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기억의 주인

[소을 중편] 기억의 주인 10

지혜의 여신 2009. 6. 28. 22:22

 

 

 

-도예실-

 

이정은 작업을 끝낸 다기를 모두 가마에 넣고 홀가분한 표정을 지었다.
요새는 새로운 영감이 많이 떠올라 작업이 즐거웠다.
슬슬 전시회 일정을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었다.

 

이정은 탁자위에 놓인 초청장을 다시 집어들었다.
일본 교토에서 4월에 전시회를 하고 싶다는 정중한 초대 내용에 수락 여부를 놓고 고민이었다.
현재 작업중인 작품만으로 전시회를 할 수 있을지가 관건이었다.
이 문제로 한참 생각에 빠져있느라 이정은 지후가 들어오는 줄도 몰랐다.

 

지후: 어디서 전시하재?

 

평소처럼 무표정한 지후의 얼굴을 보며 이정은 저도 모르게 긴장감이 생겼다.

 

이정: 교토.
지후:(의자에 앉으며) 언제 하는데?
이정: 4월 초야.
지후: 아깝네. 3월이면 벚꽃이 한창일텐데.
이정: 왜? 설마 따라오려고?
지후: 가을이 데려가면 좋잖아.
이정:(기막혀서) 너 정말...
지후:(말자르며) 가을이 오빠로서 이런 말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보는데.
      말 안했나? 나랑 가을이랑 의남매하기로 했어.
이정:(경악했지만 티내지 않고) 언제부터?
지후: 저번에 같이 보드타러 갔을 때.
이정: 너 정말 가을양 여동생으로만 보는 거 맞아?
지후:(씩 웃으며) 뭐야 소이정, 설마 나랑 경쟁할까 겁나는 거야?
이정: 넌 속에 뭐가 들어있는지 모를 놈이니까.
지후: 그런 걱정은 안해도 돼.
     (눈빛 날카로워지며) 하지만 넌 못믿어. 이젠 가을이가 은재의 심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할테니까.
이정: ! (눈빛이 흔들린다)
지후: 그 날 이후 갑자기 가을이에게 친절해진 건 그래서지?
이정:(무표정하게) 만약 그렇다면?

 

지후와 이정의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옆에서 보기엔 도저히 유치원 시절부터 친구사이라고 믿기 힘든 분위기였다.
고등학교 시절 잔디 문제로 이정이 지후를 다그치던 때와 비슷했다.

 

지후: 가을이는 진심이야.
이정: 무슨 얘기 했던 거야?
지후: 네가 진심이 아니어도 괜찮겠냐고 물어봤지.
이정: 오빠로서의 권리라고 주장할 거냐?
지후: 두 사람 모두를 위해서야.
이정: 못믿겠는데.
지후: 가을인 상관없다고 했어. 그렇게나 맑은 눈으로 널 아주 많이 좋아하니까 너에게 도움이 되고 싶을 뿐이라고 말을 하니 나도 할 말이 없더라고.

 

이정은 뜻밖의 말에 놀랐다.
가을의 마음이 자신에게 기울었으리라고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그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

 

지후: 전에 분명히 경고했지? 가을이는 너같은 이기주의자도 무조건 감싸줄 정도로 진심으로 널 생각하는 애야.
      그런 가을이 은재 대용품으로 대하다 상처주면 난 절대 너 용서안할 거다.
이정: 가을양 맘까지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건 아냐.
지후: 준표가 예전에 잔디 맘 아프게 했지만 적어도 그 때 준표는 잔디를 지켜주려고 했었어. 근데 넌 뭐냐?

 

이정은 지후의 물음에 아무 답도 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자꾸만 은재를 떠올리게 만드는 가을이 불편했고, 지금은 은재 대신 자신의 곁에 가을이 있는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가을의 새 심장은 은재 것이니까 가을과 함께 은재가 살아있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지후는 이정의 마음을 꿰뚫어본 듯 일격을 날렸다.

 

지후: 설사 은재의 심장을 가을이가 이식받았다 해도, 가을이의 마음이 은재의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마라.
      죽은 차은재의 심장이 아니라 추가을 그 애 자체가 소이정을 좋아하는 거야. 

 

지후의 말이 주먹처럼 이정의 가슴을 때렸다.
지금까지 단 한번도 생각한 적 없던 일이었다.
이정의 얼굴은 평소의 포커 페이스가 깨지고 충격을 드러냈다.
지후는 그런 이정의 표정을 보고 쐐기를 박으려는 듯 덧붙였다.

