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 영원으로 만들다 08
-밀라노-
"사람이 머물 곳은 다른 사람의 가슴 뿐이다."
아오이가 '개구리 정원'이라 부르는 산타 마리아 델 레 그라치에 성당의 정원에서 냉정과 열정사이를 읽던 가을은 이 문장을 읽고는 가만히 책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지금은 겨울이라 개구리 분수는 물을 내뿜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개구리를 찬찬히 보다 분수를 보고 주변을 둘러보던 가을은 혼잣말을 내뱉었다.
'나도... 예전처럼 오빠곁에 머물고 싶어... 항상 따듯하고 포근했던 그 때처럼...'
일현과의 추억을 회상하는 가을의 표정이 아련했다.
-서울, 이정의 집-
설을 맞이해 이정의 집 부엌은 차례 음식을 만드느라 맛있는 냄새가 가득했다.
나현은 가정부에게 새로운 음식을 지시하고는 부엌을 잠시 감독하다가 거실로 나왔다.
마침 이정이 도예 작업을 마치고 집으로 들어오다가 거실에서 나현과 마주쳤다.
"어머니, 차례 음식 만들고 있나봐요?"
"그래..."
나현의 안색이 썩 좋지 않아 이정은 걱정스러운 마음이 살짝 들었다.
명절에 할아버지 댁으로 가면 할아버지로부터 지루하고 뻔한 잔소리도 듣지만 친척으로부터 은근히 가시있는 말도 적지 않게 들어야하기 때문에 나현은 명절을 싫어했다.
몸이 힘들지 않아도 정신적으로 몹시 피로하다면서 명절이 끝나면 하루는 꼬박 누워있고는 했다.
저를 걱정스럽게 보는 이정의 얼굴에 나현은 금새 말을 덧붙였다.
"염려 말아라. 엄마는 명절보다 현애랑 가을이랑 같이 밀라노 못간게 아쉬워서 그런 거니깐."
가을이 밀라노에 있다는 걸 상기하자 이번엔 이정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런 아들이 염려되어 나현은 조심스럽게 이정을 불렀다.
"정아, 왜 그러니? 가을이가 있는 밀라노로 가고 싶어?"
이정은 착잡하다는 표정을 나현을 보다 어렵게 입을 뗐다.
"어머니... 만약 누나가 형과 다시 시작하겠다고 하면 어쩌시겠어요?"
"뭐? 가을이가 현이랑?"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이정을 보며 나현은 뜻밖의 소식에 경악했다.
"정아, 가을이가 그러던? 현이와 다시 시작하고 싶다고?"
"아니오... 하지만 지금 누나는 형이 피렌체로 찾아오길 바래요."
"아니 피렌체는 하루밖에 안있을 거라던데 왜 밀라노가 아니라 피렌체라는 거니?"
"누나는... 소설처럼 피렌체에서 형과 다시 만나고 싶어해요..."
밀라노로 떠나기 전날, 함께 냉정과 열정사이 DVD를 보면서 가을은 이정에게 틈틈히 일현이 알려줬다며 피렌체의 명소를 설명해줬다.
그 때 일현의 이야기를 전해주는 가을의 표정은 더없이 환했고 눈빛은 기대로 반짝였다.
그리고 피렌체 두오모에서 두 연인이 마침내 재회했을 때 가을은 저도 모르게 속삭이듯 아주 작게 일현을 불렀다.
쥰세가 아오이보다 먼저 밀라노에 도착해서 환하게 웃는 마지막 장면이 나왔을 때는 가을은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렸다.
결국 가을이 다시 일현과 시작하는 걸 선택했나 싶어 이정이 얼마나 마음이 쓰라렸는지 몰랐다.
"가을이와 현이는 이제 이뤄질 수 없어. 왜 가을이가 갑자기 다시 현이를 찾는지 모르겠구나."
당황섞인 나현의 목소리에 이정은 번쩍 정신이 들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왜 안된다는 거에요?"
"현이는... 지금 교제하는 사람이 있어..."
"예? 어머니가 어떻게 아세요?"
이제 깜짝 놀란 사람은 이정이었다.
형에게 사귀는 여자가 있다니... 그 말이 사실이라면 형의 성격상 가장 먼저 가을과 자신에게 알려줄텐데 왜 모두 몰랐던 건지...
"지금까지 네게 말하지 않았다만... 김비서가 지금까지 현이 소식을 정기적으로 알려줬단다."
