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기억의 주인

[소을 중편] 기억의 주인 7

지혜의 여신 2009. 6. 28. 22:19

 

 

 

-F4 라운지-

 

잔디와 F4가 모여있는 모습이 흡사 주요 발표를 기다리는 분위기.
문이 열리더니 가을이 눈치를 보며 들어왔다.
요즘 들어 유난히 라운지에 올 일이 많다고 생각하는 가을이었지만 잔디는 반갑게 가을을 맞이했다.
재빨리 가을을 자신옆에 앉히는 잔디를 보며 준표는 툴툴거렸다.
이정은 말없이 가을이 앉은 모습을 지켜봤다.

 

우빈: 지후야 이제 가을도 왔으니 약속한 중대발표 해봐.
지후: 다름이 아니고, 이번 주말에 수암문화재단에서 개최하는 신년축하 음악회에 너희 모두 초대하려고.
       (가을 보며) 가을아, 너도 꼭 와야해.
가을:(화들짝) 예? 저까지요?
준표: 너 이번엔 뭐냐? 지휘? 연주?
지후: 피식, 이번엔 연주야.
잔디: 와~ 선배 그럼 뭐 연주하실 거에요?
준표: 그건 왜 묻냐? 어차피 아는 거 하나도 없으면서
잔디:(발끈) 구준표, 나 이래뵈도 이번 학기에 고전 음악의 이해 A 받았거든.
가을:(잔디 팔 잡으면서) 잔디야 제발 진정해.
        (지후보며) 근데 저 꼭 가야해요? 저 입을 옷도 없는데...
지후:(그럴 줄 알았다) 염려마. 내가 벌써 옷 주문해놨어.
잔디:(신나서) 잘됐다. 가을아 우리 같이 보자 응?
준표:(버럭) 잔디밭 너 뭐가 어째?
이정: 금잔디 그건 좀 곤란하겠는데?

 

이정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가을 앞에 서더니 손을 내밀었다.
영문을 몰라 멍하니 이정을 보는 가을.
준표와 잔디, 지후, 우빈은 과거 여성들에게 자주 보여줬던 웃음을 짓는 이정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정:(달콤한 목소리로) 가을양, 이번 음악회에 내 파트너가 되어 주겠어?
가을:(두 눈 동그래지며) 예?

 

준표와 지후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결국 이정이 결심을 굳힌 모양이었다.

 

놀란 토끼가 된 가을과 달리 잔디는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이었다.
우빈은 이정의 마음을 정확히 파악하기 힘들었지만 그래도 은재가 아닌 다른 여자에게 파트너 신청한 게

오랜만이라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다.

 

이정:(눈웃음 치며) 안될까? 가을양이 거절하면 나 혼자 외롭게 가야 하는데.
가을:(황홀감과 당혹감을 함께 느끼며) 저기... 그게...
이정: 지금 이 손 잡아주지 않으면 너무 내가 무안해지지 않겠어?

 

어쩔 줄 몰라하는 가을이 답답한 잔디가 결국 나섰다.

 

잔디: 뭐해 가을아, 얼른 간다고 해!
준표: 야, 잔디밭. (잔디 어깨를 붙잡는다)
우빈:(빙글빙글 웃으며) yo 가을, 대단해. 이정이 파트너 프로포즈를 바로 받아들이지 않은 baby는 아마 너뿐일걸.
가을:(얼굴 빨개져서 고개 끄덕) 예..... 알았어요.
이정:(가을의 손을 잡으며) 승낙해줘서 고마워.
잔디:(신났다) 잘됐다 가을아~

 

이정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가을의 손을 놓아줬다.
가을은 여전히 당황해서 손부채를 하며 얼굴의 열을 식히려 했다.
잔디는 가을의 손을 잡으며 잘됐다는 말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지후는 굳은 표정으로 이정의 어깨를 잡고 구석으로 데려갔다.

 

지후:(속삭이듯) 무슨 생각이야?
이정:(웃으며) 보다시피 파트너 신청.
지후:(심각한 표정) 내 경고 잊지 마라.
이정:(표정변화없이) 알아.
  
우빈은 지후의 표정이 심상치 않아 의아해졌다.
준표의 얼굴을 살펴보니 저 녀석도 뭔가 좀 이상했다.
평소 금잔디를 추가을에게 또 뺏겼다고 투덜거리는 표정이 아니라 어딘가 심각했다.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가 있다고 판단한 우빈, 일단은 상황을 지켜보기로 결심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전개가 이정과 가을에게 펼쳐지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했으니까.
 