 

지후: 이제부터 두 사람의 관계는 네 손에 달렸어.
      너만 바라보는 가을이 불쌍하면 빨리 정리해. 그게 가을이에게 상처를 덜 주는 거야.
      아니면 지금부터라도 진지하게 교제를 고려하던가.

 

지후는 이정의 얼굴을 쏘아보고는 지체없이 도예실을 나갔다.
남은 이정만이 지후가 던진 말의 충격에 휩쌓여 가만히 있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문고리에 걸어놓은 빨간 복주머니가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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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환하게 웃으며) 선배,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스키장에 다녀오고 일주일 후, 두 사람은 함께 뮤지컬을 보고 난 후 도예실로 왔었다. 
이정이 차를 내오자 가을은 약간 머뭇거렸지만 홍조를 띄며 복주머니를 내밀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복(福)자를 아주 정성스럽게 수놓았음을 알 수 있었다.
정성스러운 선물을 계속 받게 되어 이정은 고맙기도 하고 약간은 미안한 마음도 같이 들었다.
 
이정: 또 그대가 직접 만든 건가?
가을:(웃음 사라지고) 예... 맘에 안드세요?
이정:(장난스럽게 웃으며) 늘 정성이 넘치는 선물 받으니깐 미안해서 말야.
가을:(안도의 한숨) 하아~ 선배 그거 별로 오래 걸린 거 아니에요.
이정: 일주일?
가을:(얼굴 빨개지며) 아니라니깐요. 저 구해준 거랑 비교하면 진짜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정: 구하다니? 아~ 스노우 보드?
가을:(고개 끄덕) 정말 선배 아니었음 저 분명히 출혈 발생해서 또 병원가고 난리났을 거에요.
이정: 보드 가르쳐주겠다는 제안만 안했어도 그대를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하지 않았겠지.
가을: 아니에요. 제가 괜히 의욕만 앞서서 일 벌인거에요.

 

가을은 그 당시를 떠올리는지 풀이 완전히 죽어버렸다.
그런 가을도 달랠겸 화제를 돌리기 위해 이정은 복주머니의 내용물을 확인했다.
말린 꽃과 이파리가 가득찬 복주머니의 속은 좋은 향이 가득했다.
내음을 맡으며 미소짓는 이정을 보고 가을의 눈빛은 기대로 가득했다.

 

가을: 향 괜찮아요?
이정:(가을에게 웃어주며) 응. 아주 좋은데.
가을:(웃으면서) 다행이다. 다 집에서 키우는 화초 말린 거에요.
이정: 허브를 직접 키우는 모양이지?
가을: 아무래도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았으니까요.
      지금은 로즈마리랑 바질, 레몬밤, 라벤다, 제라늄을 키우고 있어요.      
이정: 피식, 다양하게도 키운다.
가을: 다 효과가 다르거든요. 선배도 화분 하나 드릴까요?
이정: 고맙지만 됐어. 난 그대가 준 복주머니에서 나는 향만으로 충분해.
가을: 그럼 나중에 향이 옅어지면 말해요. 내용물 새로 넣어드릴게요.
이정: 알았어. 고마워.
가을:(진지한 표정) 꼭 말해야 해요. 빈말 아니에요.
이정: 피식, 알았다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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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네 얼굴은 정말 반짝반짝 빛이 났어.'

자신에게 무언가를 해줄 수 있음에 진심으로 기뻐하던 가을의 얼굴이 기억에 남았다.
그 웃음이 자신의 본심을 알고 난 후에도 계속될까.
아마 힘들 거라고 생각하니 어딘지 모르게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아직 자신에게는 가을이 필요했다.
은재의 심장을 갖고 있는 가을이.

 

'윤지후, 네가 아무리 화를 내도 어쩔 수 없어.
은재는 내 심장인걸.
세상에 심장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잖아.'

 

 


-가을의 집-     
 
잔디와 가을은 부엌에서 열심히 초콜렛을 만드느라 정신이 없었다.
가을은 종종 잔디에게 잔소리를 했고, 그 때마다 잔디는 허둥지둥 조치를 취하느라 바빴다.
결국 한참 시간이 지나 두 사람은 일을 끝내고 찻잔을 손에 쥔 채로 거실에 앉았다.
부엌은 잔디가 어지른 흔적이 가득했다.
 
