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4 라운지-
지후와 가을이 탁자앞 의자에 나란히 앉아 있고, 당구대에서는 우빈, 이정이 함께 당구를 치고 있었다.
지후:(큰 상자를 건네며) 늦었지만 크리스마스 선물
가을:(깜짝 놀라) 선배...
지후:(웃으며) 그렇게 예쁜 선물을 받고 그냥 넘어가면 신사가 아니지.
가을:(선물 못받고) 내가 받은게 훨씬 더 많아요.
지후: 아냐. 네가 준 그 쿠션 커버 지금껏 받은 것 중에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이었어.
그나저나 선물을 안받아 주면 내 팔이 아파올텐데.. 이거 무겁다..
가을:(머뭇거리다 겨우 받는다) 고마워요...
지후: 열어봐
가을은 지후 눈치 보더니 쭈볏대며 포장을 풀렀다.
선물은 가을이 그토록 사고 싶어했던 매그넘 코리아 사진집이었다.
가을:(놀라서) 지후 선배!
지후:(가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역시 좋아할 줄 알았어.
가을:(감격해서) 정말 고마워요... (지후와 사진집을 번갈아가며 본다)
지후: 사진찍는 사람에겐 매그넘이 신같은 존재라며?
가을: 맞아요. 물론 나야 어디까지나 취미로만 찍는 거지만 사진에 미친 사람들에겐 우상 그 자체죠. (사진집을 넘겨 보기 시작한다)
우빈과 이정은 잠시 시합을 멈추고 화기애애한 지후와 가을을 봤다.
우빈:(농담조로) 윤지후 너 그렇게 선수쳐서 멋진 선물 주면 우린 뭐 주냐?
가을:(화들짝) 아니에요 우빈 선배, 괜찮아요 정말요. (두 손까지 내젓는다)
우빈: 그래도 F4 체면에 여자한테 먼저 선물받고 어떻게 가만히 있냐?
가을:(고개까지 흔든다) 정말 안그러셔도 된다니까요.
이정: 도서관 근로에 사진찍기까지.. 참 바쁘게 사는구나.
그대는 사는게 즐거운가?
가을: 네 즐거워요.
이정: 피식, 부럽네. 성경엔 세상 만사가 다 헛되다고 하는데.
가을: 헛되고 헛되다. 세상만사 헛되다.
늙은 솔로몬왕의 한탄사에요.
지후: 그게 솔로몬이 한 말이었어?
가을: 솔로몬왕은 유대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했지만 늙어서 삶이란 덧없다고 한탄했어요.
사람들이 원하는 돈도, 지혜도, 권력도 모두 다 가졌지만 결국 죽음앞에선 내려놓아야하니까요.
이정:(씁쓸한 표정) 잔인한 진실이군.
왜 성경이 인류 최고의 스테디셀러인지 알겠어.
가을은 이정의 표정이 심상치 않아 무언가 위로가 될 말을 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미처 입을 떼기도 전에 문이 열리더니 잔디와 준표가 들어왔다.
잔디는 가을을 보자마자 바로 소파로 달려와 가을 옆에 앉았다.
잔디: 가을아, 오래 기다렸어?
가을: 아니.
잔디:(사진집 보며) 어, 너 이거 드디어 샀어? 늘 사고 싶다고 노래를 하더니.
가을:(쑥스러워하며) 이거...... 지후 선배한테 선물받았어.
준표:(사진집 흘깃 보며) 뭔 책이 저렇게 크고 두껍냐?
잔디:(한심하다는 듯) 구준표, 이 책은 세계 최고의 사진작가들이 1년동안 우리나라를 찍은 사진집이거든.
가을:(또 싸울까 싶어) 잔디야 근데 나 여기로 왜 불렀어?
잔디: 아 맞다. 우리 다 같이 파티하자고.
파티라면 질색하는 잔디의 입에서 먼저 파티를 하자는 말이 나와 의아한 F4.
준표: 파티라니?
지후: 잔디 넌 원래 파티라면 질색했잖아.
잔디: 모레면 가을이가 새 생명을 얻은지 1주년이 되거든요.
다 같이 뉴칼레도니아도 다녀왔으니까 이왕이면 축하 파티도 다 같이 하면 좋잖아요.
그러나 잔디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라운지의 분위기는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이정은 완전히 굳어버렸고 준표와 지후, 우빈은 재빨리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뜻밖의 말에 가을도 당황했다.
우빈: 미안한데 모레라면 곤란한걸.