-수암 음악당-

 

음악당 앞에서 가을과 이정이 함께 차에서 내렸다.
평소 거의 입지 않는 무릎위 길이의 분홍 미니드레스에 높은 하이힐까지 신은 가을은 긴장되어 미칠 지경이었다.
잔디 손에 이끌려 첨 가보는 고급 살롱에서 마사지에 화장을 하고 머리를 올리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동안 잔디가 이렇게 복잡한 과정을 거쳐 파티에 참석했나 싶어 진심으로 파티를 싫어하는 잔디 맘을 이해했다.

하지만 가장 가을의 맘을 불편하게 만든 건 바로 이정이었다.
어쩌자고 저 사람은 저리도 완벽한 외모에 모든 여인을 홀릴듯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보는지.
나름 꾸민다고 꾸몄지만 이정을 본 순간 자신이 너무 평범하다고 생각하는 가을이었다.
이정은 그런 가을의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우아하게 가을 옆에 서서 팔을 내밀었다.
놀란 표정을 짓는 가을에게 이정은 다정하게 웃어줬다.

 

이정: 뭐해? 팔장을 껴야지?
가을: 예? (당황) 꼭 그래야해요?
이정: 당연하지. 가을양 팔장낄 줄 모르는 거 아니지?
가을: 아니에요.. (살짝 떨면서 겨우 이정의 팔에 자신의 팔을 둘렀다.)
이정: 그럼 이제 들어가볼까?
가을:(또 빨개진 얼굴로) 네...

 

이정과 가을은 나란히 음악당안으로 들어갔다.
여유만만해 보이는 이정과 달리 가을은 불편함과 하늘을 날듯한 기쁨을 동시에 느꼈다.
주변 사람들이 다 자신을 보고 수근거리는 것 같았다.

 

 

대기실에는 이미 준표와 잔디, 우빈, 지후가 도착한 상태였다.
흰 미니드레스를 입은 잔디는 환하게 웃으며 가을을 반겨줬고 지후도 만족스럽게 가을을 보고 미소지었다.
준표는 가을과 이정이 잘 어울린다는 사실에 놀랐고 우빈은 휘파람을 불었다.

 

지후: 역시 예상대로네. 예쁘다 가을아.
우빈: yo 가을, 오늘밤 잔디와 함께 음악회를 평정할 기세인데?
         담엔 내가 파트너 신청할게. 예약했다?
가을:(다시 당황) 예? 우빈 선배...
준표: 뭐 금잔디만큼은 아니지만 꾸며놓으니 너도 꽤 괜찮네.
잔디: 진짜 선남선녀다. 완전 그림이야. 안그래요 선배?
우빈: 동감이다. 정말 보기 좋아 my bro.
준표: 뭐 보기 좋다는 말은 나도 인정.
지후: 그래. 보기 좋네.

 

지후와 준표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이정을 봤다.
그러나 이정은 두 사람의 눈빛 추궁을 못본척했다.
 
이정: 가을양 그럼 이제 슬슬 자리로 올라가볼까?
가을: 예? 예.

 


VIP석에서 우빈, 이정, 가을, 잔디, 준표가 나란히 앉아 음악회를 지켜봤다.
아무래도 연초인 탓에 음악은 대중적이면서도 밝고 유쾌해서 VIP석의 분위기는 밝았다.

 

초롱초롱한 눈으로 음악에 집중한 가을과 잔디와 달리 준표는 가끔씩 이정을 관찰했다.
오늘밤 이정은 나무랄 데 없이 가을을 자상하게 챙겨줬다.
하지만 은재를 대하던 태도보다는 예전 플레이보이 시절에 더 가까웠다.
우빈에게 상의를 해볼까 했지만 어쩐지 심장 이식건을 아는 사람은 적을 수록 좋다는 생각이 들어 혼자서만 속앓이중인 준표였다.
지후도 어쩐지 최근들어 이정을 경계하는 듯해서 혹시 눈치챈 건 아닌지도 불안했다.
하지만 잔디는 친구의 행복한 모습을 보느라 준표의 복잡한 마음을 전혀 몰랐다.
 
쉬는 시간이 끝나고 2부가 시작되자 크림색 정장을 입은 지후가 무대에 등장했다.
곧이어 베토벤의 로망스가 감미롭게 흘러나와 음악당 내부를 휘감았다.
VIP석에서도 감탄사가 작게 터져나왔다.

