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기억의 주인

[소을 중편] 기억의 주인_에필로그

지혜의 여신 2009. 6. 28. 22:50

 

 

 

-국도-

 

12월의 황량한 풍경이 펼쳐졌다.
햇살이 따스하게 얼어붙은 서울 근방의 변두리를 비춰주고 있지만 눈도 없는 논과 야산은 마치 죽은 것처럼 보였다.
텅빈 길 위에는 이정의 차만 지나가고 있었다.

 

 


-이정의 차안-

 

이정은 가을과 함께 가을이 부탁한 장소로 가기 위해 운전중이었다.
옆에 앉은 가을을 보면 조금은 긴장한 얼굴로 창밖만 열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정:(혼잣말로) 꼭 이러지 않아도 되는 건데...

 

이정의 혼잣말을 들은 가을은 시선을 이정에게로 돌렸다.
자신을 걱정스럽게 보는 이정에게 가을은 방긋 웃어주었다.

 

가을: 괜찮아요. 내가 보고싶어서 그런 건데요 뭐.
이정: 내 맘이 편하지 않아.
가을: 약속했잖아요. 내 두번째 생일 선물로 내 소원 들어주기로.
이정:(한숨) 그래, 약속했지.
가을:(놀리듯) 남자가 한입으로 두말하기에요?

 

생글생글 웃는 가을이 지금은 야속하게 느껴지는 이정이었다.
'이런 부탁을 할 줄 알았다면 그런 약속따위 하지도 않는 거였는데...'

 

가을: 난 정말 만나고 싶었다구요.
이정: 알아, 알았다고~
가을: 그럼 얼굴 좀 펴요. 오빠 계속 그렇게 부루퉁한 표정하고 있음 나도 신경쓰인다구요.
이정: 정말이야?
가을: 당연하잖아요.
이정: 그럼 내 맘 좀 풀어줘.

 

가을은 못말린다는 표정으로 이정을 봤다.
사사건건 애정 표시를 해달라고 조르는 이 사람이 정말 과거에 명성을 떨쳤던 냉혈 카사노바였는지 의심스러웠다.
잔디나 우빈이 종종 "소이정은 고교시절에는 화려했던 플레이보이"라고 말해줬지만 늘 그 말이 진짜인지 믿을 수 없는 가을이었다.
'그냥 나 놀리려고 한 말인 거 같다니깐.'

자신의 부탁으로 마지못해 운전중인 이정에게 조금 미안한 맘도 있고 해서 가을은 그를 달래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가을: 알았어요.

 

이정은 기대에 찬 표정으로 가을을 봤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가을은 이정의 볼에 "쪽"소리를 내며 가볍게 키스를 했다.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이정은 일단 여기에 만족하기로 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순진한 사람이라 예상하긴 했지만 역시 가을은 순수 그 자체였다.
이정이 진도(?)를 나갈려고 할 때마다 늘 얼굴이 빨개져서 화들짝 놀라는 가을때문에 당황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충격받은 가을의 표정을 보노라면 자신이 롤리타 콤플렉스에 빠진 남자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자신이 아니라 잔디에게 더 스스럼없이 달라붙는 가을을 보면서 심기가 상한 적도 많았다.
물론 그 때마다 준표와 협력해서 둘을 떼어내긴 했지만 속앓이를 하는 티도 내지 못해 답답한 이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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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과 정식으로 연인이 되었다고 다른 F4 친구들과 잔디에게 통보했을 때, 잔디는 도끼눈을 하고 이정에게 엄중경고를 했었다.

 

잔디: 가을이가 워낙 선배 좋다고 하니깐 나도 더이상 반대는 안하겠어요.
이정: 피식, 눈물나게 고맙네.
잔디: 하지만 순진무구한 우리 가을이에게 함부로 굴면 절대 안돼요.
이정: 염려안해도 돼.
잔디: 농담 아니에요. 걘 수녀가 되려고 했던 애라구요.
이정:(뜨악) 뭐? 수녀?
잔디: 진짜라니까요. 그러니까 가을이에게 과거 플레이보이 시절 행동 하면 안된다구요.
      그랬다간 순진떼기 가을이 아마 기절해버릴 걸요.
      꼭 정중하게, 신사처럼 행동해야 해요. 알았죠?
이정: 알았어. 명심할게.