준표: 그날만큼은 나도 정말 안돼
지후: 다른 날로 옮기는 게 어때?
잔디:(뜻밖의 반응에 놀라) 아니 왜요?
가을:(잔디 입막으며) 됐어 잔디야. 그 날은 아빠랑 겨울이만 있음 돼.
(F4를 보면서) 괜찮아요, 잊으세요.
잔디:(가을 손을 치우며) 하지만...
준표는 상황 수습을 위해 잔디의 팔을 잡고 구석으로 끌고 갔다.
잔디: 아야 왜?
준표:(잔디에게만 들리도록 작은 목소리로) 잔디밭, 모레는 소이정 첫사랑 죽은 날이라고.
잔디:(너무 놀라 큰 소리로) 정말이야?
준표:(더 작게) 목소리 낮춰. 그러니까 너만 같이 쟤랑 있으라고.
그 날 우린 이정이랑 같이 있어야 하니까.
잔디:(속삭이듯) 알았어..
뜻밖의 사실을 접한 잔디는 미안함과 후회가 가득한 표정으로 이정을 흘깃 봤다.
이정은 여전히 굳은 상태였고, 우빈이 그런 이정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지후도 이정을 우려섞인 눈으로 지켜봤다.
가을은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다는 생각에 서둘러 일어났다.
가을:(시계 흘깃 보고)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저 이만 가볼게요.
이정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가을을 봤다.
거북해진 가을은 서둘러 사진집을 집으려다 그만 모서리에 손가락을 베였다.
가을: 아!
잔디:(다급한 목소리로) 가을아, 너 피나는 거야?
가을:(손가락 보며) 그런 거... 같네... (베인 자리에 피가 한방울 맺혔다.)
잔디:(가을 손가락의 피를 보고) 빨리 지혈해!
지후:(손수건으로 가을의 손가락을 감싸준다) 무슨 일이야?
가을:(손가락을 지혈하며) 저기 그게...
잔디:(가을에게 달려와) 빨리 병원가자. 서둘러!
F4는 잔디가 왜 이렇게 과잉반응을 보이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가을과 잔디를 봤다.
준표: 너 왜 그래?
잔디: 설명할 시간 없어. 가을아 빨리 가자. (가을의 가방과 외투를 집어든다)
가을: 응.
준표: 기다려, 내가 태워줄게.
잔디: 그래.. 아냐, 구준표 넌 스포츠카잖아.
(이정, 우빈 보며) 선배! 아무나 좀 태워주세요.
이정, 우빈: 뭐? (여전히 상황파악이 안돼 그저 바라만 보는 중이다)
지후: (날카롭게) 가을아 너!
지후의 외침에 준표와 이정, 우빈이 가을을 보면 베인 손가락을 싼 부분의 지후의 흰 손수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가볍게 베인 수준치고는 출혈이 심하다는 걸 깨달은 F4.
-신화대 병원-
우빈이 차를 세우자마자 가을과 잔디는 서둘러 차에서 내려 병원으로 뛰어들어갔다.
뒤이어 스포츠카가 멈추더니 준표가 내렸다.
준표와 우빈이 병원으로 들어간 지 얼마 안되어 다른 차가 멈추고 이정과 지후가 내렸다.
가을이 치료를 받으러 간 사이 잔디는 로비에서 발을 동동 굴렀고 준표는 그런 잔디를 달래느라 바빴다.
지후와 우빈은 아직 정확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해 그저 잔디와 준표곁에 서있었다.
급박했던 순간이 지나가자 이정은 로비를 둘러보며 밀려오는 불쾌한 기억에 얼굴을 찌뿌렸다.
이정:(하얗게 질린 얼굴로) 어떻게 된 거에요?
은재모:(눈가에 눈물자국 남은) 지금 수술중이야. 뺑소니차가.... (차마 말을 잇지 못한다)
은재부: 빨리 끝나지 않을 거 같구나. 앉아라.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이정의 발걸음은 입구쪽으로 향했다.
바로 그 때 가을이 로비로 나왔다. 손가락에는 붕대를 칭칭 감았다.
잔디:(가을에게 뛰어가며) 가을아~
가을:(미안해하며) 걱정많았지 잔디야.
지후와 준표, 우빈도 가을에게 다가갔고, 이정도 제정신을 차리고 발걸음을 가을쪽으로 돌렸다.
준표: 어떻게 된 거야?
지후: 왜 그렇게 지혈이 안됐어?
