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기억의 주인 번외

1 - 우빈의 첫사랑

지혜의 여신 2009. 6. 30. 21:51

-우빈의 집-

 

겨울 햇살이 방을 가득 비추고 있지만 우빈은 도통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방문이 벌컥 열리더니 열살 가량되는 쌍동이 여자아이들이 우빈의 침대위로 뛰어들었다.

 

유빈: 오빠~ 일어나~
예빈: 오빠~ 우리들이랑 같이 아침밥 먹자 응~

 

쌍동이는 이불을 걷어내더니 우빈의 얼굴을 만지작하면서 손, 팔을 동시에 잡아당기느라 여념이 없었다.
버티던 우빈은 결국 간신히 몸을 일으켜 억지로 눈을 떴다.
쌍동이들은 눈빛을 반짝이더니 우빈의 가슴에 동시에 안겼다.

 

유빈:(신난 목소리로) 오빠 일어났다~
예빈:(환한 얼굴로) 오빠아~ 빨리 내려가자 응~

 

자신의 가슴에 매달리는 쌍동이를 본 우빈은 한숨을 내쉬더니 부드럽게 동생들을 떼어냈다.

 

유빈: 우리 꼬마아가씨들~ 이렇게 오빠한테 달라붙으면 오빠가 씻을 수가 없잖니.

 

그 말을 들은 쌍동이는 신나게 침대에서 내려왔다.

 

유빈: 오빠 우리 먼저 내려가서 기다릴게.

 

유빈은 재빨리 방문 밖으로 나갔지만, 예빈은 갑자기 몸을 돌려 우빈을 빤히 바라봤다.
우빈은 얼른 예빈을 내보내기 위해 억지로 자상한 표정을 지어줬다.

 

우빈: 예빈아 왜 그러니? 오빠 얼굴 이상해?
예빈:(도리질하고) 오빠, 미셸이 누구야?
우빈:(잠시 움찔) 뭐? 언제 어디서 그런 이름을 들었니?
예빈: 오빠 조금 전에 잠꼬대로 미셸이라고 그랬어. (진지한 표정으로) 오빠 여자친구 이름이야?

 

우빈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지만 최대한 밝게 웃었다.

 

우빈: 오빠가 꿈에 미셸 파이퍼랑 데이트를 했거든.
예빈:(고개 갸웃) 미셸 파이퍼가 누구야?
우빈: 아주 예쁘고 근사한 미국 배우란다.
예빈: 엄마보다 더 예뻐?
우빈: 예쁜 것보다는 분위기가 있어. 나중에 오빠가 그 사람 나온 영화 보여줄게.
예빈:(얼굴 환해지며) 예빈이한테만 보여줄 거지?
우빈:(고개 끄덕) 응 그럴게.

 

예빈은 오빠가 자기하고만 약속을 하자 좋아라하면서 다시 우빈에게 달려들더니, 재빨리 우빈의 뺨에 뽀뽀를 하고는 방을 나갔다.
예빈까지 나가고 혼자가 되어서야 우빈은 나직히 한숨을 내쉬었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에 서서 정원을 바라보는 우빈의 표정에는 평소와 달리 그리움이 깃들어있었다.

 

우빈:(혼잣말) 어제 가을의 노래를 들어서 그런가....

 


평소처럼 시끌벅적한 아침 식사를 마치고 우빈은 세련된 비즈니스 수트를 입고 집을 나섰다.
우빈이 대학 과정을 모두 마치게 되자 송회장은 회사에 나와서 업무를 파악하라고 지시했다.
정식 출근은 1월부터 시작하기로 합의를 봤지만, 우빈은 틈틈히 회사로 나갔다.
준표가 신화를 장악하는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회사를 속속들이 꿰뚫고 있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실감한 우빈이었다.
    
크리스마스 선물로 송회장에게 받은 재규어에 올라탄 우빈은 시동을 걸었다.
그러자 라디오에서 경쾌한 DJ의 목소리가 들렸다.

 

DJ: ..... 이번에 들려드릴 노래는 비틀즈의 미셸입니다.

 

우빈은 또다시 온몸이 굳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음악이 흘러나오자 우빈은 차고에서 나올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가만히 카 스테레오에 귀를 기울였다.  

 

Michelle, ma belle
These are words that go together well, my Michelle
Michelle, ma belle
Sont les mots qui vont tres bien ensemble
Tres bien ensemble
미셸, 내 아름다운 사람
이들은 언제나 함께 하는 말들이야, 나의 미셸
미셸, 내 아름다운 사람
이들은 훌륭한 짝을 이루는, 언제나 함께 하는 말들이야


I love you, I love you, I love you
That's all I want to say
Until I find a way
I will say the only words I know that you'll understand
널 사랑해, 널 사랑해, 널 사랑해
내가 말하고 싶은 전부야
내가 길을 찾을 때까지
난 내가 아는, 네가 이해할 단 한 마디의 말만을 하겠어

 

Michelle, ma belle
Sont les mots qui vont tres bien ensemble
Tres bien ensemble
I need you, I need you, I need you
I need to make you see
Oh, what you mean to me
Until I do I'm hoping you will know what I mean
I love you
미셸, 내 아름다운 사람
이들은 훌륭한 짝을 이루는, 언제나 함께 하는 말들이야.
네가 필요해, 네가 필요해, 네가 필요해
네가 내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알려주기 전에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 줬으면 해
널 사랑해
 