 

그 때, 지후가 얄밉게 옆에서 잔디를 거들었던 게 잊혀지지 않았다.

 

지후: 아직도 그 수녀님 가을이를 노리고 있어. 조심하는게 좋을 거야, 소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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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디의 경고가 전혀 과장된 것이 아니었음을 뼈저리게 깨달은 지난 반년이었다.
'천사를 얻은 댓가라 생각해야겠지.'

 

가을은 이정의 표정이 밝아진 것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해보면 자신의 부탁은 정말 이정에게는 무리한 것으니까.
그래도 자신의 부탁을 절대로 거절하지 않는 이정에게 가을은 늘 감사해하고 있었다.
물론 이정이 벌이는 이벤트에 항상 놀라긴 했지만 말이다.
재벌이라 그런지 이벤트의 규모는 늘 가을의 상상을 벗어났었다.
그동안 잔디가 왜 준표 선배의 이벤트에 기겁을 했는지 가을은 진심으로 이해가 되었다.
가을은 지난 9월 자신의 생일날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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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시간이 되자 이정의 전화로 라운지로 왔더니 아무런 설명도 듣지 못한 채 가을은 그대로 끌려가고 말았었다.
차안에서 계속 어디로 가는 거냐고 물었건만, 이정은 묘한 미소를 띤 채 비밀이라는 대답만 해줬다. 
결국 가을은 가는 동안 잠이 들어버렸고, 이정은 목적지에 도착해서야 깨워주었다.

 

이정의 손에 이끌려 처음 보는 숲길을 걸어가다 보니, 생전 처음보는 거대한 로즈마리 꽃밭이 눈앞에 펼쳐졌다.
하늘공원만큼이나 넓다란 들판에는 보랏빛 로즈마리 꽃이 가득 피어있었다.
강렬한 로즈마리 향기에 아찔해진 가을은 잠시 휘청거렸다.
깜짝 놀란 이정이 팔을 뻗어 가을의 등을 감싸주고는 귓가에 바짝 얼굴을 대고 속삭이기 시작했다.

 

이정: 로즈마리 꽃은 잊지 말라는 뜻이에요. 사랑을 잊지 말라는 뜻이죠.

 

가을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이정의 얼굴을 바라봤다.

 

가을: 햄릿에서 오필리아가 한 말이잖아요.

 

이정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가을에게 싱긋 웃어줬다.
그 눈부신 웃음에 가을은 어지러움을 느꼈지만 이정이 자신의 등을 받쳐준 덕분에 계속 서있을 수 있었다.

 

이정: 네 탄생화가 로즈마리라서 정말 다행이야.
가을: 왜요?
이정: 로즈마리는 연인을 위한 꽃이잖아.
      사랑의 정절을 상징한다는 얘기를 읽었을 때 너와 정말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어.
가을:(웃으면서) 나도 그래서 내 탄생화가 좋아요.
이정: 예전의 나였다면 로즈마리가 얼마나 아름답고 훌륭한 꽃인지 몰랐을 거야.
      로즈마리를 꼭 닮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 줄은 정말 몰랐는데...
가을: 내가 이 꽃이랑 닮았어요?
이정: 당신의 존재로 나를 소생시킨다. 이 꽃말처럼 넌 나를 다시 살게 해주었으니까.
가을: 차암, 그만해요. 오빠.

 

부끄러워진 가을은 그만 얼굴이 빨개져서 이정에게서 떨어지려고 했다.
하지만 이정은 가을의 손을 꼭 붙잡았다.

 

이정: 정말 고마워 가을. 내게로 와 줘서... 그리고 날 사랑해줘서...
가을: 오빠...    
이정: 진심으로 생일 축하해.
     
이정은 고개를 숙여 가을에게 키스를 했다.
가을도 눈을 감고 이정의 뜨거운 입술을 받았다.
언제나처럼 이정은 목마른 아이마냥 한없이 가을의 입술을 빨아들였다.
처음 프렌치 키스를 받았을 때엔 놀라서 이정을 밀어냈던 가을도 이제는 적극적으로 화답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이정이 아쉽다는 듯 입술을 떼어 내자 가을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항상 딥키스를 하고 나면 가을은 다리가 후들거렸고, 이정은 그런 가을을 꼭 안아주었다.
한동안 말없이 부족했던 산소를 채운 가을은 고개를 들어 웃으면서 이정을 바라봤다.