가을: 잔디야, 너 이거 한두번 만드는 거 아니잖아. (딱하다는 표정)
잔디: 그냥 예전처럼 구준표 얼굴이나 만들 걸 그랬어. (한숨)
가을: 아냐, 그래도 네 말이 일리는 있어. 늘 똑같은 거 주면 식상할 거야.
잔디: 내가 뭐 저처럼 재벌도 아니고... 아이디어로 승부하는 수밖에 없으니깐.
가을: 그래도 마지막건 예쁘게 잘 나왔으니까 준표 선배가 좋아할 걸.
잔디: 그래야지. 어쨌든 세상에서 하나뿐인 금잔디표 초콜렛이니까 뭐라고 군시렁대면 바로 회수할 거야.
      그래도.. 너처럼 척척 잘 만들면 좋겠다.   
가을: 얘는 별 소리를 다 한다니깐. (어색하게 웃는다)
잔디: 아냐, 네 거 정말 예뻐. 분명히 이정 선배가 좋아할 걸.
가을: 그럼 다행이고.

 

수줍게 웃는 가을의 얼굴을 보며 잔디는 뿌듯함을 느꼈다.
이정과 데이트를 거듭하면서 가을은 점점 예뻐지고 밝아졌다.
부디 이정이 빨리 은재를 잊고 가을만을 보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요즘이었다.

 

잔디: 이번 발렌타인 데이때 뭐 특별한 계획 있어?
가을: 글쎄... 평일이라서.. 그냥 초콜렛 주고 밥이나 같이 하고 말겠지? (고개 갸웃)
잔디: 뭐야~ 둘 다 진도 좀 나가야지.
가을:(빙긋 웃으며) 나 혼자서만 좋아하는 건데 뭐..
잔디: 왜 너만 좋아해? 내가 보기엔 이정 선배도 진지한데.
     (가을의 은방울꽃 무늬 잔을 보며) 지금 그 잔도 이정 선배가 만들어준 거잖아.
      난 지금까지 선배한테 차얻어마신 적은 있어도 찻잔 하나 받은 적 없다고.
가을: 너 이정 선배한테 선물준 적이 없잖아. 가는 정이 있어야 오는 정도 있는 법이라고.
잔디:(답답) 그게 아니라니깐. 너 왜 그렇게 소극적으로 구는 거야. 
 
아무것도 모르는 잔디에게 가을은 진실을 말할까 잠시 고민을 했지만 결국 아무 말없이 차만 더 마셨다.
잔디가 안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다 늘 자신을 걱정하는 잔디에게 근심거리만 하나 더 안길 뿐이었다.
지후에게는 더 이상 바라는 게 없다고 자신있게 말했지만 그래도 내심 가을은 이정이 저 초콜렛을 기쁘게 받아주길 바랬다.
 

 

 

-와인바-
 
저녁 식사를 마친 이정과 가을은 야경을 바라보며 주문한 와인을 기다렸다.
가을은 야경에 감탄하는 척했지만 이정의 눈에는 긴장해서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이 귀엽게 보였다.
가을의 손에 들려있는 예쁜 분홍 종이 가방이 눈에 띄었지만 계속 못본 체 하는 중이었다.

 

이정: 세 잔을 주문해야 하는 거 아니었나?
가을: 예? (이정의 말뜻 깨닫고 웃으며) 선배도 참...

 

가을은 잔디에게 대하듯 어깨를 툭 치려다 정신을 차렸다.
이정은 그런 가을을 보며 좀 더 편안하게 대해도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정: 오늘은 어머님께 보고 안해?
가을: 이따가 집에서 할 거에요.
이정: 이런, 어머님이 삐지시겠는데.. 발렌타인 데이에 이런 미남과 함께 근사한 곳에 왔는데 즉시 보고도 안했다고.. (장난스럽게 입꼬리가 올라간다)
가을: 선배~ 정말 짖궃어요.. (환하게 웃는다)

 

곧 웨이터가 두 사람 앞에 와인잔을 내려놓고 갔다.
서로의 잔을 부딪힌 후 가을은 결심한 듯 천천히 종이 가방을 이정앞에 올려 놓았다.
이정은 짐작했다는 듯 가을에게 웃으며 질문했다.

 

이정: 이거 그대가 직접 만든 거야?
가을:(수줍어하며) 예... 아마 먹을만 할거에요...

 

이정은 조심스럽게 가방에서 상자를 꺼냈다.
하트 모양의 상자를 예쁘게 묶은 리본을 풀고 덮게를 열자 장미 꽃무늬가 새겨진 하트 초콜렛이 나왔다.
가을이 정성스럽게 만든 초콜렛을 보면서 이정은 자신도 모르게 과거를 떠올렸다.