 

잔디: 정말 지후 선배 예술이다~
가을: 나 지후 선배 연주 처음 듣는데 정말 근사하다.
준표: 당연하지. 자폐증 걸렸을 때도 바이올린 연주만은 계속했던 녀석인데.
가을: 뭐랄까, 지후 선배 연주는 다정한 거 같아요.
         자신이 보는 세계를 다른 사람들에게도 보여주는 느낌이랄까?

 

이정은 확 고개를 돌려 가을을 보다 확신에 찬 표정으로 준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더 이상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가을은 살짝 이정의 얼굴을 살폈다.
조각같은 옆모습에는 처음 도서관에서 봤던 슬픔이 사라졌다.
갑자기 이정은 얼굴을 자신쪽으로 돌리더니 눈이 마주치자 미소를 지어줬다.
그 미소를 본 가을은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지금 이대로 시간이 멈추면 좋겠어.'

 

 

 

-도서관-

 

책을 정리하는 가을에게 잔디가 발걸음을 죽이고 다가갔다.
잔디가 오는 줄도 모르고 가을은 책을 꽂느라 정신이 없었다.
잔디는 갑자기 가을의 팔을 꽉 잡았다.
가을은 순간 놀란 표정을 짓다가 잔디임을 알고 방긋 웃었다.

 

가을: 무슨 일이야?
잔디: 바빠?
가을:(다시 책을 정리하며) 말해.
잔디: 너 있잖아. 이정 선배 아직도 좋아하지?
가을:(손에 책 들고 잔디보며) 잔디야!
잔디: 좋아하는 거 맞구나.
가을:(포기) 그래.
잔디: 신년음악회때 두 사람 진짜 잘 어울렸던 거 알아?
가을:(책 수레 끌고 가며) 다 옷발, 화장발이었지 뭐.
잔디:(가을 따라가며) 아냐, 두 사람 진짜 환상의 커플이었어.
가을: 그날 밤은 그냥 꿈을 꾼 거야.
잔디: 무슨 소리야?
가을: 꿈은 그저 꿈일 뿐이라고.
잔디: 그럼 너 이대로 이정 선배 포기할 거야?
가을:(다음 책장에서 책정리 시작) 포기할 게 어딨어. 처음부터 시작한 것도 아닌데.
잔디: 왜 포기부터 하는 거야?
가을: 그날 이정 선배는 그냥 나한테 친절하게 대해준 거 뿐이야.
         아마 병원에서 먼저 가버린게 미안했던 모양이지.
잔디: 아냐, 이정 선배 널 보던 평소와 눈빛이 달랐어.
가을: 어땠는데?
잔디:(양손으로 머리 감싸며) 그게 참.. 제대로 집어말하긴 힘든데...
        암튼 나름 진지했어.
가을:(양미간 찌뿌리며) 진지?
잔디: 나 옛날 이정선배 플레이보이 시절을 기억해서 아는데,
        그냥 이 여자 저 여자에게 헤프게 미소 날리던 그런 가식적인 친절과는 완전히 달랐다고.
가을:(한숨쉬며) 설령 네 말에 맞다쳐도 이정 선배 아직 상처있잖아.
잔디: 네가 치유해줄 수도 있잖아.
가을:(홱 고개 돌려) 뭐?
잔디: 사랑으로 받은 상처 치유하려면 사랑만큼 좋은 약 없잖아.
가을:(다시 책정리) 그게 왜 하필 난데?
잔디: 너처럼 진심으로 선배 생각해주는 사람 없잖아.
가을: 잔디야 난 선배 잘 몰라.

 

그동안 자신을 바라봤던 이정의 심상치 않은 표정이 생생한 가을이었다.
음악회때는 마치 자신을 진짜 여자친구처럼 자상하게 대해줬지만 도저히 표정을 읽을 수 없어 가을은 그게 더 불안했다.
그런데 잔디는 속편하게 옆에서 적극적으로 다가가라고 조언하니 기가 막혔다.

 

잔디: 차라리 더 잘됐잖아.
가을:(책 수레를 끌고 가다 멈추며) 뭐?
잔디: 지금까지 다른 여자들은 이정 선배 겉모습과 소문만 보고 접근했어.
가을: 근데?
잔디: 넌 아무런 선입견 없이 진심으로 선배에게 다가갈 수 있잖아.
가을: ......
잔디: 어쩜 그래서 선배도 네가 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어.
        최소한 음악회때 이정 선배는 편안해보였어.
        난 너처럼 사람 표정 잘 못읽지만 그건 확실해.