 

가을: 이렇게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생일 선물 처음이에요. 정말 고마워요, 오빠.  
이정:(놀리듯) 전공 수업 빼먹어도 괜찮을 만큼?
가을: 네, 이 꽃밭이 전공보다 백만 배는 더 가치있어요.
이정: 다행이네. 로즈마리 꽃 구하느라 좀 애를 먹었는데 네가 이렇게나 좋아해주니 말야.
가을:(놀라서) 네? 여기 원래 로즈마리 꽃밭이 아니었어요?
이정: 천사 아가씨, 여기는 우송의 소유지랍니다.
      도예하는 집안에서 로즈마리를 키울 일이 뭐가 있겠어?
가을:(눈 더 커지고) 그럼?
이정:(고개 끄덕) 널 위해서 여길 네 탄생화 꽃밭으로 만들었어.
가을: 세상에...(말을 잇지 못한다)

 

가을은 감격한 나머지 눈가에 눈물이 핑돌았다.
이정은 다시 고개를 숙여 입술로 가을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가을: 너무 좋은 선물 받아서 뭐라고 감사해야 할 지 모르겠네요.
이정: 이렇게 내 곁에만 있어주면 돼. 그럼 난 더이상 바랄게 없어.

 

그 날 오후 내내 가을과 이정은 로즈마리 꽃밭을 거닐다가 나무 그늘에 앉아서 쉬기를 반복하며 달콤한 시간을 보냈다.
F3와 잔디와 함께 생일파티를 하기로 미리 약속하지 않았다면 아마 한밤중에나 돌아왔을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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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아직도 그 날을 생각하면 행복한 웃음이 저절로 나왔다.
이정은 웃는 가을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좋아졌다.

 

이정: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가을:(이정을 보며) 내 진짜 생일날이 생각났어요.
이정: 그렇게나 좋았던 거야? 벌써 넉달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웃고.
가을: 내 최고의 생일이었으니까요.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 로즈마리 꽃밭이 떠올라요.

 

이정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한 손을 뻗어 가을의 손을 잡았다.
가을도 웃으면서 이정의 손을 맞잡았다.

 

 


-납골당-

 

이정과 가을은 긴장한 표정으로 납골당 안으로 들어왔다.
이정의 손에는 라벤다 꽃다발이 들려있었다.
은재의 사진앞에 멈춘 이정은 약간 흐려진 얼굴로 물끄러미 사진을 바라봤다.
늘 환하게 웃고 있는 은재를 보면서 이정은 미안함을 느꼈다.
가을은 사진 속 은재를 보면서 호기심과 알 수 없는 반가움을 느꼈다.

 

가을:(조심스럽게) 이 사람이... 은재씨?
이정: 응.
가을: 예쁜 사람이네요.
이정: 그래...

 

이정은 말없이 라벤다 꽃다발을 은재의 사진앞에 놓았다.
오전이라 그런지 아직 가족이 오지 않은 것 같았다.

 

가을: 나 인사시켜주지 않을래요?

 

이정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이정: 은재야, 여긴 추가을. 가을아, 이쪽은 차은재.
가을: 반가워요 은재씨.
이정: 날 다시 살게 해준 고마운 사람이야.

 

이정은 반가워하는 가을의 얼굴을 보고는 고개를 돌려 은재의 사진을 봤다.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은재 역시 가을을 반겨주는 것 같았다.
이정은 속으로 은재에게 말을 걸었다.
'은재야, 너도 가을 만나서 반가운 거야?
날 슬픔에서 구해준 사람이라서?
두 번 다시 널 보러올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가을이 꼭 널 만나고 싶다고 했어.
천사같이 착하고 예쁜 사람이니까 너도 이젠 안심할 수 있을 거야.
더이상 나 걱정하지 말고 하늘에서 행복하게 지내.
난 가을이와 이세상에서 행복하게 지낼게...'
 
가을은 평온한 이정의 얼굴을 보고는 조용히 부탁을 했다.

 

가을: 잠시만 나랑 은재씨 둘만 있게 해줄래요?
이정: 왜?
가을:(약하게 웃으며) 여자끼리만 할 얘기가 있어요.

