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기억의 주인

[소을 중편] 기억의 주인 19

지혜의 여신 2009. 6. 28. 22:45

 

 

 

-F4 라운지-

 

지후는 소파에 누워 느긋하게 낮잠을 즐기고 있고, 우빈은 준표와 함께 전공 수업 세미나 자료를 검토하느라 분주했다.
이미 신화그룹의 경영에 일정 부분 참여중인 준표는 실제사례에 더 치중했고, 실전경험이 없는 우빈은 이론적 완성도에 더 집중해서 작업중이었다.
운좋게 재벌집에서 태어났다고 은근히 F4를 무시하는 교수들에게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고자 하는 욕심에 우빈과 준표 모두 열심이었다.

 

우빈: 우리 잠시만 쉴까? 벌써 두 시간째다.
준표: 그래야겠다. (시계 보고) 이제 잔디밭 올 때 됐는데...
우빈:(눈꼬리 올라가며) 너 오늘은 금잔디랑 도망 못가는 거 알지?
준표:(두 손 들고) 알아, 알아.
     
우빈과 준표가 커피를 잔에 따르자마자, 잔디가 라운지로 들어왔다.
금새 활짝 웃는 준표와 반갑다는 표정을 짓는 우빈, 낮잠 자는 지후를 훑어보던 잔디는 인사도 없이 뚱한 표정으로 의자에 앉았다.
준표는 또 가을의 일인가 싶어 잔디 앞에 커피를 놓았다.

 

준표: 또 친구 일이야?
잔디: 구준표, 이정 선배한테 무슨 연락 온 거 있어?
준표: ? 없는데 왜?
잔디: 오늘 가을이랑 같이 강의를 들었는데 애가 표정이 나쁜 거야.
우빈: 무슨 일인거래?
잔디:(한숨) 글쎄... 예감이 불길하다고, 아무래도 이정 선배한테 나쁜 일이 일어난 거 같다고 안절부절 못하는 거에요.    
준표: 이번에도 소주잔 깨뜨렸대?
잔디: 일어나보니까 눈가에 눈물자국이 남았더대.. 꿈이 잘 기억은 안나도 무지 나빴다나.. 에휴~
      불안해하는 모습 옆에서 보고있자니 정말 답답한 거 있지.
우빈:(관심있게 듣고) 흠.. 그렇단 말이지... 그럼 확인해줘야겠는걸.
     (시계 보고) 마침 시간도 맞는 거 같은데...    

 

우빈은 잔디와 준표가 뭐라 할 새도 없이 바로 휴대전화를 꺼내 전화를 걸었다.
스피커를 킨 덕에 라운지 전체에 기계음이 흐르다 달칵 소리와 함께 이정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정: 송우빈, 무슨 일이야?
우빈: 너 별 일 없는 거냐?
이정:(어이없다는 말투) 뜬금없이 뭔 소리야?
우빈:(느긋하게) 글쎄, 가을이가 기억나지 않는 어젯밤 꿈 속에서 울었다고 예감이 불길하다는 거야.
      너한테 무슨 일이 생긴 것 같다고 하루종일 안절부절 못하고 있대서 말이지.
이정:(당황하는 목소리) 뭐, 뭐? 가을양이 나한테 나쁜 일 생겼다고 불안해 한다고?
우빈: 그렇다니깐. 별 일 있어, 없어?
이정:(버벅) 다, 당연히 없지!
우빈: 없으면 됐고. 근데 너 왜 말을 더듬고 그래?
이정: 황당해서 그런다. (잠시 머뭇) 근데 가을양은 어떻게 지내?
우빈: 평소랑 똑같지. 열심히 공부하고 학과일하고.
      너무 바빠서 나나 준표도 못본 지 꽤 됐다.

 

준표는 통화내용을 듣다가 성질난 표정으로 우빈의 손에서 휴대전화를 뺏었다.
마치 이정이 눈앞에 있는 것처럼 으르렁대며 통화하기 시작했다.

 

준표: 야, 소이정.
이정: 어이, 구준표.
준표: 너 그 전시 언제 끝나는 거야?
이정: 이제 남부 지방은 끝났어.
준표: 뭐? 아직도 남았단 말야? 너 벌써 일본 간 지 두 달이야.
이정: 말했잖아. 일본 순회 전시라고.
준표: 대체 언제 끝나는데?
이정: 계획대로 하면 7월에나 끝날 걸.
준표:(버럭) 전시 작작하고 좀 와라! 잔디밭 친구 보기 안쓰러워 못살겠다!
이정: 미안하다. 이만 끊을게.

 

이정이 먼저 전화를 끊자 준표는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전화기를 던지려고 했다.
미리 눈치를 챈 우빈이 잽싸게 휴대전화를 도로 뺏지 않았으면 박살났을 지도 몰랐다.