I want you, I want you, I want you
I think you know by now
I'll get to you somehow
Until I do I'm telling you so you'll understand
널 원해, 널 원해, 널 원해
이제 알 거라고 믿어
너를 어떻게 해서든 얻으려고
네가 이해하도록 말해 주고 있어

 

Michelle, ma belle
Sont les mots qui vont tres bien ensemble
Tres bien ensemble
I will say the only words I know that, you'll understand, my Michelle
미셸, 내 아름다운 사람
이들은 훌륭한 짝을 이루는, 언제나 함께 하는 말들이야.
난 내가 아는, 네가 이해할 단 한 마디의 말만을 하겠어, 나의 미셸


'이 모든 게 다 우연인 걸까...'
오래 전에 가슴에 묻어두었던 자신의 천사가 오늘 아침 다시 살아나 우빈의 마음을 놓아주지 않고 있었다.

 

 


-일심 건설-

 

우빈은 해외 출장으로 비어있는 송회장의 방에서 일심에 대한 자료를 검토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현재 일심 건설은 완벽하게 합법적인 사업체였지만, 전국 주요 도시의 클럽을 비롯해 아직 어둠의 사업체가 많이 남은 상태였다.
아무리 송회장이 조직을 정리하려 해도, 결국 완전한 합법화는 우빈 자신이 마무리 지어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업무에 집중하는 우빈의 모습은 완벽한 청년사업가였다.
F4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의 여유로운 카사노바의 모습은 그림자조차 찾을 수 없었다.

 

'위이이잉'
휴대 전화가 울리자 우빈은 서류에서 눈을 떼고 발신인을 확인했다.
다름아닌 이정이었다.

 

우빈: 이정아 무슨 일이냐?
이정: 정말 미안한데 말야, 오늘 클럽 같이 못가겠어.
우빈: 이번엔 이유가 뭔데?
이정: 가을이가 우리 미래의 처제랑 같이 꽃동네로 봉사활동 가겠다고 해서 말야.
우빈: 너도 따라가려고? 가을이 동생이랑 둘이서만 가고 싶어하는 거 아냐?
이정: 영 안심이 되지 않아서 말야. 이 기회에 점수도 따고 일석이조잖아.
우빈: 천하의 소이정이 봉사활동이라니, 금잔디도 금잔디지만 추가을도 정말 무섭다니까.
이정: 너도 천사를 만나면 그렇게 될 거다.
우빈: 네가 일방적으로 약속 깬 거니까 벌칙을 뭘로 할까?
이정: 가을이에 대한 것만 빼면 뭐든지.
우빈: 생각 좀 해봐야겠는데.
이정: 네 처분에만 맡긴다. 가을이 데려가야 하니까 그럼 이만 끊을게.
우빈: 알았다, 임마.

 

우빈은 통화를 끝낸 후, 저도 모르게 과거를 떠올렸다.
미국에서 돌아온 후로는 의식적으로 기억 저멀리로 묻어두었던 자신의 천사를 처음 만났던 날이 어제처럼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6년 전, 미국 LA- 

 

우빈은 송회장의 명령으로 원치않는 도피성 유학을 왔다.
F4 친구들과 떨어져서 카톨릭 재단의 성 프랜시스 학원(St. Francis Academy)에 9학년 생활을 하자니 죽을 맛이었다.
혼자서 교칙이 엄한 학교를 다니는 것만으로도 답답한데, 학교밖에서는 송회장이 붙은 사람들이 우빈을 24시간 밀착 감시하는 통에 그야말로 새장안에 갇힌 새 신세였다.
학교에는 동양인이 많았지만 역시 주류는 백인들이었으므로, F4로서 신화학원을 장악했던 우빈으로서는 맘에 들지 않는게 많았다.

 

짧은 부활절 방학이 끝나고 다시 학교에 나온 우빈은 점심을 먹고 난 후 정처없이 교정을 돌아다녔다.
LA답게 4월초였지만 교정은 한국의 초여름처럼 신록의 푸르름으로 가득찼다.
약간은 신화고와 비슷한 느낌을 주는 산책로를 걷다 음악실이 있는 건물에 도착한 우빈은 안쪽에서 들려오는 노래소리를 들었다.
우빈은 사람의 목소리가 아닌 듯한 맑고 청아한 노래소리에 홀린 나머지 건물안으로 들어갔다.

 

음악실의 문을 열자, 자신과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동양 소녀가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 보였다.
우빈의 눈에는 햇살속에서 피아노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는 그 소녀가 천사처럼 보였다.
얼마나 오랫동안 그 소녀를 지켜보고 있었는지 우빈은 노래소리가 그쳤다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했다.

 

미셸: 거기 누구 있어요?

 

노래소리만큼이나 고운 목소리를 듣자 우빈은 정신을 차렸다.
그 소녀는 피아노 의자에서 일어나 우빈을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자신이 소녀를 방해했나 싶어 미안해진 우빈은 조심스럽게 소녀에게 다가갔다.

 

우빈: 미안해. 지나가다 우연히 네 노래 소리를 들었는데 하도 아름다워서 그만 나도 모르게 들어왔어.

