꾸에 이정은 슬쩍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도 가을은 아직 기분이 좋아보였다.

가을은 이정이 자신을 누나 대신 이름으로 부르면 가차없이 응징을 가했다.
워낙 어렸을 때부터 오누이처럼 자란 탓에 가을은 이정에게 사랑의 매(?)를 많이도 휘둘렀고, 이정 역시 가을이 자신에게 화를 내면 꼼짝도 못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이번에는 가을이 진하의 편지에 기분이 좋아서 뒤통수 한 대로 이름을 부른 처벌을 다했구나 싶었다.

 

가을은 시계를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털었다.
이정도 같이 일어나 가을의 등과 머리카락에 붙은 흙먼지와 풀잎을 털어주었다.

 

"제발 아무데서나 잠 좀 자지 마!"
"하루 이틀 자는 것도 아닌데 뭐... 그리고 가을엔 햇볕 쬐는게 최고의 보약이랬어."

 

가을은 나른하게 기지개를 켜고는 이정의 염려섞인 잔소리를 흘려들었다.
그런 가을의 모습에 이정은 한숨을 내쉬고는 자신의 뒤통수를 강타했던 책을 집어들어 가을에게 건네주었다.
가을은 자연스럽게 책을 받아 풀밭 밖으로 걸어가다 문득 생각난 듯, 휙 몸을 돌려 이정에게 다가갔다.
이정은 가을이 무슨 말을 할 지 짐작이 갔다.

 

"오늘 이모 생신인 거 알지? 무조건 일찍 집에 와."
"예~ 누구 명령인데요~"
"작년처럼 작업하느라 홀랑 까먹으면 죽을 줄 알아."

 

가을의 으름짱이 마냥 귀엽게 느껴지는 이정이었지만 웃음을 꾹 참고 고개를 끄덕였다.
안그러면 가을이 자신의 말이 우습냐고 이정의 볼을 양옆으로 쭉 잡아당길게 뻔했으니까.

 

"이따 봐~"

 

가을은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고는 종종걸음으로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러자 이정의 얼굴은 차츰 굳어갔다.

 

이정에게 나현의 생일은 곤혹스러운 행사였다.
일현이 집을 나간 후로 나현은 자신의 생일만 되면 효자였던 형에게서 연락이 없다는 한탄으로 저녁식사를 망쳤고, 가을은 그런 나현을 달래느라 바빴다.
어머니도 가을처럼 옆에 있는 자신보다 집을 나간 형을 그리워한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시켜주는 광경을 보면서 얼마나 마음이 착잡했는지 몰랐다. 
그게 싫었던 이정은 작년 나현의 생일에 작업실에 틀어박혀 있다가 잔뜩 화가 난 가을에게 귀를 잡힌 채로 집으로 끌려갔다.
올해에는 부디 어머니의 한탄이 짧게 끝나기를 바라며 이정도 자리를 떴다.  

 

이정의 마음을 달래주려는지 이정위로 내려앉은 가을 햇살은 아주 따사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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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묵혀놓기만 했던 이야기를 이제 쓰기 시작했습니다.

나름 새로운 소을 이야기를 쓰고 싶었는데 어떨지는 네... 쓰다보면 형태가 잡히겠죠.. (이런 무책임한 --;)

생각나는 대로 짧게 짧게 올릴 생각입니다...

자주 업뎃 안해도 양해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