 

우빈: 워, 워~ 준표, 네 건 던져도 상관없지만 내건 안된다고.
준표:(씩씩대며) 진짜 답답해서 못살겠다.
지후: 워낙 지은 죄가 크잖아.

 

어느 틈에 지후가 깨어나 커피에 우유를 타기 시작했다.
모두 통화에 집중하느라 지후가 일어나서 다 듣고 있다는 걸 몰랐다.

 

잔디: 어쨌든 이정 선배 괜찮은 모양이네요.
준표: 그런 거 같긴 한데...
지후: 잔디야 가을이한테 얼른 연락해 줘. 아님 계속 걱정할 걸.
잔디:(한숨) 그래야겠네요.

 

잔디가 구석으로 가서 가을에게 전화를 하는 동안, 우빈은 잔디를 흘깃 보고는 재빨리 준표와 지후를 봤다.

 

우빈:(작게) 이정이 녀석 목소리 좀 이상한 거 같지 않아?
준표:(고개 끄덕) 좀 가라앉았어.
지후: 무슨 일이 있긴 한 거 같은데...
우빈: 추가을 예감이 아주 정확한 걸.
지후:(기지개 켜면서) 사랑의 힘이겠지.
준표: 결국 가을이 안부 묻는 거 보면 이정이도 맘 있는 거 아냐?
우빈: 아니면 은재 잊겠다는 말도 안하겠지.
준표: 난 암만 생각해도 이렇게 7월까지 기다릴 수 없다고 봐.
지후: 가을이 또 일본으로 데려가려고? 힘들텐데...
준표: 왜?
지후: 벌써 5월말이라서 말야. 가을이는 기말고사 준비하느라고 정신없을 게 뻔하거든.
우빈: 만나게 할 순 없어도 마음은 전할 수 있지.

 

준표의 의아해하는 얼굴을 보고 우빈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지후는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머리위로 느낌표가 떠오른 듯한 표정이 되었다.
막 통화를 마치고 준표의 옆으로 온 잔디는 무슨 말이 오고 갔는지 몰라 의아한 표정으로 F3를 살펴봤다.

 

 


-일본, 요코하마-

 

가고시마 전시를 끝으로 이정은 재빨리 중부로 이동했다.
아버지 때문에 잊고 싶은 기억이 생겨버린 가고시마에 1분, 1초도 더 있고 싶지 않았다.
원래 계획은 며칠 더 머물며 심수관가의 사쓰마야키에 대한 가르침을 받으려고 했지만, 다음 기회로 미룰 수 밖에 없었다.
그나마 마지막날에 우빈의 전화를 받고 가을이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덕분에 절망에서 빨리 벗어날 수 있었다.

 

사실 우빈의 전화를 받았을 때, 이정은 전날 아버지와의 끔찍했던 기억으로 매우 기분이 나쁜 상태였다.
그렇지만 우빈이 이유없이 전화할 리 없다는 걸 잘 알기 때문에 겨우 목을 가다듬고 전화를 받았다.
혹시나 가을에게 무슨 일이 생긴건 아닌지 걱정하며 전화를 받았는데, 우빈은 의외로 가을이 기억나지 않는 꿈속에서 울었다며 자신에게 나쁜 일이 일어난 줄 알고 있다고 말해줬다.
그날 밤, 미칠듯이 가을이 보고싶었는데 그 마음이 가을의 꿈에 전달되었던 걸까.

 

우빈의 전화를 받은 후부터 내내 이정은 가을이 아직도 자신을 깊이 생각해주고 있다고 믿고 싶었다.
작게나마 그렇게 희망을 갖고 싶었다.
하지만 그 생각을 할 때마다 동시에 떠오르는 건 아버지의 냉정한 말이었다.

 

소교수: 왜 네가 우송의 후계자가 되었다고 생각하냐? 네 형이 나갔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게냐?
이정:(반항조로) 그거 말고 또 뭐가 있나요? 형이 나가기 전까지 제 작품에 관심이라도 가져줬어요?
      아니, 제가 도예하는 줄은 아셨던 거에요?
소교수: 넌 날 닮았기 때문이야. 일현이는 너무나도 맑고 올곧은 아이라 우송을 이끌어나갈 수 없다고 진작 생각했었다.

 

그 말을 듣고 나서 얼마나 절망했었는지 몰랐다.
자신이 누구보다도 증오했던 아버지를 닮았다니... 이정으로서는 사망선고나 다름 없는 말이었다.
그런 어두운 마음으로 아무도 사랑할 수 없다고 믿었다.
처음에는 은재의 마음을 오해해서 떠나보냈는데, 다음에는 은재에 대한 집착으로 가을에게 잔인한 상처를 주었다.
어쩌면 은재가 갑자기 하늘로 가버린 이유가 자신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오랫동안 시달린 이정이었다.
만약 가을도 자신의 옆에 있다가 자신이 또 상처를 주거나 잘못된다면 그때는 정말 견딜 수 없을 게 분명했다.
 