 

이정은 가을의 진지한 얼굴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이고 납골당 밖으로 나갔다.
가을은 문소리가 들리자 다시 은재의 사진을 보고는 어젯밤 내내 생각했던 말을 입밖으로 꺼내기 시작했다.
 
가을:(속삭이듯) 은재씨... 아 언니라고 불러야 할까요?
      나 항상 언니 보고싶었어요.
      이제에야 만나서 기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그러네요...
      사실, 아주 잠깐이지만 언니를 원망했던 적도 있었거든요.
      (잠시 머뭇) 하늘나라에서 우리 엄마 만났나요?
      아마 만났다면 내 얘기 많이 들었겠네요.
      엄마가 좋은 얘기만 해주셔야 할텐데 뭐라고 했을지 좀 걱정되네요.

 

가을은 긴장되서 침을 꼴깍 삼켰다.

 

가을: 나 있잖아요... 부탁이 하나 있어서 이정 오빠한테 만나게 해달라고 졸랐어요.
      나중에, 아주 나중에 이정 오빠와 내가 하늘나라에서 언니 만나게 되면요...
      그럼.. 그 때는 나, 모른 척 피해줄게요. 약속해요.
      그러니까.. 지금 이 세상에서는 내가 이정 오빠 옆에 있으면 안될까요.
      언니도 알잖아요, 이정 오빠 가슴이 상처투성이라는 거.
      그러니까 내가 오빠 상처를 치유하도록 옆에서 도와줄게요.
      언니몫까지 오빠 사랑해줄게요.
      그러니 제발... 이정 오빠 옆에서 기뻐하는 날 부디 용서해줘요.
        
가을은 간절한 눈빛으로 은재의 사진을 바라봤다.

 

 


-F4 라운지-

 

준표와 잔디, 우빈, 지후는 신화와 일심 직원들이 파티 준비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가을의 두 번째 생일을 축하하는 파티였다.
잔디는 감회가 새롭다는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잔디: 작년 오늘은 나랑 가을이네 식구랑 딱 넷이서만 보냈는데.
우빈: 그러게 말야. 우린 이정이 걱정하느라 긴장 잔뜩했고.
준표: 잔디밭 네가 처음으로 파티하자고 제안한 거였는데 1년 후에 이렇게 진짜로 하게 될줄이야.
      참 감회가 새롭다.
지후: 결국 이렇게 될 운명이었던 거지.
잔디: 구준표 그런데 말야, 나 궁금한 게 있는데...
준표: 뭔데?
잔디:(조심스럽게) 가을이가 이식받은 심장... 그거 정말 이정 선배 첫사랑 거야?

 

갑자기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사실 우빈도 늘 알고싶었던 부분이라 저도 모르게 긴장하면서 준표의 답을 기다렸다.
지후는 평소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준표의 얼굴을 바라봤다.
준표는 갑작스러운 침묵이 부담스러운 듯 헛기침을 몇 번 했다.

 

준표: 작년에 이정이가 알려달라고 묻긴 했지만...

 

여섯 개의 눈이 준표에게 고정되었다.

 

준표: 확인 안했어.
잔디, 우빈: (놀란 얼굴로) 왜?
준표: 의미없는 거니까.
잔디: 왜 의미가 없어?
우빈: 혹시라도 맞을까봐 걱정되서 확인안한 게 아니고?

 

지후만이 표정 변화없이 담담히 입을 열었다.

 

지후: 어차피 가을인 처음부터 이정이한테 반했잖아.
      그리고 이정이도 가을에게 끌리고 있었으니까 확인한들 달라지는 건 없었을 거야.
준표: 난 심장 이식받았다고 사랑하는 마음이 따라온다는 말같은 거 안믿어.
잔디: 하지만 심장은 감정이 다 모여있는 곳이잖아.
지후:(덤덤하게) 감정은 뇌에 있어.
      할아버지 말씀이 뇌가 없으면 감정도 없어진다고 하셨어.
우빈: 정말 그런거야? 보통 사랑은 머리가 아니라 심장이 하는 거라고들 하잖아.
준표: 사랑은 영혼의 만남이야. 그깟 장기 하나로 좌지우지 될 정도로 가볍다고 절대 생각 안해.
      내가 지금 당장 심장병을 앓아서 다른 사람 심장을 이식받아도 난 평생 잔디밭만 사랑할 거라고.