 

소녀는 살짝 미소를 짓고는 다시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소녀: 혹시 전학생?
우빈: 맞아. 부활절 방학 직전에 왔어.
소녀: 그랬구나. 난 교장 선생님 허락을 받아서 점심시간마다 여기에서 성악연습을 하거든.
우빈: 정말 잘부른다. 사람이 아니라 천사가 부르는 줄 알았어.

 

우빈은 입에 발린 찬사가 아닌 진심어린 칭찬을 하는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런 우빈의 진심을 느꼈는지 소녀의 얼굴은 환하게 빛났다.
맑은 갈색눈으로 자신을 보면서 미소짓는 소녀를 보자니 우빈은 기분이 좋았다.

 

소녀: 정말 고마워.
우빈:(조심스럽게) 이름을 물어봐도 될까?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말야.
소녀: 난 미셸 클리어워터(Michelle Clearwater). 현재 9학년이야. 넌 이름이 뭐야?
우빈:(잠시 머뭇) 내 이름은 프린스 송이고 나도 9학년이야.  
미셸:(생긋 웃으며) 멋진 이름이네. 만나서 반가워 프린스.

 

미셸은 우빈에게 손을 내밀었다.
우빈은 재빨리 미셸의 옆으로 가서 그녀의 흰 손을 잡았다.
그 순간, 우빈은 가슴에서 심장이 '쿵'소리를 내는 것을 똑똑히 들었다.

 

미셸의 손은 따듯했고, 손가락은 길고 섬세했다.
악수하는 내내 우빈은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미셸의 손에 입을 맞춰야하나 고민을 했다.
그러나 우빈이 미처 결론을 내리기도 전에 미셸은 우빈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빼냈다.
그리고는 피아노 반대편을 쳐다보고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누군가를 불렀다.

 

미셸: 마이클, 이리 와서 프린스와 인사하렴.

 

아까는 미처 우빈의 눈에 띄지 않았던 골든 리트리버가 천천히 미셸의 곁으로 오더니 꼬리를 흔들며 우빈을 바라봤다.
재빨리 우빈의 머리속을 스쳐가는 생각이 있었다.
'맹도견!'

 

미셸:(우빈을 보며) 프린스, 이쪽은 마이클. 내 눈이고 동생이고 수호자야.
     (개를 보며) 마이클, 이쪽은 프린스야. 성 프랜시스에 온지 얼마 안됐대.
우빈: 만나서 반가워 마이클.

 

우빈은 어색하게 한 쪽 무릎을 꿇고는 마이클의 앞발을 잡았다.
마이클은 그저 가만히 우빈의 얼굴을 바라볼 뿐이었다.
우빈은 어색한 느낌이 들어 헛기침을 하고는 다시 일어섰다.
미셸은 모든 것을 다 본 것처럼 방긋 웃었다.

 

우빈: 아주 착한데.
미셸: 언제나 내 곁을 떠나지 않아. 에스메랄다에게 잘리가 있다면 내겐 마이클이 있어.
우빈: 멋진 단짝이 있어서 부러운데.

 

미셸이 다정하게 마이클의 머리를 쓰다듬는 모습을 보면서 우빈의 마음은 복잡해졌다.
우빈은 처음 본 미셸이 시각 장애인이라는 사실이 왜 이렇게 안쓰럽게 느껴지는지 그 때는 몰랐다.  
화제를 바꾸고 싶어 우빈은 머리 속에 떠오르는 질문을 즉시 내뱉었다.

 

우빈: 아까 불렀던 노래는 뭐야? 아주 좋은데.
미셸: 파니스 안젤리쿠스(Panis Angelicus), 생명의 양식이야.
      프린스는 카톨릭 신자가 아니구나, 그렇지? (미소짓는다)

 

우빈은 갑자기 자신이 천주교 신자가 아닌게 이렇게 아쉬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미셸의 투명한 눈을 보고 있자니 도저히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우빈: 응.. 우리집은 종교가 없어. 하지만 네가 부른 그 성가는 정말 가슴에 와닿았어.

 

지금 우빈의 어색한 미소를 본 것처럼 미셸은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미셸: 꼭 신자가 아니라도, 성가를 듣고 감동을 받는다면 그걸로 충분한 거야. 
우빈: 저기... 그 노래 다시 불러주면 안될까? 처음부터 듣고 싶은데.

 

우빈은 평소의 자신답지 않게 쭈뼛거리면서 조심스럽게 미셸에게 부탁을 했다.
마치 쭈뼛거리는 우빈의 모습을 보기라도 한 듯 미셸은 고개를 끄덕이며 생긋 웃었다.

 

미셸: 얼마든지.

 

미셸은 다시 피아노앞에 앉아 '파니스 안젤리쿠스'를 부르기 시작했다.
우빈은 숨소리까지 죽여가면서 미셸을 바라봤다.

 

햇살에 반짝이는 흑갈색 머리에 투명한 갈색눈, 하얀 얼굴, 장미빛 뺨, 붉은 입술까지 미셸의 얼굴을 구석구석 뜯어보는 우빈이었다.
미셸의 순진무구한 아름다움이 우빈의 뇌리에 사진처럼 박혔다.
아름다운 노래소리를 듣고 있는 동안 우빈의 머리속에서 혼자 도피성 유학을 왔다는 불만이 완전히 사라졌다. 

