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경아의 장미정원을 다시 보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모든 한국 로코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불굴의 긍정 소녀 캔디가 환상이라면 장미정원에 나오는 시에나는 현실이 아닐까 하고.
장미정원 여주인공 시에나는 떠돌이 화가 아버지가 죽으면서 맡긴 옛사랑 부잣집 안주인의 집에서 하녀로 자라난다.
주인 아들 유진과 사랑하는 사이였으나 유진은 너무나 연약하지만 진심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정혼녀를 뿌리치지 못하는 착한 남자였다
정혼녀에게 널 싫어하지 않는다고 말하고는 그러나 사랑하지도 않는다라고 속으로 생각한다.
이런 우유부단한 남자같으니!!
그러다 결국 약혼식 직전 시에나에게 도망가자고 애원을 한다.
그러나 시에나는 떳떳하게 살고 싶다며 유진의 친구와 결혼해 떠나버린다.
생각해보면 유진의 친구도 이해가 안간다.. 시에나가 유진을 사랑하는 거 뻔히 알면서 청혼하는건 대체 뭔 근거없는 자신감인건지...
만화책 1권은 시에나와 유진의 선택으로 끝이 나고 여기까지는 만화잡지에 연재한 분량이었다.
그 때까지의 소감은 캔디와 다르구나..였다.
캔디와 알버트라면 어떻게든 사랑을 쟁취할 텐데 시에나와 유진은 훨씬 현실적이고 생각이 많았다.
시에나는 콤플렉스 혹은 낮은 자존감을 해결 못했고, 유진은 그런 시에나를 구원해주지 못했다.
그래서 보편적인 해피엔딩이 아닌 너무나도 현실적인 이별이 가슴에 와 닿았더랬다
그러나 알고 보니 2, 3권이 나중에 단행본으로 나왔다!
2권은 시에나와 유진의 아이들의 이야기지만 둘의 비극적인 결혼 생활도 회상 형식으로 보여준다.
유진은 사랑을 잃은 절망으로 폐인이 되어버려 집안까지 몰락시켰다. 이럴거면 왜 결혼했는지 --;
시에나 역시 남편을 사랑하지 못해 억지로 첫날밤을 보낸 후 딸을 낳았으나 남편을 쏙 닮은 딸을 사랑하지 못한다.
시에나의 남편과 남편의 친구이자 여동생의 약혼자 역시 시에나와 사랑에 빠지는데, 둘 다 죄책감에 1차대전에 참전, 전사하고 만다.
시에나와 딸 앨리스가 사는 마을에 유진의 아들 말론이 오는데 운명처럼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시에나는 두 사람의 결혼을 반대하고 말론과 앨리스는 다른 도시로 함께 떠나버린다.
일반적으로 이렇게 진행이 된다면 말론과 앨리스는 다른 도시에서 헤어져버린 부모몫까지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게 정석인데...
2권의 끝은 시에나를 닮은 어린 손녀가 시에나의 앞에 나타나고 손녀를 입양한 이웃집 부부가 말론과 앨리스의 죽음을 알려주는 장면으로 끝났던 걸로 기억한다.
헤어진 부모와 달리 자식들은 결혼까지 했건만 별로 행복하지 못하다니 정말 보통 만화책과 너무 다른 전개였다.
3권은 시에나의 손녀 코니의 이야기다.
그러나 말론과 앨리스의 아픈 사연도 살짝 보여준다.
말론은 2차대전에 참전했다 실종됐고 앨리스는 딸을 낳은 후 죽고 말았다.
둘 사이에는 아들도 있었지만 죽었다고 했다.. 편지글로 봐서는 아마 가난해서가 아닐까 싶다.
코니는 이웃집 부부가 입양해서 키웠으나 두 사람이 네팔로 떠나면서 할머니인 시에나에게 맡겨버리고 만다.
코니는 열살이나 더 많은 이웃집 화가를 짝사랑하다 매우 위험한 시도까지 해버린다.
다행히 목숨은 건졌고 그런 코니를 간호하던 시에나는 뒤늦게 냉담한 자신의 태도에 딸 앨리스가 얼마나 상처받았았지 깨닫게 된다.
다행히도 코니는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머리를 싹둑 자른 다음 이웃집 화가에게 이별인사를 하고 대학으로 떠나버린다.
그리고 이웃집 화가 역시 코니를 사랑하고 있음을 감지한 시에나는 사연이 있어 은둔중인 이웃집 화가에게 세상으로 나가라고, 코니에게 다가가라고 충고한다.
세월은 흘러 코니는 결국 이웃집 화가와 결혼하고 유망한 화가 부부로서 행복하게 살아간다.
시에나는 옛날 아버지가 그렸던 옛사랑의 초상화를 코니에게서 선물로 받고 추억에 잠긴다.
뒤늦은 깨달음과 회한속에 평생 가꾸었던 푸른 장미 정원을 바라보는 것으로 만화는 끝난다.
시에나는 어린 시절 떠돌이 화가인 아버지와 함께 춥고 배고픈 유랑 생활을 했고, 그 다음에는 하녀로 자랐기 때문에 자존감이 낮았던 것 같다.
게다가 남편인 유진의 친구와도 결혼 생활을 제대로 못하고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억지로 첫날밤을 보내 남편을 용서하지 못하고 살았다.
그 미움을 버리지 못해 결국 남편을 닮은 딸마저 사랑하지 못하고 외롭게 살았다.
그리고 딸인 앨리스는 그런 어머니 시에나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해 늘 주눅든 채로 살았다.
그 결과 두 사람의 사랑은 비극으로 끝나버렸다.
그러나 손녀 코니는 양부모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했지만 할머니 시에나에게서 꼭 필요한 순간에 위로를 받았기에, 또한 자신의 재능을 알아봐준 친구를 만났기 때문에 실연의 상처를 딛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리고 결과는 사랑과 성공을 모두 거머쥔 해피엔딩이다.
30대까지는 이루지 못한 사랑에 절망하는 우울한 청춘들을 보면서 사랑을 부정적으로 봤더랬다.
하지만 지금은 사랑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 이 만화를 통해 배웠다.
먼저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면, 그럼으로서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언제든 자신을 똑바로 세울 수 있는 신념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 소중한 사람을 사랑할 수 있고, 자신의 미래에도 의심없는 확신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잘못을 용서할 줄 알고 잊을 수 있는 너그러움이 있어야 한다.
"추억은 추억일 뿐
과거는 그대로 아름다워야 하는 것
무리하게 붙잡고 놓지 않은 건 무얼 바래서였을까......
장미정원......
언제나 그 향기도 빛도 예전의 것은 아니었을텐데
난 지금까지 그 속에서 과거만을 찾았네
그저 간직했어야만 했을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를......
이제는 보내야지
매번 다른 꽃을 피우기 위해 꽃잎을 떨구는 장미처럼......"
시에나의 마지막 독백이 가슴에 와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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