가을:(억지로 웃으며) 저기 그게요.. 제가 작년에 수술받은 게 심장이식 수술이었어요.
그래서 정기적으로 항응고제를 먹어야하는데 제가 좀 게을러놔서.....
그 순간 이정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렸고, 그런 이정의 얼굴을 보고 가을은 저절로 위축됐다.
가을:(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그래서 지혈이 잘 안돼요.
이정: 너 여기서 심장이식 수술 받은 거야?
가을: 네.
이정:(떨리는 목소리로) 그게 작년 12월 29일이었어?
가을: 예.. 근데 그건 왜요? (이정을 걱정스럽게 본다)
이정은 저도 모르게 과거를 떠올렸다.
인생 최악의 날이자 절대로 기억하기 싫었던 운명의 그 날이 눈앞에 펼쳐졌다.
긴 수술이 끝나고 은재는 중환자실로 이송됐다.
하지만 다음날 중환자실 앞에서 은재 부모님과 이정은 절망적인 소식을 들었다.
의사:(비통한 목소리로) 따님은 회생가망성이 없습니다.
은재부:(눈을 감았다 뜬 후 비장하게) 딸애는 늘 장기기증을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애 마지막 소원 들어주고 싶은데...... 가능하겠습니까?
이정: 아저씨!
은재부:(이정을 슬프게 보며) 은재도 분명히 찬성할 거다.
이정: 은재는 아직 안죽었어요. 왜 이렇게 쉽게 포기하세요?
은재모:(눈물을 흘리지만 단호하게) 이정아, 은재 아빠랑 어젯밤에 결론을 내렸단다.
이정:(절규하며) 아니에요. 은재는 깨어날 거에요. 이렇게 보낼 수 없어요.
은재부:(이정 어깨를 잡으며) 이정아. 이 길이 은재가 계속 사는 길이야.
이정: 하지만..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은재 부모를 본다)
결국 은재는 다시 수술실에 들어갔다.
의사들이 수술실을 들어갔다 나오기를 반복했다.
마침내 뇌사판정을 내린 의사가 수술실에서 나왔다.
의사: 이런 말이 위로가 되지 못한다는 건 압니다만...
따님은 여섯 환자에게 새 생명과 빛을 선물했습니다.. (연민에 찬 표정으로 은재부모를 본다)
-준표의 방-
이정이 비장한 표정으로 준표를 봤다.
그러나 준표가 이정을 보는 표정은 경악 그 자체였다.
준표: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이정: 아무래도 금잔디 친구가 은재 심장을 이식받은 거 같다고.
준표: 은재가 장기 기증했어?
이정: 그 때 의사가 여섯 명을 살렸다고 했어.
준표: 그럼 심장 기증한 거 확실한 거 아니잖아.
이정: 아냐, 확실해.
너무 단호한 이정의 말에 준표는 할 말을 잃었다.
준표: 그래, 차은재 심장 기증했어. 근데 그게 잔디밭 친구한테 갔단 보장이 어딨어?
이정: 날짜도 같고 병원도 같잖아. 우리나라에서 심장 기증하는 사람 거의 없어.
준표: 도대체 그렇게 확신하는 근거가 뭐냐?
이정: 둘이... 너무 닮았어.
준표:(어이없다) 닮긴 뭐가 닮아? 하나도 안닮았구만. 뭔 헛소리야?
이정: 똑같아. 서툴게 요요 돌리는 것도 그렇고, 겨울 햇살받으면서 책읽는 것도 그렇고,
십자수 놓는 것도, 자전거 일주하는 꿈을 꾸는 것도...
준표:(자포자기) 설령 네 말대로 가을인지 겨울인지가 은재 심장 받았다 치자, 그래서 어쩌려고?
이정: 확인해줘.
준표: 뭐?
이정: 장기 기증자도, 수혜자도 서로 상대방을 모르잖아.
신화대병원에서 수술한 거니까 넌 확인할 수 있을 거 아냐.
준표: 야 소이정!
이정: 부탁이야 준표야.
난생 처음보는 이정의 절박한 표정에 준표는 어떻게 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잔디가 이 사실을 알았다간 어떤 일이 벌어질 지 안봐도 뻔했다.
가을은 마귀할멈 때문에 힘들어하는 잔디를 항상 위로해주고 응원해준 단짝이었다.
게다가 항상 자신에게 잔디를 양보하는 착한 친구라는 사실도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가장 염려스러운 사람은 이정이었다.