아버지와의 만남으로 오랜 상처가 다시 벌어진 이정은 가을에게 연락할 생각도 못한 채 그저 전시에만 집중했다.
심수관가 사기장의 호평은 중부 지방까지 퍼져나가 요코하마 지역 언론의 관심이 가고시마 못지 않게 컸다.
지금 이정을 지탱시켜 주는 힘은 전시와 형과 만나기로 한 약속 두 가지였다.
하루라도 빨리 형을 만나 아버지를 만난 이야기를 하고, 가을에 대한 조언을 듣고 싶었다.

 

이정이 내뿜는 어두운 분위기를 감지한 듯, 호텔바의 바텐더는 아주 조심스럽게 이정에게 다가갔다.

 

바텐더: 손님, 드라이 마티니 한 잔 더 하시겠습니까?

 

이정은 잠시 멍하니 바텐더를 바라봤다.
한 잔 더할까 하다가 다음날 전시를 위해 그만해야겠다 싶었다.

 

이정:(자리에서 일어나며) 아니, 됐습니다.

 

이정은 호텔 통유리로 비치는 요코하마의 야경을 흘깃 보면서 독백처럼 중얼거렸다.

 

이정: 가을양이 보면 예쁘다고 할려나...

 

 


-신화대-

 

지후의 야외연습장소에서 가을은 조용히 바이올린 연주를 듣고 있었다.
가을이 좋아하는 바흐의 '안나 막달레나를 위한 노트-미뉴엣 G장조'가 지후의 바이올린에서 흘러나와 공간을 채웠다.
한참 지후의 연주에 심취하던 가을은 연주가 끝나자 열렬히 박수를 쳤다.

 

가을: 오빠~ 정말 멋있어요.

 

지후는 만족스럽게 웃고는 가을의 옆에 앉았다.

 

지후: 참 좋은 곡이지?
가을:(환하게 웃으며) 예. 저 원래 안나 막달레나를 위한 미뉴엣 무지 좋아하거든요. 근데 바이올린 연주는 첨 들어요.
지후: 원제는 안나 막달레나를 위한 노트 중 미뉴엣 G장조야.
      바흐가 두 번째 부인인 안나 막달레나가 피아노 연습을 하라고 만든 곡이지만 난 그냥  바이올린으로 연주하는 게 더 좋아.
가을:(눈 동그래져) 안나 막달레나가 두 번째 부인이었어요?
지후: 응. 처음 부인은 마리아 바르바라였는데 바흐보다 먼저 죽었어. 그래서 바흐가 오랫동안 상심에 빠졌지.
      그러다 재혼한 건데 안나 막달레나는 뛰어난 성악가였을 뿐만 아니라 아주 마음씨가 고운 사랑스러운 여인이었다고 해.
      그리고 바흐도 그녀를 아주 사랑했다고 그렇게 후세에 알려졌어.
가을:(잔잔한 미소) 그랬을 거에요... 아님 이렇게 귀엽고 사랑스러운 곡이 나오지 않았을 걸요.
지후: 사랑의 힘이란 참 위대한 거야.
      아내를 잃은 상심에 빠진 작곡가에게 다시 훌륭한 곡을 쓰게 만드는 것처럼...

 

가을은 어쩐지 그 말에 뼈가 들어있는 것 같았다.
'설마 지금 나에게 하는 조언?'
하지만 지후의 얼굴을 봐도 도저히 무슨 생각인지 읽을 수가 없었다.
때로, 아니 자주 가을은 지후의 생각을 읽지 못했다.
지후는 가을이 어릴 때부터 항상 원했던 그런 다정하고 자상한 오빠가 되어주었지만 수수께끼 단지를 품고 사는 사람같다고 자주 생각했다.
  
지후: 이제 곧있으면 소이정 생일이야.
가을:(깜짝 놀라서) 예?
지후: 작년엔 우리가 이정이 있는 곳으로 가서 생일파티했는데 올해는 그냥 선물만 보내려고.
가을: 설마, 이번엔 만나주겠죠.
지후: 간다해도 넌 빠질 거지? 기말고사 기간이니까.
가을:(당황) 그렇...죠... 시험... 쳐야죠...
지후:(싱긋 웃고) 그래서 안가는 거야.
가을: 네?
지후: 이정이 가장 보고싶어하는 사람이 빠진 파티는 의미가 없으니까.
가을:(당황) 다들 친형제나 다름없이 친하다면서...
지후: 형제라도 채울 수 없는 빈자리가 있거든.
가을: 나한테 너무 희망주지 말아요.