 

 


-클럽-

 

회사에서 업무 파악을 끝낸 후, 우빈은 혼자 클럽으로 와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준표는 신화그룹의 전무로서 일을 시작했고, 지후는 수암재단의 송년음악회 준비로 정신없이 바빴다.
유일하게 시간 여유가 있던 이정마저 가을과 연애하느라 우빈은 혼자서 클럽에 오는 날이 많아졌다.

 

우빈:(혼잣말) 미셸....

 

우빈의 혼잣말을 들은 듯 한 여자가 우빈의 옆자리에 앉았다.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성은 섹시한 붉은 칵테일 드레스를 입고 진한 화장을 했다.
우빈을 잘 아는듯, 교태섞인 목소리로 우빈을 바라보며 말을 걸었다.

 

여성: 어머~ 우빈씨 왜 오늘은 혼자인 거야? 친구들이 또 우빈씨 대신 다른 일에 바쁜 거야?
우빈:(흘깃 보고) 그렇게 됐네.
여성: 그럼 오늘은 내가 우빈씨 곁에 있어줄까?

 

우빈은 갑자기 이 여자에게서 풍겨오는 진한 향수냄새가 거슬렸다.
그렇지만 타고난 매너덕분에 전혀 내색하지 않고 정중하게 거절을 할 수 있었다.

 

우빈: 미안하지만 오늘은 혼자서 추억에 잠기고 싶어.
여성: 옛사랑을 떠올리는 거야?
우빈:(술잔을 보며) 그런지도...

 

여성은 우빈의 표정이 심상치가 않다 싶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다시 추억속으로 빠져들었다.

 

 


-6년전, 미국 LA-
   
경민: 너 지금 성 프랜시스의 천사를 말하는 거야?
우빈: 그게 미셸 별명인 모양이지?
경민:(고개 끄덕) 아, 넌 전학온 지 얼마 안돼서 잘 모르는 구나. 교사들은 미셸 클리어워터를 그렇게 불러.
우빈: 노래하는 모습을 보니 천사같긴 하더라.
경민: 이름도 미셸이니까 말야.
우빈:(한쪽 눈썹 올리며) 그게 무슨 상관인데?
경민: 미셸(Michelle)은 대천사 미카엘(Michael)의 여성형을 영어식으로 부르는 이름이잖아.
우빈:(고개 갸웃) 그랬나?

 

우빈은 미셸과 헤어진 후, 다음 수업을 듣기 위해 세계 지리 교실에 들어갔다.
유일하게 자신과 함께 수업을 듣는 한국 유학생인 경민에게 미셸을 만난 이야기를 했다.
우빈은 미셸의 모든 것이 다 궁금했다.
미셸이 이 학교의 천사로 불리워진다는 것에 우빈은 내심 흐뭇했다.
그렇지만 경민의 다음 말에 우빈의 기분은 상해버렸다.

 

경민:(놀리는 말투) 너도 미셸의 팬이 된 거냐? 인간이 천사를 사랑해봤자 소용없을텐데?
우빈: '너도'라니? 걔 인기가 많은 모양이지?
경민: 미셸은 7학년부터 이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는데, 걔 노래소리 듣고 반한 남학생들이 엄청 많아.
      지금까지 걔 팬들을 다 합치면 몇 트럭은 나올걸.
우빈: 근데 소용없다는 말은 뭐야?
경민: 미셸에겐 공인받은 남자친구가 있거든.
우빈: 남자친구가 없는게 더 이상한 일이겠다.
경민: 미셸이 이 학교에 입학한 후부터 환상의 커플로 다들 공인받았어.
우빈: 그 대단한 남자친구는 왜 미셸이 점심시간에 노래부를 때 옆에 없었대?
경민: 지금 영국에 있어. 이튼 스쿨로 교환학생으로 갔거든.
우빈: 그럼 미셸옆엔 아무도 없는 거잖아. 근데 왜 아무도 접근하지 않는 거래?
경민: 나중에 미셸과 크리스가 결혼할 거라는 거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으니까.
우빈: 뭐? 결혼?

 

우빈은 미셸에게 남자친구가 있다는 말에는 당연하다고 생각했지만, 결혼할 사람이라는 말에 깜짝 놀랐다.
한국도 아니고 왜 미국에서 10대가 장래를 약속했다는 말이 나오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경민은 우빈의 반응이 놀랍지 않다는 듯, 천천히 설명을 해주기 시작했다.

 

경민: 네가 몰라서 그러는데, 미셸은 이 프랜시스의 재단이사장과 친척이야.
      클리어워터 가문은 LA의 유서깊은 명문가라서 어릴 때부터 정혼을 많이 한다고.
우빈: 미셸은 동양인같았는데?
경민: 입양됐어. 친부모가 한국인 유학생 부부였는데 양부모와 같은 대학을 다녀서 무척 친했다고 하더라.
      걔가 어렸을 때, 친부모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자 클리어워터 가에서 바로 입양했대.
우빈:(씁쓸하게) 입양한 자식도 정략결혼을 시키는 모양이군.
경민: 뭐 미셸의 경우는 정략결혼이 아냐. 그 집안의 친아들인 크리스토퍼랑 어렸을 때부터 사랑하는 사이니까.
우빈: 그럼 오누이가 결혼한단 얘기야?
경민:(심드렁하게) 뭐 어때, 친남매도 아닌데. 암튼 네가 크리스를 못봐서 그래.
      미셸을 어찌나 아껴주는지 다른 남학생들이 접근할 꿈조차 꾸지 못했다니깐.
우빈: 그래서 지금 영국에 있는데도 미셸한테 접근하는 남학생이 하나도 없다 이거야?
경민: 빙고. 미셸이 고등학교 졸업하면 크리스와 약혼할 거라는 소문이 파다해.