은재가 죽은 날, 지후, 우빈과 함께 병원에 도착했을 때 이정은 마치 석상같이 은재 부모 옆에 앉아 있었다.
오랫동안 감정 조절 훈련을 받지 않았다면 아마 이정은 몸도 추스리지 못했을 거라고 모두 생각했다.
3일장을 치루는 내내 이정은 장례식장 한켠에 앉아있었다.
은재의 장례식날에도 눈물조차 보이지 않고 영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굳은 표정으로 있었다.
그러나 그날 밤, 이정은 자신들의 만류에도 밤새 클럽에서 술을 마셨다.
그 때 이정이 절망하는 모습을 영원히 잊을 수 없었다.
거의 1년이 지난 지금에야 겨우 안정을 찾은 것 같이 보여 속으로 안도했던 준표였다.
그런데 이제와서 은재의 심장을 받은 사람을 찾으니 암담했다.
준표: 만약 걔가 아니면 어쩔거야?
이정: ......
준표: 아무래도 안되겠다.
이정: 준표야!
준표:(한숨쉬며) 천하의 구준표님이라해도 의료법만큼은 함부로 무시못하겠다.
이정:(다급하게) 넌 오너잖아.
준표: 먼저 대답해. 만약 확인하면 어떻게 할 건데?
뜻밖의 질문에 이정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준표가 화제를 바꾸는데 성공했다고 생각하려던 찰나, 이정의 대답이 나왔다.
이정: 그저... 어떤 형태로든 은재가 다시 내게 돌아오길 바랄 뿐이야...
예상외의 답변에 준표는 절로 얼굴을 찌뿌렸다.
-도서관-
검색대앞에 서 있는 이정, 손에는 작은 종이가방을 들고 있다.
저번과는 달리 가을이 보이지 않아 살짝 미간을 찌뿌리지만 곧 여유로운 표정을 되찾고 다른 학생을 쳐다봤다.
이정: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될까요?
학생1:(황홀한 표정으로) 아, 예~
이정: 추가을양 지금 어디 있는지 아세요?
학생1: 가을이요? (멍한 표정)
학생2:(재빨리 끼어들어) 가을이 지금 책정리하러 갔어요.
이정: 그럼 어디에 있나요?
학생2: 글쎄요... (똑같이 멍한 표정)
학생1: 아 맞다, 가을이는 3층 담당이에요. 아마 지금 3층에 있을거에요.
이정:(싱긋 웃으며) 고마워요. 그럼 이만.
검색대 학생들이 황홀경에 쓰러지려하거나 말거나 이정은 즉시 몸을 돌렸다.
주변 학생들이 모두 자신을 보고 수근거렸지만 개의치 않고 가을을 찾아 3층으로 가는 이정.
3층에서 가을은 열심히 책을 다시 책장으로 집어넣고 있었다.
그런 가을을 발견하고 이정은 다가갔다.
이정:(웃으면서) 그대 이제보니 금잔디 못지 않은 근로학생이었네.
가을:(이정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이정 선배! 여긴 어쩐 일이에요?
이정: 반갑게 맞아주는 건 좋지만 목소리는 조금만 낮춰주지 않겠어? 여긴 도서관이잖아.
가을:(얼굴 빨개진다) 예, 죄송해요.
이정: 잠시 시간내 줄 수 있어?
가을은 예상밖의 만남으로 두근거리는 가슴을 달래느라 이정의 눈빛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이정은 가을에게 손을 뻗어 종이가방을 보여줬다.
이정: 자, 나도 늦었지만 크리스마스 선물.
가을:(완전 당황) 선배, 안그래도 돼요.
이정:(여전히 느긋한) 먼저 정성어린 선물받고 모른척 하면 실례잖아.
가을: 그거 그냥 만든 거에요. (종이가방을 받을 생각 못한다)
이정: 이런, 그대는 지후 것만 받는 모양이지? 아님 나도 책으로 선물해야 하나?
가을: 아니, 그건 아니구요..(난처한 표정)
이정: F4 체면이 있지. 그냥 받아주라.
이정은 웃으며 가을의 손에 억지로 가방을 쥐어줬다.
가을은 지난 번 병원에서의 이정 표정이 떠올라 굉장히 어색했다.
수술날자를 확인한 뒤 마치 다시는 안볼 것처럼 먼저 가버렸던 이정이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이렇게 친근하게 대해 어떻게 해석해야 할 줄 몰랐다.