"그럼 어머니가 형을 계속 뒷조사하셨던 거에요?
"어쨌든 현이는 지금 여자친구가 없다 해도 가을이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그건 확실히 알 수 있어."
"하지만 누나가 형을..."
"가을이를 사랑하는 사람은 현이가 아니라 바로 너잖니. 그럼 가을이가 흔들리는 모습을 봤으면 잡아줘야지."
간단명료하게 상황을 정리해주는 나현의 말에 이정은 정신이 번쩍 드는 것 같았다.
나현은 이정의 손을 끌어 함께 거실 소파에 앉았다.
"그래 엄마가 그동안 네게 많이도 소홀했지. 태어났을 때에도 딸이 아니란 이유로 실망부터 했으니 말야.."
"어머니..."
"하지만 그래도 엄마는 너도 사랑해. 그리고 네가 얼마나 가을이를 깊이 사랑하는지도 잘 알아.
단순히 가을이를 며느리로 맞고 싶어서가 아니라 너랑 가을이랑 같이 행복해지는 걸 보고 싶은게 내 속마음이야."
처음으로 엄마로부터 사랑한다는 말을 들은 이정은 놀란 나머지 멍하니 나현의 얼굴만 바라봤다.
나현은 안스러움과 미안함이 가득 찬 얼굴로 이정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피렌체-
중세부터 시간이 멈춰버린, 역사를 지키기 위해 미래를 희생한 도시 피렌체...
좁고 어두운 계단을 수백 개나 밟고 마침내 두오모 쿠폴라로 올라온 가을은 눈앞에 펼쳐진 경관을 보면서 소설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정말로 피렌체는 근대 건물이 하나도 없어서 중세시대에 시간이 그냥 멈춰버린 것 같았다.
'지금 나도 이 도시처럼 과거에만 머무르려고 하는 걸까...'
가을은 머리속에 떠오른 생각에 저도 모르게 소스라치게 놀랐다.
자신이 일현을 남자로서 사랑하는게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 세상에는 오누이같은 연인도 많은데 일현과 자신이 왜 그렇게 되지 못하겠냐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혼란스러운 머리를 비우기 위해 가을은 고개를 젓고는 천천히 쿠폴라를 거닐며 피렌체 경치를 감상했다.
프라하와는 또다른 중세 도시의 이국적인 느낌을 만끽하는 동안 마음은 다시 차분해졌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꽤 오랫동안 경치 구경을 했는지 조금씩 발과 다리가 묵직해지기 시작하자 가을은 이제 눈길을 피렌체 풍경에서 쿠폴라에 있는 사람들로 옮겼다.
이제는 일현이 도착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싶어 출구쪽으로 걸어가는데 뒤에서 제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추가을!"
놀라움과 반가움, 설레임이 뒤섞인 채로 가슴이 마구 뛰었다.
천천히 뒤를 돌아보니 너무나도 보고싶었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오.."
미처 다 부르기도 전에 제게 달려오는 사람이 누구인지 다시 확인했다.
미소를 지으며 제게 다가오는 사람이 일현이 아니라 이정임을 확인한 가을의 눈가가 갑자기 뜨거워지고 목이 막히는 것 같았다.
저도 모르게 가을은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눈물을 흘렸다.
"흑.. 흐윽.."
갑자기 눈물을 터트리는 가을의 모습에 당황한 이정은 어찌해야 할 줄을 몰랐다.
주위를 둘러보니 가을이 우는 모습을 보고 이정이 울린 건가 하는 의아함이 담긴 표정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일단 이정은 두 팔을 벌려 계속 울고 있는 가을을 안아주고는 다정하게 등을 토닥여주었다.
가을은 이정이 자신을 안아주고 있다는 것도 인식하지 못한 채 계속 눈물을 흘렸다.
더 이상 일현을 남자로 보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어린날처럼 기대고 싶어했던 자신의 나약함이 너무 한심했다.
다른 사람을 만나서 새로운 시작을 하는데 시간과 열정을 들이기 보다는,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알고 항상 자신을 따듯하게 감싸안아주었던 일현의 곁에 머물고 싶은 그 욕심은 너무나도 이기적이었다.
언제부터 겁쟁이가 되어버려서 일현의 마음을 아랑곳하지 않고 저 좋을 대로 마음대로 기대했던 이기적인 자신이 너무 밉고 혐오스러웠다.