 

준표의 자신감넘치는 발언에 지후는 박수를 쳤다.
우빈도 휘파람을 불었다.
잔디는 감격에 겨운 표정으로 준표를 봤다.

 

잔디: 구준표, 네가 지금까지 한 말중에서 지금게 제일 감동적인 거 알아?
준표:(어깨 으쓱) 당연한 말에 뭘 감동씩이나.
잔디: 지금 니 모습 너무너무 멋있어.
준표: 왜, 새삼스럽게 이 구준표님에게 반한 거야?
잔디:(활짝 웃으며) 응, 그런 거 같아.

 

잔디는 발꿈치를 들어 "쪽"소리를 내며 준표의 입술에 가볍게 베이비 키스를 해줬다.
뜻밖의 키스에 준표는 좋아죽겠다는 표정으로 잔디를 덥썩 안더니 바로 진한 딥키스를 돌려줬다.
이 광경을 보고 있는 우빈이 황당해하는 줄도 모르고, 지후가 흐뭇하게 웃는 줄도 모르고 준표와 잔디는 자신들만의 달콤한 세계에 푹 빠져버렸다.

 

우빈:(한숨쉬며) 아무래도 우리 닭으로 만들어버리려고 작심한 거 같지 않냐?
지후:(씩 웃으며) 보기 좋기만 한데.
우빈: 이정이도 일본서 돌아온 후로는 가을이한테 꽉 잡혀 살고... F4가 어쩌다 이렇게 된 거냐... (고개 절래절래 젓고)
지후: 너도 나도 이젠 사랑을 찾을 때가 된 거 같은데.
우빈:(손 휘휘 저으며) 아서라, 저 무수한 baby들을 어떻게 버릴 수 있냐.
지후: 만약 나도 사랑하는 사람 만나면 아마 넌 외롭다고 몸부림치게 될 걸.
우빈:(한쪽 눈썹 올리며) 윤지후, 설마 너도 여자가 생긴 거야?
지후:(여유롭게 웃으며) 아직은 아냐...

 

툴툴거리는 우빈을 보고는 지후는 아직 키스중인 잔디와 준표를 봤다.
'사랑은 확실히 아름다운 거지.'

 

 


한참 시간이 지나 가을과 이정이 도착했다.
F4와 잔디, 가을이 다 모이자 가을의 두 번째 생일 축하 파티가 열렸다.
준표의 선물인 최고급 아이스바인이 모두의 샴페인잔에 채워졌다.
잔디가 자리에서 일어나 건배를 외쳤다.

 

잔디: 우리 소중한 가을이의 두 번째 생일을 축하하는 뜻에서 건배해요.
      가을이의 건강을 위해서.
지후: 가을의 사랑을 위해서.
우빈: 가을의 꿈을 위해서.
준표: 가을의 행복을 위해서.
이정: 가을의 투명한 영혼을 위해서.

 

여섯 개의 샴페인잔이 부딪혔다 떨어졌다.
가을은 감사의 표정으로 모두를 바라봤다.

 

가을: 정말 고마워요. 모두 다...
잔디: 나도 무지무지 행복해. 가을아. 네가 이렇게 건강해지고 사랑하는 사람도 만나고...
가을: 내 친구 금잔디. 늘 내 곁에서 날 지켜줘서 정말 고마워. 사랑해.

 

잔디와 가을이 서로 끌어앉자 준표와 이정의 표정이 즉시 굳었다.
그런 두 사람을 보며 우빈과 지후는 킥킥거렸다.

 

우빈: 워워~ 두 사람 그만 떨어져. 준표와 이정이 또 질투의 불꽃을 날리고 있다고.

 

가을과 잔디는 마지못해 떨어지고는 각각 이정과 준표에게 웃어주었다.
그제서야 표정이 풀어지는 두 남자였다.
우빈은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서 작은 상자를 탁자위에 올려 가을앞으로 밀었다.

 

우빈: 가을, 두 번째 생일 축하해.
가을:(놀라서) 우빈 선배.
잔디: 여기 내 것도 있어.