 

우빈은 경민의 말이 하나도 믿겨지지 않았다.
이정과 더불어 플레이보이로 명성을 날린 우빈으로서는 얼굴도 못 본 상대때문에 미셸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비록 동갑이긴 해도, 미셸은 처음으로 우빈이 먼저 반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경민의 말에 승부욕만 발동했을 뿐이었다.

 

다음날부터, 우빈은 매일 점심시간마다 음악실에 가서 미셸을 만났다.
때로는 조용히 미셸의 노래를 듣기도 하고, 때로는 한국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미셸은 미국에서 태어나서 한국에는 아주 어릴 적에만 잠시 있었기 때문에 기억나는 것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우빈이 들려주는 한국 이야기에 집중을 해서 듣고는 여러 가지 질문을 했었다.   

 

미셸: 프린스는 한국 이름이 뭐야?
우빈: 송우빈. 미셸은?
미셸: 내 원래 이름은 한연이래. 엄마는 내 이름이 꽃이름이라고 하셨어.
우빈: 연꽃은 불교에서 아주 숭상하는 꽃이야.
미셸:(눈 동그래지며) 정말? 왜?
우빈: 연꽃은 진흙탕에서 피어나거든. 그래서 험난한 현실을 살아도 진리에 도달하는 부처를 상징한다고 해.
미셸: 그렇구나. 그 꽃 예뻐?
우빈: 아주 크고 예뻐.   
미셸: 무슨 색이야?
우빈: 보통은 흰색인데 분홍색도 있고 아주 드물지만 붉은색도 있어.
미셸: 한 번 보고싶다. 장미꽃은 기억이 나는데 연꽃은 본 적이 없거든.
우빈: 너 장미꽃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아?
미셸: 처음부터 안보였던 건 아냐. 그래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해.
      친부모님 얼굴을 떠올릴 수 있으니까.
 
미셸의 웃음을 보고 있자니 우빈은 가슴 한구석이 저릿해졌다.
아마 자신의 어머니가 실명을 했다면 하루종일 눈물만 흘렸을 텐데, 미셸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 웃음에는 어떤 그늘도 없었다.

 

우빈: 그럼 지금 부모님 얼굴도 기억해?
미셸:(고개 끄덕) 응, 물론 지금은 내 기억보단 조금 늙으셨을 거야. 벌써 마흔이 넘으셨으니까.
우빈: 우리 어머니는 스무살에 날 낳으셔서 가끔 사람들이 어머니가 아니라 누나인 줄 알아.
미셸: 우와~ 프린스 어머니는 정말 일찍 결혼하셨구나. 아주 아름다우실 거 같아.
우빈: 소녀같으셔. 내가 보기엔 미셸이 우리 어머니보다 더 성숙한 거 같아.
미셸:(방긋 웃고) 으흠~ 마음이 어리시니까 젊어 보이시는 모양이네.
우빈: 그런 셈이지. 장미꽃을 하루 종일 끼고 살아서 그런 걸수도 있고.
미셸:(반갑게) 프린스 어머니도 장미꽃을 가꾸셔?
우빈:(고개 끄덕) 집에 장미 정원이 있어. 어머니의 유일한 취미생활이야.
미셸: 우리집이랑 비슷하구나. 나중에 초대해서 우리집 장미 정원 보여줄게.
우빈: 나야 영광이지.

 

하지만 미셸이 실제로 우빈을 초대한 적은 없었다.
물론 우빈은 거기에 실망하지 않았다.
매일 미셸과 함께 점심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성 프랜시스에서 자신보다 더 가까운 사람이 없을 거라는 확신만 날로 커졌을 뿐이었다. 
경민의 권유로 우빈은 점심시간마다 미셸과 함께 음악실에 있다는 얘기를 떠벌리진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성 프랜시스의 천사를 독점하고 있다는 만족감에 젖은 우빈이 경민에게 입단속을 요구했었다.

 

첫 날 악수한 걸 제외하면 우빈과 미셸 사이에는 어떤 신체적인 접촉도 없었다.
그렇지만 우빈은 미셸의 노래를 들으면 천국에 있는 듯한 기쁨을 느꼈고, 미셸과 속깊은 이야기를 나눌 때면 F4 친구들만큼이나 친밀한 느낌을 받았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음악실을 나올 때마다 우빈은 '플라토닉 러브가 이런 것이구나'하고 생각했다.
가끔 F4 친구들과 통화하면서 이정이 새로 만난 여자들의 얘기를 들을 때마다 우빈은 속으로 '그건 진정한 만남이 아니다'라고 생각했다.
진정한 사랑에 눈을 뜨지 못하고 가벼운 만남을 즐기는 이정이 은근히 측은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경민으로부터 미셸의 생일이 6월초라는 것을 확인한 후, 우빈은 2주 가까이 선물을 어떤 것으로 할까 고민했다.
결국은 연꽃을 본 적 없다는 말을 떠올려 우빈은 송회장이 붙인 조직원들을 시켜 연꽃을 구했다.
다행히도 미셸의 생일은 평일이었다.
우빈은 생일 선물로 연꽃을 주면서 사랑고백을 하겠다고 다짐했다.
경민으로부터 크리스토퍼 클리어워터(Christoper Clearwater)가 얼마나 우수한 학생인지, 신사로서 명성이 자자한지 여러 번 들었지만 우빈은 미셸이 자신에게 마음이 있다고 자신했다.