 

이정이 편안해보였던가?
가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기억을 떠올렸다.
적어도 음악회때의 이정은 슬퍼하지도, 놀라지도, 당황하지도, 원망하지도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정말 다정하게 배려해줘서 그 당시만큼은 가을이 더 편안했다.
정말 자신이 다가가도 괜찮은지 여전히 확신이 서지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늘 음악회때처럼만 지낼 수 있다면.....

 

잔디는 망설이는 가을을 보며 답답했다.
착하고 예쁜 가을은 심장병 때문에 어릴 때부터 아무것도 욕심을 내지 않았다.
항상 주변 사람들을 먼저 생각하고 양보만 했다.
사랑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심장이 지나치게 뛰면 생명이 위험해져서 안된다고 웃어넘기던 가을이었다.
겨우 몸이 건강해져 마음놓고 사랑해도 되는 상황이 됐는데, 첫사랑을 제대로 시작도 못하고 포기해버린다면 너무 억울했다.


하필 처음 반한 사람이 소이정이라니, 잔디는 한숨이 나왔다.
고교시절까지는 우빈과 더불어 최고의 플레이보이였지만, 대학생이 된 후에는 차은재란 어릴 적 사랑과의 연애를 시작하면서 이정이 얼마나 진지하게 사랑을 하는지 다 지켜봤었다.
그렇기에 이정이 그 첫사랑을 잃고 미치기 직전까지 갔던 상황을 보며 과연 누가 그를 구제해줄 수 있을지 염려했었다.
하지만 가을이라면 어쩌면 이정을 치유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고 조심스럽게 생각했다.
어쨌든 사랑을 해 본 사람은 사랑없인 살 수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가을은 고개를 흔들고는 다시 책수레를 끌고 다음 책장으로 이동했다.
잔디도 가을을 따라갔다.

 

잔디: 어쨌든 시도조차 안하는건 문제가 있다고 봐.
가을:(책을 꽂아넣으며) 시도라...
잔디: 그래도 처음 반한 사람이잖아. 이대로 물러나면 나중에 후회하지 않겠어?
가을: 후회?
잔디: 너 나보고 뭐라고 했어. 일단 내 맘을 믿고 움직이라고 했잖아.
가을: 너와 난 경우가 달라. 준표 선배랑 너는 서로 좋아했잖아.
잔디: 그래도 나 정말 불안했었어. 늘 언젠가 구준표가 떠나버리지 않을까 항상 조마조마했었어.
가을:(잔디 보며) 그랬었어?
잔디:(고개 끄덕) 네 덕분에 나 겨우 용기낼 수 있었어.
         그러니까 이번엔 네가 용기를 낼 차례라고.
         용감한 자만이 사랑을 쟁취하는 법이라고!
가을:(한참 책정리하다 내뱉듯) 알았어.
잔디:(반색하며) 용기낼 거지?
가을: 어쨌든 감사인사는 해야겠어. 음악회때 너무 신세 많이 졌으니까.
잔디:(실망) 뭐?
가을: 한 번에 하나씩. 지금껏 연애 한 번 못해본 내가 뭘 할 수 있겠니.
잔디:(눈빛 반짝거리며) 어떻게 할 거야?
가을:(여전히 책 정리하며) 이정 선배 도예실 위치 좀 알려줄래?
 


-도예실-

 

이정은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흙덩어리는 이정의 손끝이 닿자 날렵한 꽃병과 투박한 듯한 찻잔, 묵직한 자기로 잇달아 변신했다.
탁자 위 휴대 전화가 전화를 받으라고 울었지만 이정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두 번, 세 번 반복하자 이정도 벨소리를 마침내 들었다.
보통때는 작업중 오는 전화를 무시했지만 어쩐지 지금은 받아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작업을 중단했다.
탁자로 가 전화기를 들여다보니 처음 보는 번호였다.
받을까 말까 망설이다 일단 받아보기로 했다.