 

가을은 저도 모르게 그만 속마음을 내뱉고 말았다.
지후는 그 말을 듣고는 가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지후:(타이르듯) 이정이 기다리고 있잖아.
가을: 은재씨 잊는다 해도 나한테 온다는 보장은 없잖아요. 또 욕심내기 싫어요.
      그냥 난 선배가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바래요...
지후: 이정이 아버지는 말이야, 이런 말 하기 참 슬프지만 여성편력이 아주 심한 분이야.
가을:(뜬금없는 말에 놀라) 예?
지후: 그래서 이정이는 자신이 아버지를 닮아서 누구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없다고 생각했어.
가을: 왜 그런 생각을?
지후: 나중에 은재와 정식으로 사귄 후에야 그 얘기를 해줬어.
      자긴 아버지처럼 평생 진실한 사랑 못할 줄 알았다고... 그래서 고등학교 때 은재와 멀어졌다고...
가을: 그래도 은재씨 사랑했잖아요. 이정 선배가 얼마나 깊이 사랑했는데...
지후: 그러니깐.. 이정이는 우리가 생각한 거보다 훨씬 가족들에게 받은 마음의 상처가 깊었나 봐.
가을: 정말 안됐어요. 난 아파도 부모님 사랑은 많이 받았는데... 겨울이에게 미안할 만큼...

 

가을은 이정에 대해 몰랐던 사실을 하나씩 들을 때마다 너무 마음이 아팠다.
이정이 그동안 얼마나 외로웠을까, 얼마나 마음이 추웠을까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일본으로 가서 위로해주고 싶었다.

 

잔뜩 흐려진 가을의 얼굴을 보면서 지후 역시 새삼스럽게 이정이 참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지난 겨울 이정이 가을에게 했던 잘못을 잊은 것은 아니었다.
솔직히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가을을 이정에게 데려다 줄 수 있었지만, 잘못된 시작을 다시 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정이 자신의 마음을 먼저 깨닫게 해야만 했었다.
알고보면 상처많은 이정이 마음을 정리하기도 전에 가을에게 또 다시 기대게 할 수 없었다.
착한 가을은 이정을 보면 맘이 약해져서 분명 이정을 다시 받아들일 확률이 크니까.
'소이정, 다 네 업보인 거야. 오빠로서 누이동생 울린 녀석에게 또 기회주는 거 정말 어렵거든.'       

 

지후: 어쨌든 그건 그거고, 너도 이정이한테 생일선물 할 거지?
가을:(깜짝 놀라) 예?
지후: 이왕이면 같이 보내면 좋잖아.
가을:(얼떨결에) 네.. 그렇죠...
지후: 6월엔 기말고사 준비하느라 바쁠테니까 지금부터 천천히 만들어. (가을 보며 씩 웃는)

 

가을은 어쩐지 지후의 페이스에 말린 기분이 들었지만 벌써부터 무슨 선물을 할까 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들었다.
'오빠 말대로 선물은 보내도 괜찮겠지...'

 

 


-일본, 도쿄-

 

드디어 이정이 간절히 기다리던 6월이 왔다.
일현과의 만남을 위해 일본 민예관과 일정을 조정하느라 약간은 마찰을 빚었지만 전시기간을 늘리는 것으로 합의를 봤던 터였다.

 

사실 일본 민예관은 이정에게는 추억이 깃든 장소였다.
어렸을 때, 일현과 함께 전시된 분청자상감어문병과 청자삼감운학문매병, 백자청화모란문주자를 보며 얼마나 감탄했었던가.
일현과 이정은 크면 꼭 이런 멋진 박물관에 자신들이 빚은 도자기를 전시하겠노라고 꿈을 꾸었다.
물론 그 때엔 일현이 먼저 여기에서 전시를 할 거라고 믿었지만, 실제로 작품을 전시하게 된 사람은 이정 본인이었다.
민예관의 관장은 놀랍게도 이정을 기억하고 있었다.

 

관장: 그 옛날 꼬마신사가 이렇게 커서 전시를 하게 되다니 시간 참 빠릅니다.
이정:(감격) 절 기억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관장: 조부님은 어떻게 지내십니까?
이정: 덕분에 건강하십니다.
관장: 참 훌륭한 분이셨습니다. 아직도 많이 기억이 납니다.
이정: 저도 할아버님 전시를 보면서 언젠가 이 곳에서 전시를 하고 싶다고 꿈을 꾸었는데, 이렇게 빨리 실현될 줄은 몰랐습니다.
관장: 그 때에도 흙놀이를 하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조부님께서 그 모습을 아주 흐뭇하게 보셨지요.
      우송과의 인연을 이렇게 대를 걸쳐 이을 수 있어서 기쁩니다.
이정: 부족한 제 작품의 전시를 허락해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관장:(고개 저으며) 아닙니다. 조부님, 부친과는 또 다른 세계를 구축하셨더군요.
      심수관가의 사기장이 과연 올바른 평을 내렸습니다.
      젊은 분이 벌써 이렇게 깊이있는 작품을 만들어내다니 그저 감탄할 뿐입니다.
이정:(상기된 얼굴로) 과분한 칭찬을 들으니 송구스럽습니다. 