 

드디어 기다리던 미셸의 생일날이 오자 우빈은 점심도 대충 먹고는 서둘러 음악실로 뛰어갔다.
피아노 반주와 함께 미셸의 청아한 노래소리가 음악실밖으로 흘러나왔다.

 

설레이는 마음을 안고 음악실로 들어왔을 때, 우빈의 눈에 평소와는 다른 풍경이 보였다.
미셸은 피아노 옆에 서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고, 처음 보는 남학생이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었다.
짙은 갈색 머리에 주근깨가 조금 있는 하얀 피부, 청회색 눈동자에 조각같은 얼굴을 한 미소년이 행복한 표정으로 미셸을 보고 있었다.
미셸도 사랑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환하게 웃으면서 그 남학생을 바라보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두 사람 주위에는 그 누구도 감히 접근하기 힘든 장벽이 둘을 에워싼 것 같았다.
경민이 말했던 공인받은 환상의 커플이라는 게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미셸의 노래가 끝난 후, 우빈은 미소년이 자리에서 일어나 미셸에게 입맞춤을 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그 자리에 얼어붙은 우빈을 발견한 건 미셸이 아니라 미소년이었다.

 

크리스: 거기 누구야? 이 시간엔 미셸이 성악연습을 하기 때문에 아무도 못들어오는데.

 

미셸은 재빨리 보이지 않는 눈으로 우빈을 바라보며 반가움의 미소를 지었다.

 

미셸: 어서 와 프린스. 어제 크리스가 귀국해서 오늘 같이 학교에 왔어.
     (크리스 보며) 크리스, 이쪽은 내가 말했던 한국인 친구 프린스야.

 

크리스는 잔잔한 웃음을 지으며 우빈에게로 걸어오더니 손을 내밀었다.
우빈은 기계적으로 크리스와 악수를 했다.

 

크리스: 이렇게 만나서 정말 반가워, 프린스. 미셸이 네 얘기 많이 했어.
우빈: 나도 크리스토퍼 클리어워터에 대한 얘기 좀 들었어. 정말 듣던대로 두 사람 환상의 커플인데.
크리스: 고마워. 나 없는 동안 미셸의 말벗이 되어줬다고 들었어.
우빈:(어깨 으쓱하며) 그냥 한국에 대한 얘기를 좀 한 거 뿐야.
      오히려 내가 늘 아름다운 미셸의 노래를 들어서 좋았지.

 

크리스는 다시 피아노 의자에 앉았고 미셸도 크리스의 옆자리에 앉았다.
미셸은 지금까지 본 적 없는 행복한 얼굴이었다.

 

미셸: 프린스, 꽃을 가져온 거야? 아주 좋은 향기가 나는데.

 

우빈은 미셸의 말에 겨우 정신을 차리고 연꽃을 미셸의 앞에 내밀었다.

 

우빈: 생일 축하해 미셸. 널 닮은 연꽃이야.

 

미셸은 함박 웃음을 터트리며 의자에서 일어나 연꽃을 받았다.
눈을 감고 향기를 음미하더니 조심스럽게 오른손으로 연꽃을 만지기 시작했다.

 

미셸: 응... 정말 연꽃은 크구나. 장미꽃보다 훨씬 커. 꽃잎도 아주 두꺼워.
우빈: 크고 무거워도 연꽃은 꼭 물 위에 떠 있어.
미셸:(감탄하는 표정) 신기하네. 정말 고마워 프린스.

 

미셸은 우빈의 뺨에 감사의 키스를 했다.
아주 살짝 미셸의 입술이 닿았을 뿐인데 우빈의 심장이 정신없이 뛰었다.
크리스에게 상기된 얼굴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 우빈은 헛기침을 하면서 진정하려고 애썼다.

 

우빈: 맘에 든다니 나도 기뻐.
크리스:(신기해하며) 이게 미셸의 한국 이름이란 말이지? 정말 둘이 닮았는 걸.
미셸: 향기가 아주 맘에 들어. 나중에 드라이 플라워로 만들어야겠어.
      프린스, 이렇게 멋진 선물을 해줘서 고마워.
크리스: 오늘 저녁에 미셸의 생일축하파티를 할 건데 프린스도 오지 않을래?
        우리 부모님도 프린스 보면 반가워 하실 거야.

 

우빈은 미셸의 허리에서 손을 떼지 않는 크리스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태도가 우빈은 그저 친구일 뿐이라고 은근히 강조하는 것 같았다.

 

우빈: 미안하지만 나도 오늘은 약속이 있어. 한국에서 가족이 오거든.
미셸: 정말? 나 오늘 프린스에게 장미 정원을 보여줄 거라고 정원사한테 손질 잘해달라고 부탁했는데.
우빈: 다음에 초대하면 꼭 찾아갈게.
크리스: 아쉬운데. 클리어워터 가의 장미 정원에 대한 프린스의 소감을 들어보고 싶었는데 말야.
우빈: 오늘만 날은 아니니까.
미셸: 그럼 멋진 선물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프린스가 좋아하는 노래 불러줄게. 뭐 듣고 싶어?