아울러 자신과 일현은 결코 이뤄질 수 없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닫게 되어서, 이제는 정말 과거로 돌아갈 수 없음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이 서글펐다.
이정에게는 제가 마치 다 성장한 어른인 척 했지만 결국 자신도 아직은 어른이 되지 못했다 싶어서 조금은 창피하기까지 했다.
가을이 계속해서 자신의 품에 안긴채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면서 이정의 마음은 매우 묘했다.
형이 아니라 제가 찾아온 것이 그렇게나 실망스러웠나 싶어 좀 착잡하기도 했지만, 항상 자신에게는 강한 누나인척 했던 가을이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여주니 안쓰럽기도 했다.
'이렇게 자그마하고 연약하면서 왜 그렇게 내겐 강한 척한 거야... 정말 추가을은 바보야...'
하지만 울지말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린 날, 가을은 가끔 울음을 터트렸고 그 때마다 형이 가을을 안아주면서 등을 토닥여주곤 했었다.
그러면 나중에 가을은 눈물을 그치고 환하게 웃었다.
하지만 형이 집을 나간 후로는 더이상 가을의 눈물을 볼 수 없었다.
불안정한 제 어머니와 상처입은 자신을 돌보느라 더 이상 울지 못했다는 걸 아주 나중에야 깨달아서 그 때부터 가을이 애써 강한척하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아팠다.
심지어 진하와 헤어졌던 날에도 가을은 늦게 제 방으로 들어와서는 불도 켜지 않고 멍하니 책상에 앉아있었다.
하지만 행복으로 반짝였던 가을의 눈은 빨개지고 눈두덩이는 부어있었다.
분명 울었다는 흔적이었지만 그 때 가을은 필사적으로 울지 않았다고 부정했었다.
당시 이정은 억지로 괜찮은 척하는 가을의 미소가 너무 슬퍼보여서, 아무것도 도와줄 수 없어서 너무 속상했다.
그 때를 생각하면 지금 가을이 제품에 안겨서 펑펑 우는 게 훨씬 더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지금 자신은 가을이 실컷 울 수 있도록, 그래서 가슴속 응어리가 생기지 않게 도와줄 수 있으니까 말이다.
이제에야 비로소 자신이 가을에게 울 수 있는 장소가 되어줘서 다행이라는 안도감까지 들었다.
어쩌면 가을이 지금 제가 누구에게 안겨 우는지 전혀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한참동안 이정의 옷에 눈물 콧물을 잔뜩 묻힌 후에야 가을은 이정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손으로 눈물을 닦고 난 후 빨개진 눈으로 이정의 옷에 제가 만든 얼룩을 보자 정신이 번쩍 든 가을이었다.
"이런... 정말 미안해 정아..."
가을은 뺨에 홍조가 든 상태로 재빨리 손수건을 꺼내 이정의 옷을 닦기 시작했다.
그런 가을의 모습이 어쩐지 귀엽게 느껴져 이정은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이정의 미소를 못본 가을은 그저 열심히 제가 묻힌 눈물과 콧물을 닦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정은 환한 얼굴로 가을의 팔을 잡았다.
"괜찮아. 됐어."
"하지만 네 옷 완전 얼룩 투성이가 됐어. 빨리 닦아야해. 물티슈라도 있음 좋은데..."
"아냐. 난 오히려 고마워."
"뭐?"
어리둥절해하는 가을과 달리 이정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이정은 가을의 손에서 손수건을 빼내고는 다정하게 가을의 얼굴에 남은 눈물을 닦아주었다.
"늘 나랑 엄마때문에 울지도 못했잖아. 항상 강한척, 무슨 일이 있어도 괜찮은 척만 했잖아."
"그렇지 않아..."
뜻밖의 말에 당황한 가을은 아니라고 반박하려 했지만 이정이 먼저 말을 잘랐다.
"처음엔 몰랐어. 형이 떠나간 게 누나에게 얼마나 큰 상처였는 지도 모르고 무작정 매달리기만 했어.
그런데 말이야... 언제부터인가 내 눈에 보인게 있었어..."
"뭘 봤는데?"
어느 새 이정의 얼굴에는 미소가 사라지고 가을을 보는 눈빛은 진지해졌다.
가을은 그런 이정의 눈빛이 낯설어 저도 모르게 약간 긴장을 했다.
"억지로 슬픔을 참고 있는 약하고 여린 사람...