 

이정: 소이정입니다.
가을: 안녕하세요.... 저 잔디 친구 추가을이에요.
이정:(놀라서) 그대가 어쩐 일이야?
가을: 저.. 선배 지금 바빠요?
이정: 아니, 지금은 휴식중이야. 왜?
가을:(머뭇거리다) 저기요.. 저번 음악회때 감사인사를 하고 싶어서요.
이정:(의아) 감사?
가을: 저 챙겨주느라 제대로 음악도 즐기지 못하셨잖아요.
이정: 피식, 그런 생각을 했었어? 난 그날 그대 덕분에 즐거웠는데.
가을: 아니에요. 그날 저 정말 폐 많이 끼쳤어요.
이정: 하하 정말 그대는 너무 착해서 탈이군 그래.
가을: 그래서요... 저 선물 준비했는데 언제 드리면 될까요?
이정: 선물?
가을: 네...
이정: 그럼 그대 지금 이쪽으로 올 수 있겠어?
가을: 지금요?
이정: 지금 도서관인가? 그럼 차 보낼테니 도예실로 오라고.
가을:(당황) 아뇨 아뇨. 차는 됐구요 제가 그냥 갈게요.
        위치는 잔디한테 물어볼게요.
이정: 피식, 그럼 그러도록 해.

 

통화를 마친 후 이정은 새빨개진 얼굴로 손사레를 칠 가을의 얼굴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은재도 이정이 차를 보내겠다고 말을 하면 경기를 일으켰었다.
 

한참 후 문이 열리고 가을이 어색해하며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쇼핑백이 들려있었다.
이정은 미소를 지으며 가을을 의자로 안내했다.

 

이정: 어서와. 여기 찾는데 어렵진 않았지?
가을: 예. 알고보니 제가 잘 가는 카페가 근처더라고요.
이정: 혹시 벨기에 정통 와플 가게 말하는 거야?
가을:(반색) 거기 아세요?
이정: 역시. 그대도 단 거 꽤나 좋아하는 모양이네.
가을:(쑥스럽다) 거의 유일한 낙이었거든요.
이정: 앉아.

 

가을은 의자에 앉아 도예실을 둘러봤다.
눈을 돌리는 어디에나 여러 가지 도자기가 가득했다.
감탄하는 가을을 보며 이정은 차를 우려냈다.
차의 향기가 도예실에 은은하게 퍼졌다.
이정은 가을앞에 찻잔을 놓고 차를 따랐다.

 

이정: 자, 일단 차부터 마셔.
가을:(웃으며) 고마워요.
        (향을 맡고는) 와~ 진짜 향기 좋은데요.
이정: 맛도 괜찮을 거야.
가을:(한 모금 마시고 신기해하며) 와~ 하나도 안떫어요. 무슨 차가 이렇게 달아요?

 

은재:(가을과 같은 표정으로) 이정아 정말 신기해. 하나도 안떫어. 무슨 찬데 이렇게 달아?

 

이정: 피식, 그렇게 좋아해주니 기쁜데.
가을:(차를 들여다보며) 이 차 무슨 차에요? 정말 좋은데요.
이정: 베노아티야.
가을: 그럼 이게 그 유명한 영국 왕실 홍차네요. (활짝 웃는다)
이정: 피식, 잘 아네.
  
가을은 긴장을 풀고 즐겁게 홍차를 마셨다.
그런 가을을 보다 이정은 쇼핑백으로 눈을 돌렸다.

 

이정: 그건 내 선물인가?
가을:(상기되어) 예? 예...

 

가을은 찻잔을 내려놓고 떨리는 손으로 이정에게 쇼핑백을 건네주었다.

 

이정:(빙긋 웃으며) 지금 풀어봐도 되는 거지?
가을:(다소 긴장) 예..

 

도넛 모양의 포장을 풀으니 회색 털토시가 나왔다.
한번도 본 적이 없는 형태인 걸 보니 가을이 손수 뜨게질로 만들었다 싶었다.

 

이정: 이거 그대가 직접 뜬 거야?
가을: 예... 저기 겨울이고 해서...

 

가을은 눈이 동그래져서 이정이 즉시 토시를 착용하는 모습을 봤다.
이정은 가을의 놀란 얼굴을 보고는 싱긋 웃어줬다.

 

이정: 잘만들었네. 고마워 가을양.
가을:(반신반의) 정말 괜찮으세요?
이정: 아주 따듯해. 맘에 들어.
가을:(안도하며) 다행이다.

 

가을은 마음놓고 다시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그래서 토시를 바라보는 이정의 표정이 잠시나마 흐려졌던 걸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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