 

전시 전날 저녁 식사때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며, 이정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는 물론이고, 할아버지와도 비교해서 손색이 없다고 칭찬해주니 도예가로서의 자신의 입지를 구축하고 있다 싶어 기뻤다.
그 때 누군가의 손이 이정의 어깨위에 올라왔다.
깜짝 놀란 이정이 뒤를 돌아보고 손의 주인을 확인하고는 일본에서 처음으로 환하게 웃었다.

 

이정: 형, 벌써 왔어?
일현:(싱긋 웃으며) 이왕 대회보는 김에 여름 휴가 조금 빨리 가기로 했지.

 

형제는 반가움에 서로 얼싸안았다.
일현은 포옹을 풀자마자 이정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봤다.

 

일현: 내 동생 얼굴이 많이 상했네. 전시가 너무 빡빡했던 거니?
이정: 아냐, 잠깐 사고를 당해서 그래.
일현:(깜짝 놀라) 사고라니?
이정: 나중에 얘기해. 일단 온 김에 전시장 둘러볼래?
일현:(장난스럽게) 오~ 소이정 도예가님의 설명을 직접 듣는 영광을 하사하는 거야?
이정:(씩 웃으며) 그래. 영광으로 알라고.

 

일현은 전시장을 둘러보며 이정의 작품을 하나하나 유심히 살펴봤다.
비록 오래전에 도예를 그만뒀다 해도 일현의 안목을 잘 아는 이정은 약간 긴장했다.
자신의 작품을 알아줬던 사람은 일현과 할아버지, 은재뿐이었다.
모든 작품을 다 살펴본 일현에게 이정은 조심스럽게 평을 물었다.

 

이정:(긴장한 표정) 형이 보기엔 어때?
일현:(대견하단 표정으로 이정 보며) 또 성장했구나.
이정:(얼굴 환해지며) 그럼?
일현: 네 작품을 보고 있으니까 밑바닥을 확인하고 올라오는 느낌이 들어.
이정: 형이 그렇게 말해주니 정말 기쁜데.
일현:(이정 머리 쓰다듬으며) 이 바닥을 떠난 형의 말에 왜 그렇게 신경쓰니.
이정: 날 가장 먼저 알아봐줬잖아. 난 항상 형이 잘했다고 말해주지 않으면 안심이 되지 않았는 걸.

 

일현의 눈에 보이는 이정의 얼굴은 그 옛날 함께 도자기를 빚던 꼬마같은 천진함이 남아있었다.
'이제에야 우린 다시 옛날로 돌아왔구나.'
일현도 옛날처럼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일현: 언제 전시 시간 끝나니?
이정:(시계보고) 형 1시간만 참아줘.
일현: 그럼 네가 저녁사는 거지?
이정:(어이없어) 형~ 동생한테 얻어먹으려고 하다니...
일현: 피식, 나 너땜에 여름휴가 포기했다.
이정: 알았어, 알았다고.
일현: 대신 술은 내가 살게. 됐지?
이정: 약속했다, 형.

 


전시가 끝난 후, 두 형제는 도쿄에서 가장 맛있다는 라면집을 찾아가 저녁을 먹었다.
물론 일현이 투덜거리긴 했지만 이정은 가볍게 무시했다.

 

라면집에서 나온 후 일현이 이정을 데려간 곳은 조그마한 선술집이었다.
이정은 일현을 따라 가게안으로 들어가면서 혼네라는 간판이 어쩐지 의미심장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젊은 가게 주인과 일현은  아는 사이인 듯 했다.

 

주인:(반갑게 웃으며) 오호~ 현이 자랑하는 동생이군.
일현: 맞아요. 내 동생 잘생겼죠?
주인: 형제 아니랄까 봐, 많이 닮았네. 동생이 왔으니 특별히 이 술을 한 병 대접하지.

 

주인은 호탕하게 일본 정통주를 내놓았다.
일현은 사양도 하지 않고 주인에게 윙크를 날리며 엄지를 들어올렸다.