 

잔디도 작은 상자를 가을 앞에 놓았다.
준표는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이정을 바라봤다.

 

준표: 소이정, 넌 선물 없어?
이정: 난 이미 가을이 소원 들어줬어.
잔디: 소원이오?
가을: 그런 거 있어.

 

가을은 이정을 보며 감사의 미소를 지어주었다.
이정도 가을의 손을 잡고 손등에 키스를 한다음 씩 웃어주었다.
그 모습에 우빈은 황급히 고개를 돌려 지후를 바라봤다.

 

우빈: 지후 너는?
지후: 난 음악 선물.

 

지후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바이올린을 꺼냈다.
가을은 기대에 찬 표정으로 지후를 봤다.
잠시 튜닝을 하더니 곧 지후의 감미로운 연주가 F4 라운지를 채웠다.
가을은 물론이고 나머지 사람들도 모두 지후의 연주에 빠져들었다.       
Secret garden의 "Serenade to Spring"이 끝나자 가을은 가장 열렬하게 박수를 쳤다.

 

가을: 오빠 정말 고마워요.
지후:(자상하게 웃으며) 생일 축하해. 내 동생.

 

지후가 가을의 머리를 쓰다듬는 모습에 이정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지은 죄도 있어 늘 지후에게 약점잡힌 기분인데다, 의남매랍시고 가을과 지후가 너무 다정하게 지내는 모습을 볼 때마다 신경질이 은근히 나는 이정이었다.   
물론 가을에게 불평을 할 수는 없었다.
예전에 지후와 너무 가깝게 지내지 않냐고 툴툴댔다가 가을이 못믿겠다는 표정으로 어떻게 그런 의심을 할 수 있냐는 타박을 들은 터였다.

 

우빈: 무슨 곡이냐? 아주 좋은데.
지후: Serenade to Spring.
준표: 봄의 세레나데라 괜찮네. 이 정도라면 내가 피아노로 칠 수 있을 거 같은데.
가을: 근데 재미있는 건요, 우리나라 노래 제목은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라는 거에요.
잔디:(의아) 봄을 찬양하는 노래에 웬 10월?
이정: 모르지, 우리나라 사람들이 봄보다 가을을 더 좋아해서 그러는 건지도.

 

이정은 가을을 향해 의미심장하게 웃음을 지었다.
가을은 약간 얼굴이 상기되어 수줍은 미소를 이정에게 지어주었다.

 

잔디: 암튼 가을이 네가 흥얼거리던 노래의 원곡이 이거였구나..  
우빈: 정말이야? 가을 너 이 노래 알아?
가을:(얼떨결에) 예? 예...
이정: 뭐야, 가을 너 나한테는 한 번도 노래 안불러주고 금잔디한테만 노래 불러준 거야?
가을:(당황) 이정 오빠, 그런게 아니구요...
지후: 그럼 지금 불러볼래? 내가 같이 연주해줄게.
우빈: Wow, 윤지후 네가 자진해서 반주를 해주겠다니 정말 보기 드문 광경이다.
잔디:(박수치며) 와~ 지금부터 추가을양의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를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가을:(얼굴 빨개져서) 잔디야!
이정: 가을아, 날 위해 불러줄 수 있지?

 

이정의 기대에 찬 눈빛을 보자니 가을은 도저히 싫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울상이 되어 지후를 봤지만 이미 지후는 다시 바이올린을 꺼내 튜닝을 하고 있었다.

 

가을:(두 손 모아 비는 자세로) 저 그럼 부를게요.. 끝난 담에 돌만 던지지 마세요.
준표: 알았어, 부르기나 해 봐.

 

모두 다 호기심 어린 얼굴로 가을을 바라봤다.
가을은 지후와 눈빛을 교환한 후 고개를 끄덕였다.
지후가 연주를 시작하자 가을은 눈을 감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가을의 맑은 목소리와 지후의 바이올린이 조화를 이루어 듣는 사람들의 귀에 감미롭게 맴돌았다.