 


은재: 소이정, 이거 내가 직접 만든 거니까 군소리 말고 다 먹어야 해.

 

툭툭 내뱉는 말투였지만 이정은 은재가 은근히 걱정을 하고 있음을 알았다.

 

이정:(장난기 어린 웃음) 염려 마. 숯덩어리라고 해도 다 먹어줄게.
은재:(버럭) 야!

 

포장을 풀자 도자기로 만든 보석 상자가 나왔다.
뚜껑을 열어보니 조그만 도자기 모양의 초콜렛이 가득 담겨 있었다.

 

이정: 이왕이면 하트로 만들지.
은재: 하트는 낯간지러워서 죽어도 못해.
이정: 그래도 담엔 하트로 만들어 줘.
은재: 너 자꾸 하트 타령하면 그거 도로 가져간다.
이정: 알았어. 알았다니깐.

 

이정은 재빨리 초콜렛 상자를 집어들고는 은재가 만든 초콜렛 하나를 입에 넣었다.
은재는 걱정스럽게 이정을 바라봤다.

 

은재: 맛 어때?
이정: 달달하니 먹을 만 하네. 설탕을 얼마나 넣은 거야?
은재:(안도하며) 너 도자기 만드느라 피곤할 때마다 하나씩 먹으라고.     

 


은재는 다음 해에도 도자기 초콜렛을 선물했다.
소이정에겐 역시 도자기가 가장 잘 어울린다고 우기던 은재에게 내심 서운해했던 이정이었다.
그런데 가을은 은재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아름다운 하트 모양의 초콜렛을 만들어주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가을:(이정의 눈치보며) 맘에... 안들어요?
이정:(가을에게 특유의 웃음 지으며) 너무 예뻐서 먹을 수나 있을까 고민하는 중이었어.
가을:(웃으면서) 별 거 아니에요. 그냥 먹음 되요.
이정: 어지간한 초콜라띠에도 이렇게 예쁘게 만들지 못하겠는데. 정말 그대 운동신경은 나빠도 손재주는 훌륭한 걸.
가을: 그거 칭찬 맞죠?
이정: 당연하지. 정말 고마워 가을양.

 

가을은 이정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한 것을 보며 은재와의 추억을 떠올렸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마 은재도 이정에게 초콜렛을 만들어줬으리라.
자신이 만든 것과 은재가 만든 것 중 어느 게 더 마음에 들지 신경쓰였다.
분명 눈앞의 이정은 자신이 만든 것이 예쁘다고 칭찬해주는데 자꾸만 은재와 비교하게 되는 자신에게 조금 실망했다.
가을은 안나 수녀의 충고를 떠올리며 이정에게 집중하려고 애썼다.
다행히도 이정은 가을의 표정이 잠시 흐려진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도예실-

 

겨울비가 세차게 내리는 오후, 이정과 가을은 도예실로 들어왔다.
가을은 이정의 도예실에 오는 것이 좋았다.
여러 가지 도자기가 가득한 게 풍족한 보물창고에 오는 기분이었다.

이정은 그런 가을을 보다 부엌으로 들어가 차를 끓였다.
익숙한 차향기에 가을도 도자기에서 눈을 떼고 카운터앞 의자에 앉았다.

 

가을: 참 신기해요. 비가 오면 여기 흙냄새가 더 강해지는 거 같아요.
이정: 강해지는 거 같은게 아니라 정말 그래. 나도 그래서 비올 땐 여기가 제일 좋아.
가을: 좋겠어요. 이런 멋진 작업실도 있고.
이정: 피식, 그대는 별 걸 다 부러워한다니깐.
가을: 사진 현상실은 아주 답답해요. 빛이 들어오면 안되니깐 캄캄하고 공기도 탁하고 약품 냄새도 나고...
이정: 그대는 사진 찍는 것만 좋아하는 거 같은데.
가을: 맞아요. 그래서 프로 사진가는 꿈도 안꾼다니까요 큭.

 

가을은 방긋 웃고는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그런 가을을 보고 이정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정: 잠시만 기다려.
가을: 예? 예...