 

미셸은 피아노 의자에 앉고는 크리스에게 일어나라고 부탁을 했다.
자신만을 위한 노래를 해주겠다는 제안에 우빈은 즉시 슈베르트의 세레나데를 요청했다.
미셸은 방긋 웃고는 피아노 연주와 함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우빈은 황홀함에 빠져 미셸의 노래가 만든 환상에 빠졌다.

 

그 날 이후, 크리스는 더 이상 음악실에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우빈은 음악실에 들어오면 크리스의 존재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경민이 말했던 대로 남학생들이 왜 미셸에게 감히 접근할 생각을 하지 못했는지 뼈저리게 깨달았다.
마치 셰익스피어의 '한여름밤의 꿈'에서 요정의 왕 오베론이 연인들에게 사랑의 약을 눈에 바른 것처럼, 미셸과 크리스는 그렇게 열렬히 서로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우빈은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고백도 하지 못한 자신의 처지가 초라하게 느껴지던 우빈은 송회장으로부터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한국으로 돌아가서 F4 친구들을 다시 만나는 건 좋았지만, 영원히 미셸과 헤어질 거라는 사실에 우빈은 귀국을 망설였다.
결국, 송회장에게 여름방학이 시작하면 돌아가겠노라고 대답을 했다.

 

6월 중순, 9학년의 마지막 날에 우빈은 마지막으로 음악실을 찾아갔다.
여느때처럼 미셸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문소리를 듣고는 자신을 향해 미소를 짓는 미셸을 보자니 우빈의 마음이 아파왔다.

 

미셸: 드디어 내일이면 여름방학이네.
우빈: 그러게나 말야.
미셸: 프린스는 한국으로 갈 거야?
우빈: 그래야지. 미셸은 방학때 뭐할 거야?
미셸: 가족과 함께 유럽여행을 갈 거야. 이번엔 북쪽으로 가서 백야를 보기로 했어.
우빈: 나도 예전에 백야를 본 적이 있는데 참 신기하더라. 물론 잘 때는 햇빛이 좀 성가셨지만 말야.
     (뜨끔해서) 아차...

 

우빈은 그만 "넌 볼 수 없는데'라고 말할 뻔 했다.
그렇지만 미셸은 우빈의 못다한 말을 알아들었는지 예의 환한 웃음을 우빈에게 보여줬다.
 
미셸: 괜찮아 프린스. 빛은 보이니까 말야.

 

우빈은 미셸의 미소를 보자니 미안하기도 하고 아쉽기도 했다.
자신도 따라가서 미셸과 함께 백야를 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미셸의 옆자리엔 크리스가 있었다.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면 볼 수 없는 우빈과 달리 크리스는 앞으로 영원히 미셸의 옆에 있어줄 사람이었다.

 

미셸: 언제 한국으로 가? 가기 전에 초대하고 싶어.
우빈: 내일 바로 갈 거야. 어머니와 쌍동이 여동생이 애타게 날 기다리고 있거든.

 

우빈은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지금 미셸과 작별인사를 하고 싶지 않았다.
우빈에게는 마지막까지 환하게 웃는 미셸의 천사같은 얼굴을 눈속에 담아두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미셸: 그럼 당분간은 볼 수 없겠구나. 방학이 끝난 후에야 초대할 수 있겠네.
우빈: 그렇겠지.
미셸: 혹시라도 유럽에 여행가면 연락해.
우빈: 그럴게.
미셸: 여름방학 잘 지내, 프린스.

 

우빈은 머뭇거리다 겨우 용기를 내어 미셸에게 다가갔다.
미셸도, 마이클도 우빈이 다가오는 동안 가만히 있었기에 우빈은 조심스럽게 양 손으로 미셸의 어깨를 잡았다.
프랑스식 인사를 하기 위해 우빈은 미셸과 뺨을 맞대고 입으로 '쪽'소리를 냈다.
그 순간,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달콤한 미셸의 향기가 우빈의 머리를 마비시키는 것 같았다.

 

우빈: 즐거운 여름방학 보내, 미셸.

 

겨우 미셸과 떨어진 후 우빈은 있는 힘을 다 쥐어짜내 평소처럼 가볍게 인사를 했다.
마치 여름방학이 끝난 후 다시 만날 것처럼 말이다.

 

미셸은 미묘한 우빈의 마음을 눈치챘는지 아주 잠깐 가만히 있었지만 이내 웃어주었다.
다시 피아노 의자에 앉은 미셸은 우빈에게 노래를 주문받았다.

 

미셸: 이제 10주동안 볼 수 없으니깐 특별히 프린스의 신청곡을 받아줄게. 듣고 싶은 노래 있어?
우빈: 맨 처음 들었던 노래 불러줄 수 있어? 파니스 안젤리쿠스.
미셸:(생긋 웃으며) 얼마든지.

 

미셸은 피아노를 연주하면서 파니스 안젤리쿠스를 부르기 시작했다.
우빈은 조용히 미셸의 노래를 녹음하면서 눈은 미셸에게서 떼지 않았다.
지금 이 모습을 영원히 간직할 수 있기를 빌고 또 빌었다.

미셸의 노래가 끝나고 우빈은 박수를 쳤다.