 

이정: 고맙습니다. 저는 소이정이라고 합니다.
주인: 천재 도예가라고 형이 어찌나 자랑하는지 나도 꼭 한 번 보고싶었지.
이정: 형이 그렇게 말했나요?
주인:(고개 끄덕) 그렇고 말고.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라니까.
일현: 과장은 하지 말아요.
주인: 근데 키는 형이 더 크군. 하긴 형이면 한 가지 더 나은 게 있어야지, 하하하~

 

두 형제는 넉살좋은 주인의 입담에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자리를 잡은 형제는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일현: 무슨 사고가 났던 거니? 나 전혀 몰랐어.
이정: 가벼운 교통사고였어. 오사카에서 전시 다 끝내고 만찬회 가다가 초보운전차가 날 들이받은 거야.
일현:(깜짝 놀라) 얼마나 다쳤던 거야?
이정: 그냥 타박상이랑 뇌진탕이 다였어. 온천가서 일주일 푹 쉬니깐 낫더라고.
일현:(한숨쉬며) 어머니도 너무하시는구나. 아무리 집나가도 난 네 형인데 연락도 안주시고...
이정: 최실장이 와서 다 해결해줬어.
일현: 네 F4 친구들은? 그 애들이 와서 또 난리치지 않았어?
이정:(얼굴 어두워진다) 오긴 했는데... 나 만나지 않았어.
일현: 뭐?

 

일현은 놀라서 이정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조금 전까지 웃던 얼굴은 사라지고 이정의 표정은 심각해졌다.
일현은 도예실 앞에서 만났던 가을과 상관이 있을까 싶었다.

 

일현: 너 그 친구들이랑 형제나 다름없다고 늘 붙어다녔잖아.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이정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보는 일현의 얼굴을 빤히 봤다.
이제 진실을 말해야 할 시간이 왔음을 깨달았다.

 

이정: 형, 사실... 나 무지무지 큰 잘못을 하고 일본으로 도망왔어.
일현: 어떤 잘못이었는데? F4 친구들까지 만나지 않을 정도로 큰 잘못이라니?
이정: 사실은 그 친구들을 피한 건 아니었어... 아니, 피한 건 맞는데....
     (한숨) 걔들과 함께 온 사람을 피해서 도망쳤었어.
일현:(갸웃) 함께 온 사람?
이정: 형, 금잔디 얘기했던 거 생각나?
일현: 구준표 여자친구?
이정:(고개 끄덕) 금잔디 베스트 프렌드... 그 아가씨한테 엄청 큰 잘못 저질렀어.

 

역시 가을이었구나 싶어 일현은 이정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봤다.
이정의 얼굴은 후회와 죄책감, 그리고 그리움이 진하게 배어있었다.

 

일현:(조심스럽게) 형한테 얘기해 줄 수 있니?
이정: 그 아가씨를 은재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은재처럼 대하다 상처줬어.
일현: 뭐? 너 왜 그랬던 거니?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말에 일현은 깜짝 놀랐다.
이정이 얼마나 은재를 사랑했는지 너무나도 잘 알았던 일현이었다.

 

이정: 첨엔 그냥 은재랑 똑같이 구는 게 신경쓰였어. 그러다가 그 아가씨가 은재가 죽던 날 신화대병원에서 심장이식수술을 받았단 말을 들었어.
      그래서 그 아가씨가 은재 심장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어.
일현: ! 너 그럼 설마... (차마 말 잇지 못하고)
이정: 응. 은재가 그 아가씨의 몸을 통해 다시 돌아왔다고 생각했어.
일현:(안타깝게) 이정아,
이정: 근데 말야, 그 아가씨는 내 맘을 다 알았대. 그래도 은재 대신 날 위로해주기로 결심했대.
일현:(한숨쉬고) 하아~ 정말 천사가 따로 없구나.
이정:(고개 끄덕) 맞아. 근데 말야 난... 지후가 몇 번이나 그 아가씬 은재가 아니라고, 울리지 말라고 경고했는데 그 말 무시했어.
     소이정은 차은재 없인 살 수 없다고 스스로 변명하면서 계속 만났어.
일현: 그러다 결국 그 아가씨 울렸구나.
이정: 응.. 근데 다른 여자들처럼 날 원망하지도 않았어. 눈물을 흘리면서도 자신이 너무 불쌍하다고 그 말만 했어.
일현: 그랬구나...
이정: 그 말을 들으니까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알겠더라고.
      그 때부터 나 그 아가씨 생각만 하면 너무 마음이 아프고 미안했어. 평생 용서받지 못할 거라 생각하니 끔찍했어.
일현: 그래서 일본으로 온 거니?
이정: 응. 사실 그 전시작품들... 다 그 아가씨의 위로가 없었으면 만들지도 못했을 거였는데...
      사랑보다 깊은 상처, 그게 내가 준 거였어... 나 정말 최악이지 형?
일현:(한숨쉬고) 정말 잘못했구나. 사과는 하고 온 거였니?
이정: 무서워서 얼굴도 못보고 왔어. 날 나무래는 금잔디한테 두 번 다시 얼굴보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천사상만 대신 전달해줬어.
      카드에도 미안하단 말 못썼어. 미안하다고 말하면 그 아가씨한테 절대 용서받지 못할 거 같아서...
일현: 천사상이라니?
이정: 나도 모르게 만들었어. 근데 만들고 나서 보니깐 그 아가씨 닮았다 싶더라고.
      그래서 고맙다는 카드만 보냈어.
일현: 그리고는 네가 사고당했다는 말을 듣고 날아온 그 아가씨를 피해서 도망쳤다.
이정: 근데, 우빈이가 나중에 그 아가씨 편지를 전해줬는데... 나한테 힘내라는 글만 써줬어.
일현: 너 어쩌자고 정말...