 

이정은 2층으로 올라갔다.
계단을 올라가는 발소리가 없어지자 가을은 발꿈치를 들고 조용히 부엌에 들어갔다.
항상 이정이 여기에서 차를 끓인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기분이 야릇했다.
꼭 금단의 영역에 몰래 들어온 이방인 같으면서도 설레이는 마음은 가실 줄 몰랐다.
이정이 오기 전에 빨리 나와야한다는 걸 알았지만 눈은 자신도 모르게 부엌을 훑어봤다.
이정 성격답게 주방은 깔끔하고 정갈했다.
'역시 이정 선배'라고 생각하며 나오려던 찰나, 바닥에 떨어진 책이 눈에 띄었다.
정리하고픈 마음에 책을 주워들어 제목을 읽은 순간 가을의 표정이 굳어버렸다.

 

"하트의 역사: 마음과 심장의 문화사"

 

가을은 서둘러 책장을 넘겨 내용을 읽었다. 

 

"육체의 마음인 심장과 영혼의 심장인 하트,
심장 모양의 하트는 마음의 상징이고, 사랑을 나타내는 아이콘이다.
하트는 마음과 심장의 교차로이며 마음과 심장은 그 위에서 포개진다.
뇌는 사실일 뿐이지만, 심장은 사실이면서 상징이다.
그래서 심장은 늘 인류 문화사의 중심에 자리해왔고, 상징의 힘으로 세상을 지배한다."

 

이정의 발걸음 소리가 들리자 가을은 바닥에 책을 내려놓고 재빨리 부엌을 나왔다.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려고 찻잔을 들었지만 그만 엎질러버리고 말았다.
아직 뜨거운 찻물이 가을의 손에 닿자 작게 비명이 나왔다.

 

가을: 앗 뜨거!
이정:(다급히) 그대 괜찮아?

 

어느 새 이정이 다가와 가을의 손목을 잡고 부엌으로 데려갔다.
재빨리 찬물에 손을 식히면서 이정은 걱정스럽게 가을을 봤다.
가을은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가을: 괜찮아요. 다행히 차가 좀 식었어요.
이정: 조심해야지. 왜 잔디가 늘 그대옆에 붙어있으려 하는지 알겠는데.
가을: 헉, 제발 선배까지 잔디처럼 말하진 마세요.

 

가을은 조심스럽게 이정의 손에서 자신의 손목을 빼내고는 수도꼭지를 잠궜다.
이정은 마른 행주를 가을에게 건네주었다.

다시 부엌을 나오는 두 사람.
가을은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행동하려고 애썼지만 이정의 눈을 속이지는 못했다.

 

이정: 왜 그래? 손이 아직 쓰라려?
가을: 아니에요.
이정: 맞는 거 같은데. 잠시 기다려봐.

 

이정은 재빨리 구급상자를 가져와서 가을의 손에 약을 발라줬다.
가을은 차라리 손이 데인 것으로 상황을 넘길 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가을:(웃으며) 고마워요 선배.
이정: 앞으론 꼭 조심해, 이 덜렁이 아가씨야.

 

이정은 가볍게 가을의 이마에 꿀밤을 먹였다.
뜻밖의 행동에 놀란 가을은 멍하니 이정의 얼굴을 봤다.
이정 역시 자신의 행동에 놀라서 가만히 있었다.
순간적으로 정적이 흐른 후, 가을은 이마를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가을: 선배 너무해요. 정말 잔디같잖아요.
이정: 아, 미안...
가을:(탁자 위의 책을 보자 눈이 반짝거린다) 와~ 브레송 사진집이네요.
이정:(화제가 바뀐 것에 안도하며) 역시 바로 알아보는군. 예전에 파리에서 샀던 거야.
가을:(페이지를 넘겨보며 감탄) 정말 예술이다~
이정: 집에 가져가서 천천히 보도록 해.
가을: 어? 빌려주시는 거에요?
이정: 아니, 그대가 가져.
가을:(눈 동그래지며) 정말요?
이정:(웃으며) 어젯밤에 우연히 발견했는데 그대가 얼마나 좋아할지 바로 상상이 가더라고.
가을: 선배... 정말 고마워요. (웃음이 퍼져나간다.)

 

가을은 뜻밖의 선물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잔디라면 당장 목을 끌어안았겠지만 차마 그럴 수 없어 그저 사진집만 꼭 잡을 뿐이었다.
기쁨과 감사로 가득한 가을의 얼굴을 보며 이정도 흐뭇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지만 마음 한편에서는 은재와 달리 그저 웃으며 고맙다고만 말하는 가을에게 약간 아쉬움도 느꼈다.     
'은재라면 바로 날 안아줬을텐데...'

 

두 사람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도예실에는 흙냄새와 창밖에서 들려오는 빗소리만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