 

우빈: 여름 내내 미셸의 노래가 그리울 거야.
미셸: 가을이 되면 또 불러줄게. 나도 여름 내내 프린스가 그리울 거야.
우빈: 성 프랜시스의 천사가 날 그리워해줄 거라 말해주니 기쁜데.
미셸:(약간 당황) 프린스까지 그렇게 말하니까 좀 쑥스러운 걸. 난 그냥 미셸일 뿐인데.
우빈: 이름 그대로 미셸은 천사야.
미셸:(방긋 웃고) 이름만.

 

우빈은 지금 미셸에게 키스를 해주고 싶었다.
지금까지 무수한 연상의 여성들을 사귀면서 먼저 키스하고 싶은 마음이 들긴 처음이었다.
하지만 우빈은 지금 자신의 처지를 가장 확실하게 알았다.
어둠에 속한 자신은 천사인 미셸과 영원히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며 우빈은 자신의 욕망을 억눌렀다.

 

우빈: 이제 그만 가볼게. 친구들이랑 같이 사진을 찍기로 했거든.
미셸: 알았어. 잘 가 프린스.
우빈: 안녕 미셸.

 

우빈은 눈을 미셸에게 고정시킨 채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등이 음악실 문에 닿자 잠시 가만히 서있더니 과감하게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문을 닿기 전에 마지막으로 우빈은 자신을 보면서 미소짓는 미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음악실 문이 닫히자 우빈은 오랫동안 문고리에서 손을 떼지 못한 채 고개를 숙이며 미셸을 속으로 불렀다.
'안녕, 미셸... 내 첫사랑, 나의 천사... 영원히 안녕...'

 

 


-우빈의 집-

 

우빈은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정신없이 옷방에 딸린 작은 창고를 뒤졌다.
메이드에게 절대로 이 장소를 정리하지 말 것을 명령했기 때문에 매우 어지러웠다.
한동안 상자들을 닥치는 대로 열었던 우빈은 드디어 원하던 것을 찾았다.
꽁꽁 감싼 비닐랩을 벗겨내자 펜형 녹음기가 우빈의 손바닥에 떨어졌다.
재빨리 방으로 나와 닥치는 대로 서랍을 뒤진 우빈은 수은 건전지를 녹음기에 넣고는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우빈이 눈을 감자 열일곱 살의 6월이 다시 펼쳐졌다.
햇살이 가득한 음악실에서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부르던 미셸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한참동안 미셸이 부르는 파니스 안젤리쿠스에 빠져있던 우빈은 마침내 녹음기의 전원을 껐다.

 

우빈은 다시 녹음기에서 전원을 빼내고는 창고로 들어가 다시 한 번 비닐랩으로 녹음기를 꽁꽁 싸매서 맨 밑서랍에 집어넣었다.
이 모든 과정은 천천히 진행되었고, 그 동안 우빈의 표정은 아쉬움이 가득했다.

 

샤워를 마치고 다시 방에 들어온 우빈은 mp3 플레이어를 꺼내 이어폰을 귀에 꼽았다.
안락의자에 무너지듯 앉아서는 한참 재생목록을 뒤져서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LA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비행기안에서 내내 들었던 K2의 '그녀의 연인에게'가 다시 우빈의 마음을 위로해줬다.

 


알고 있나요 지금 그대 가진 행복
내겐 아픈 이별이란걸
그녀가 나를 떠나가기 전에
나도 그대처럼 행복 할 수 있었죠

 

설레임이 가득한 그대 하루만큼
나의 하룬 길고 외로워
어쩌면 나는 바랬는지 몰라
두 사람의 사랑 또한 이별이 되길

 

이런 나를 이해해요
그댈 미워할 수 밖에 없는날
그대가 난 눈물이 날만큼 부러웠었죠

 

꼭 하나만 바래요 날 대신해
그녈 영원히 지켜줘야 해요
내가 못 이룬 사랑 이제는 다 모두 이룰 그대
행복하길 그녀의 사랑이니까

 

이세상에 누구보다 그대
좋은 사람이길 바래요
나보다 더 그녀를 아끼고 사랑할 사람

 

꼭 하나만 바래요 날 대신해
그녈 영원히 지켜줘야 해요
내가 못 이룬 사랑 이제는 다 모두 이룰 그대
행복하길 그녀의 사랑이니까

 

꼭 하나 기억해요
이세상에 난 추억이 되어 잊어지겠지만
오랜 간절함에도 내게 허락되지 않던 사람
모두 가진 바로 그대라는 걸

 


'부디 행복하게 지내길... 나의 천사... 나의 미셸...'
그날 밤, 우빈은 6년만에 되살아난 천사의 기억을 또다시 가슴 밑바닥에 봉인시켜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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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설명을 보니 우빈이 잠시 도피성 유학을 다녀왔다고 하길래, 이 점에 아이디어를 얻어서 적어봤습니다.

설마 우빈이에게 첫사랑이 없겠냐 하는 맘도 있고 해서요 쿨럭....

 

파니스 안젤리쿠스는 파바로티가 부른 버전이 제일 유명합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미셸의 노래를 상상하시려면 예전 느낌표의 '눈을 떠요'에서 개안 수술을 받을 때 흘러나왔던 노래를 떠올리시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덤으로 말씀드리면 미셸은 위의 설명대로 대천사구요, 크리스토퍼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의미합니다. 상류사회에서 꽤나 많이 쓰는 남자이름이고 저도 참 좋아하는 이름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