 


눈을 뜨기 힘든 가을보다 높은 저 하늘이 기분 좋아
휴일 아침이면 나를 깨운 전화 오늘은 어디서 무얼 할까
창밖에 앉은 바람 한 점에도 사랑은 가득한 걸
널 만난 세상 더는 소원 없어 바램은 죄가 될 테니까

 

가끔 두려워져 지난밤 꿈처럼 사라질까 기도해
매일 너를 보고 너의 손을 잡고 내 곁에 있는 너를 확인해
창밖에 앉은 바람 한점에도 사랑은 가득한 걸
널 만난 세상 더는 소원 없어 바램은 죄가 될 테니까

 

사랑하는 이유 꿈을 꾸는 이유 모두가 너라는 걸
네가 있는 세상 살아가는 동안 더 좋은 것은 없을거야
12월 어느 멋진 날에

 


가을의 노래가 끝나자 F4 라운지는 박수와 환성이 가득찼다.
얼굴이 상기된 가을은 재빨리 자리에 앉아 손부채로 열을 식혔다.
이정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그런 가을의 어깨에 팔을 둘러줬다.

 

이정: 정말 근사해. 노래부르는 모습 보니까 정말 천사같아.
가을:(안도하며) 정말요?
이정: 담에는 노래하는 천사상을 만들어야겠는데.

 

생긋 웃는 가을의 이마에 이정은 재빨리 키스를 했다.

 

이정: 이건 노래 잘불렀다는 상이야.
가을:(환하게 웃으며) 오빠가 좋아해주니 기뻐요.

 

두 사람의 애정행각에도 찬사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우빈:(완전 흥분) wow 가을 정말 대단해~ 가수 뺨치는데~
준표:(이정을 부럽다는 듯 보다) 잔디밭, 너도 한번 저렇게 노래 불러주라.
잔디:(황당) 됐거든! 나중에 뭔 소리 들으려고.
준표: 누가 청중앞에서 부르래? 우리 둘만 있을 때 불러달라고~
잔디: 아 안돼~ (손사레를 친다)
지후:(자리에 앉으며) 진지하게 제의하는 건데, 가을아 지금이라도 성악공부하는게 어때?
가을:(화들짝) 예? 제가요?

 

모두 다 지후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음악적으로는 항상 진지했던 지후였기에 놀라움의 정도가 더 컸다.
지후의 표정은 평소와 똑같았다.

 

지후: 응. 소프라노 하라는게 아니라 크로스오버쪽으로.
잔디:(금새 흥분) 그거 멋있겠다. 우리 가을이가 사라 브라이트만같은 가수가 되면...
이정:(말자른다) 절대 안되지.

 

모두 의외다 싶은 표정으로 이정의 얼굴을 봤다.

 

우빈: 왜?
이정: 다른 놈들이 가을이 넋나간 표정으로 보는거 상상도 하기 싫거든.
     
곳곳에서 야유가 터져나왔다.

 

우빈: 이정, 너마저 닭털 날리는 거냐. (두 팔을 비비기 시작한다)
잔디:(기막혀서) 선배~ 너무해요.
준표: 너무 하긴 뭐가! 난 이정이 말에 찬성.
      나라도 남자들이 잔디밭 너한테 홀딱 반했다는 표정으로 보면 속뒤집히지.
지후: 가을아 정말 잘 생각해 봐.
이정:(지후를 노려보며) 윤지후 너!
가을:(어색하게 웃으며) 아하하 진정하세요~

 

가을은 또 이정과 지후가 충돌할까 싶어 재빨리 이정의 손을 잡았다.
이정은 가을을 보며 심각한 표정으로 질문을 했다.
 
이정: 솔직하게 말해봐, 가을아 너 정말 제대로 노래 배우고 싶어? 
가을:(재빨리) 물론 아니죠. 내 꿈은 도서관 사서라고요.
잔디: 아깝다 가을아~
준표: 어허, 잔디밭 그만해. 괜히 부스럼 만들지나 말라고.
우빈: 긁어 부스럼이겠지.   
준표:(버럭) 그게 그거지!

 

잔디는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준표를 보다가 문득 생각이 난 듯 가을을 봤다.

 

잔디: 참, 그런데 가을아, 아까 왜 12월 어느 멋진 날이라고 불렀어? 원래 10월 아냐?
가을: 지금은 12월이니까.

 

가을과 이정은 마주 잡은 손을 깍지끼면서 서로 마주보고 웃었다.
라운지를 비추는 겨울햇살만큼이나 환하고 따듯한 웃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