 

이정은 딱하다는 눈빛으로 자신을 보는 일현을 보고는 다시 술을 마셨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얘기를 형에게 하자니 용기가 나질 않았다.

 

이정: 형... 나 용서받을 수 있을까?
일현: 사과부터 제대로 한 다음에 해야 할 말이 아닐까 싶다.
이정: 무슨 말이야?
일현: 순서가 틀렸단 소리야. 넌 이렇게 도망왔으면서 용서를 바란다는 거 너무 염치없잖아.
이정: 형... (혼란스러운 표정)
일현: 먼저 진심으로 사과를 해. 그리고 네가 왜 그랬는지 다 설명을 해 줘. 은재 얘기도, 우리 집안 이야기도 전부...

 

이정은 절망적인 표정으로 일현을 봤다.
일현이라고 해답을 알려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자신이 애써 피하던 진실만을 말해주니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랐다.

 

일현: 알아, 너 겁도 많고 마음도 여리다는 거. 그래서 늘 도망만 쳤다는 것도 다 알아.
      하지만 평생 도망만 치면 네가 가장 원하는 걸 얻을 수 없어.
이정:(우울하게) 아버지도 그렇게 평생 도망만 치다 그렇게 된 걸까?
일현:(의아) 왜 여기서 아버지 얘기가 나오는 거냐?
이정: 나 아버지 닮았잖아. 그래서 아버지처럼 무책임하게 늘 도망만 가는 거잖아.

 

일현은 이정이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버지와 닮았다니... 이렇게까지 이정이 자신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며 살고 있는 줄이야...
결국 자신이 집을 떠나버린 게 원인이었을까 싶어 죄책감까지 느껴졌다.

 

일현:(단호하게) 넌 아버지 조금도 안닮았어.
이정:(자신없는 목소리) 정말 그럴까?
일현: 아버지... 사랑을 모르는 사람이야. 하지만 넌 아냐. 넌 은재를 진심으로 사랑했잖니.
이정: 은재도 결국 날 만나서 잘못된 거잖아...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그 날 일찍 집으로 들어가려던 은재, 내가 붙잡아서 늦게 들어갔어. 그러다 뺑소니에 치였던 거야.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모두 슬프게 만드는 거 같아.
일현: 정신차려! 왜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거야.
이정:(절망어린 목소리) 아님 그럴 수가 없잖아. 내가 아님 은재가 하늘로 돌아갈 이유가 없잖아.

 

일현은 양손으로 이정의 뺨을 찰싹 때려줬다.
이정은 멍하니 일현을 바라봤다.   

 

일현:(낮지만 뚜렷하게) 소이정, 똑바로 들어. 내 동생이라서가 아니라 남자대 남자로서 말하는 거야.
      넌 아버지와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제대로 된 인간이야.
      단지, 부모님의 사랑을 받지 못해서 자신감도 없고 겁이 좀 많은 거야.
      넌 사실 착한 사람이야.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잘못에 이렇게 두고두고 미안해하지도, 가슴아파하지도 않아.
      우리 아버지라는 인간, 언제 한 번이라도 잘못했단 말한 적 있어?
이정: 형... (반신반의하는 표정)
일현: 나도, 은재도, F4도 네 본모습을 알기 때문에 널 사랑하는 거야.
      네가 아버지같이 사랑이 뭔 지도 모르는 인간이었다면, 아무도 네 곁에 없었을 거야.

 

이정은 말없이 진지한 형의 얼굴을 보면서 희망의 끈을 잡으려고 노력했다.
일현은 팔을 뻗어 이정의 어깨를 꽉 잡았다.