나이값 못하는 어른과 제가 입은 상처밖에 모르는 철없는 남자아이를 돌보느라 겉으론 강한 척 하는 사람."
"정아!"
"내가 아직은 많이 모자라다는 거 알아. 아직 내안의 상처를 다 극복하지도 못했어. 하지만 말야..."
이정은 따듯하게 웃으며 가을의 손을 잡았다.
가을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이정의 웃는 얼굴을 바라만 봤다.
"나 이제는 추가을이 울고 싶을 때 가슴을 빌려줄 수 있는 만큼은 컸어.
그러니까 더 이상 혼자 아픔 삼키고 눈물 참지 않아도 돼.
앞으론 내가 추가을 혼자 아파하지 않도록 곁에 있어줄게"
가을은 지금 눈앞에 있는 이정을 낯설다는 얼굴로 바라봤다.
이 아이는 대체 언제 자라서 제 슬픔을 헤아리게 된 걸까...
지금 이순간, 과거에 더 메여있던 사람은 이정이 아니라 자신임을 깨닫자 저도 모르게 다시 눈물이 나왔다.
가을이 또 다시 눈물을 흘리자 당황한 이정은 가을의 눈물을 닦아주려고 했다.
하지만 가을은 이정의 손에서 제 손수건을 되찾아 재빨리 눈물을 닦았다.
"고마워."
가을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제가 두르고 있던 긴 스카프를 풀어 이정의 목에 둘러주었다.
이정은 영문을 몰라 멍하니 가을만 보다 질문을 던졌다.
"뭐야?"
"뭐긴. 네 옷에 묻은 얼룩 감췄지. 다행히 지금 네 옷이랑 색상이 어울리네."
어느 새 활짝 웃는 가을을 보며 이젠 이정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했다.
하지만 가을은 이정의 표정을 무시하고 밝게 말했다.
"이제 그만 내려가자. 나 목도 마르고 아이스크림도 먹고 싶어."
"뭐?"
"얼른 가자, 나 다리 아파."
이정을 나몰라라 하고 가을은 이제 몸을 돌려 출구로 걷기 시작했다.
황당한 나머지 이정은 큰 소리로 가을을 불렀다.
"추가을!"
가을은 홱 몸을 돌리더니 약간은 삐진 얼굴로 이정에게 다가갔다.
그런 가을의 표정에서 뭔지 모를 불안감을 느낀 이정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아니나 다를까, 가을은 이정의 귀를 잡고 끌고 가기 시작했다.
"정이 너 내가 아무리 오늘 못볼 꼴을 보여도 기어오를 생각일랑 꿈에서도 하지 마."
"아야야~ 잘못했어. 내가 잘못했다니깐~"
좀전의 애잔하고 애틋했던 분위기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평소처럼 누나 노릇하는 추가을과 속절없이 당하기만 하는 소이정으로 돌아간 두 사람이었다.
흥미롭다는 시선으로 두 사람을 지켜보던 관광객들은 참 변덕이 심한 커플이라고 생각하고는 금새 고풍스러운 피렌체 풍경으로 관심을 돌렸다.
두오모를 나온 뒤에도 가을은 이정에게 길 안내를 제대로 못한다는 둥, 또 맞먹으러 든다는 둥 오만 가지 핑계를 대어가며 발길질까지 해가며 핀잔과 구박을 끊임없이 주었다.
하지만 이정이 괜히 왔다고 툴툴대며 앞장서서 걸어가는 동안 가을은 살짝 웃었다.
'언제 이렇게 큰 거니... 어쨌든 정말 고마워 정아...'
햇빛이 많다는 소설 속 묘사와 달리 2월의 피렌체 하늘은 구름이 많았지만 가을은 이정을 따라가며 후련함을 느꼈다.
'안녕 오빠...'
------------------------------------------------------------------------------
3월의 첫번째 주말 잘 보내셨습니까?
저도 소설 쓰고 나니 아주 후련하네요 ㅎㅎ
가을이도 드디어 오랫동안 가슴 밑바닥에 남겨뒀던 일현에 대한 미련을 떨쳐냈답니다.
앞으로 얘네들 사이는... 이정이 하기 나름이죠 뭐 냐하하 ^^;;
하지만 쉽지는 않을 겁니다.. 이제는 열 다섯살로는 안봐도 여전히 가을이 눈에 이정인 동생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