가을: 정말... 고마워요...
이정: 내가 직접 만든 찻잔이야. 그대 맘에 들면 좋겠어.
가을: 지금 봐도 돼요?
이정이 고개를 끄덕이자 가을은 떨리는 손으로 선물을 꺼냈다.
작은 상자를 여니 은방울꽃이 새겨진 푸른색 찻잔이 나왔다.
가을:(감격해서) 이정 선배.. 정말 예뻐요..
이정: 맘에 든다니 기쁜데.
가을:(찻잔 돌려보며) 이런 은방울꽃 무늬는 처음 봐요.
(이정 보며 걱정스럽게) 이런 귀한 잔 정말 나 줘도 되는 거에요?
이정:(씩 웃으며) 가을양 이거 생각만큼 귀한 것도 비싼 것도 아냐.
우빈이가 전에 말했을텐데? 이럴 땐 그냥 고맙다고 말하면 되는 거라고.
가을:(또 얼굴 빨개지며) 예? 예... 정말 고마워요.
이정:(물끄러미 가을을 보다 느릿하게) 그리고... 새 생명... 얻은 것도 축하해...
입으로는 축하한다 말했지만 이정의 얼굴은 어느새 웃음이 사라지고 약간 흐려졌다.
그런 이정의 표정이 어딘지 모르게 마음에 걸리는 가을.
왜 그러냐고 묻고 싶지만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아 그냥 모르는 체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가을:(웃으며) 고마워요 선배.
-가을의 집-
식탁에 가을이 아버지, 여동생, 잔디와 함께 앉아서 신나게 이야기중이다.
식탁위에는 푸짐한 잔칫상을 차려놨다.
가을부가 목을 가다듬더니 술잔을 집어들었다.
가을부: 자 이제 우리 가을이 수술 1주년을 위해 건배하자.
(가을 보며) 가을이의 건강을 위하여!
겨울:(음료수잔 들고) 언니의 무병장수를 위하여!
잔디:(술잔을 들고) 가을이의 영원한 건강과 다가올 사랑을 위하여!
다함께: 건배!
모두 다 즐겁게 잔을 부딪힌 다음 원샷으로 술을 마셨다. (미성년자인 겨울만 빼고)
행복해하는 가을을 보면서 흐뭇해지는 가을부.
겨울: 잔디 언니, 우리 언니 연애할 기미 없어?
잔디: 어? 그게 말이지... (가을 눈치를 본다)
가을: 아직은 없어. 이제 내년을 기대해야지.
겨울: 아깝다. 난 빨리 우리 언니도 잔디 언니처럼 멋진 남친 생김 좋겠는데...
잔디: (겨울 머리 쓰다듬으며) 착하다 우리 겨울이~
가을은 남친이란 말에 저도 모르게 이정을 떠올렸다.
새생명을 얻은 걸 축하한다는 사람 표정이 왜 그리도 미묘했는지 알 수 없었다.
단순히 의례적인 말이었을텐데 무슨 사연이라도 담긴 듯한 그 얼굴이 내내 잊혀지지 않았다.
가을부:(가을 어깨 쓰다듬으며) 가을아, 열심히 살아야한다.
가을:(따듯한 시선으로) 예. 알아요. 아빠.
가을부: 우리 딸. 지금처럼만 하면 돼. 그래야 하늘에 있는 엄마도 기뻐하고, 너한테 심장 준 그 고마운 분도 뿌듯해 할 거야.
가을:(고개 끄덕) 예. 늘 명심하고 있어요.
-납골당-
문을 열고 들어간 이정은 공간을 가득 채운 향냄새에 발걸음을 멈칫했다.
하지만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이정의 손에는 은방울꽃이 들려 있었다.
이정의 발걸음은 은재의 사진앞에서 멈췄다.
이미 가족이 다녀간 듯 다른 꽃다발이 놓여있었다.
이정은 천천히 은방울 꽃다발을 내려놓았다.
이정: 은재야 나 왔어.
네 탄생화 구하느라 좀 늦었어.
환하게 웃는 사진 속 은재가 '어서와'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이정: 있잖아. 나 어쩌면 네 심장을 가진 사람 찾은 거 같아.
사실 네 아버지가 장기기증하겠다고 말씀하실 땐 왜 그리 쉽게 포기하시나 원망했는데...
네가 계속 사는 길이라던 그 말씀 이제는 알 거 같아.
넌 그 사람을 통해 여전히 살아있는 거야..
그래서 기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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