 

일현: 도망가지 마. 은재에게 뒤늦게 고백했던 것처럼 그렇게 그 아가씨에게 가서 사과하고 잘못을 빌어.
      또 다시 사랑을 놓쳐버리고 싶지 않으면 내 말 들어.
이정:(멍하니) 사랑?
일현: 끝까지 널 원망하지 않을 만큼 강한 사람이라면, 분명히 용서해줄 거야.
이정: 천사처럼 착해서... 누구도 미워하지 않는 사람이니까 날 원망하지 않는 게 아닐까?
일현:(한숨쉬며) 보석처럼 강한 아가씨인 건 알겠어.
      하지만 난 봤어. 가을양은 아직 널 마음에 담고 있어.
      그 눈빛을 보면 진심으로 널 위한다는 거 알 수 있어.
이정:(깜짝 놀라서) 가을양을 봤어?
일현: 그래. 네 도예실앞에서 우연히 만났어.
이정: 언제? 가을양 어때보였어?
일현: 지난 달 초에. 날 보더니 갑자기 울더라고.
이정:(걱정스런 말투로) 울었다고?
일현: 그래. 싸웠다고도, 네게 화냈다고도 말하지 않았어. 오히려 가을양은 자신이 너에게 부족하다고 했어.
이정:(떨리는 목소리) 정말이야? 내가 울렸는데...

 

이정의 눈빛이 심하게 흔들렸다.
정말 가을이 그렇게 말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상처준 사람은 자신이었는데 왜 가을이 자신에게 부족하다고 말하는 건지...

 

일현: 가을양 정말 착하고 예쁜 아가씨야. 너같은 겁쟁이보다 몇 배로 강하고.
      잘 알지?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자신에게 상처입힌 사람 용서하고, 사랑해주는 사람이라는 거.
      그런 아가씨한테 사과도 제대로 안해서 놓쳐버린다면 내가 먼저 용서안할 거야.
이정: 정말 나 가을양에게 다시 다가가도 되는 걸까? 은재처럼 또 잘못되지 않을까?
일현: 가을양은 은재가 아냐. 정 걱정되면 네가 끝까지 지켜주면 되잖아.
이정: 또 상처줄 지도 모르는데...
일현: 상처주지 않도록 노력하면 되잖아. 하긴, 넌 이리로 도망와서 지금도 가을양 울리고 있구나.
이정: !

 

일현은 소극적인 이정이 답답해서 앞에 놓인 잔을 비워버렸다.
예전 자신이 집을 나가면서 이정에게 주었던 상처를 치료해 줄 수 있는 기회가 이런 식으로 찾아올 줄은 몰랐다.
일현은 지금 확실히 말해두지 않으면 이정이 절대 용기를 내지 못할 거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일현:(달래듯이) 정아, 진실한 사랑을 얻으려면 용기가 필요해.
      가을양은 아직도 널 좋아하고 있고, 널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어.
      네가 할 일은 가을양에게 가서 네 허물을 다 보여주고 용서를 비는 거, 그거 뿐이야.
      이대로 영원히 도망간다면 그 땐 정말 아버지같이 되는 거야.

 

다정하게 타이르는 일현의 말을 듣던 이정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일현은 말없이 이정을 바라보기만 했다.

 

이정은 가을과의 만남을 떠올렸다.
가을은 항상 자신에게 솔직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단 얘기도 가을이 먼저 꺼냈고, 때로는 미칠 듯이 어머니가 그립다는 말도 털어놓았었다.
그러면서 은재를 그리워하는 마음도 다 이해한다면서 오히려 자신을 위로했었다.
심지어 화이트 데이에도 자신의 마음을 모두 다 드러냈었다.

 

그랬는데 이정 자신은 항상 도망만 치고 있었다.
가을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고 편지에 에둘러 말했는데, 공연히 아버지 핑계만 대면서 머뭇거리는 것은 자신이었다.
너무나도 못나빠진 자신이 한심하고 가을에게 미안해서 이정은 계속 눈물이 나왔다.

 

이정:(떨리는 목소리로) 가을양... 정말 미안해...

 

일현은 이정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려주었다.

 

일현: 그 말은 가을양 앞에서 해야지.

 

이정은 손바닥으로 눈물을 훔쳐내고는 일현을 보고 미소지었다.
일현은 후련해보이는 이정의 미소를 보고 속으로 안도했다.

 

이정:(목이 메이지만 억지로 소리내며) 정말 고마워 형.
일현:(농담조로) 솔직히 지금 당장 같이 서울가자고 말하고 싶다만, 네 얼굴 보니 안되겠다.
이정:(억지로 밝게) 내가 뭐 어때서... 이래뵈도 F4인데...
일현:(머리 헝클이며) 얌마, 거울을 봐라.. 울어서 팅팅 부은 얼굴로 가을양 앞에 가면 누구세요? 하겠다.
이정: 그러게 누가 울리래? 내 멋진 얼굴 형이 지금 망친 거야.
일현: 전시 끝나면 가. 언제 끝나니?
이정: 7월초에.
일현:(한숨쉬며) 길게도 잡아놨구나... 도쿄 전시 끝나고 잠시 서울가면 안되겠니?
이정: 그게 형땜에 불가능해졌어.
일현:(뜨악) 왜 내 핑계를 대.
이정: 형 보고 싶어서 도쿄 전시기간을 엄청 늘려놨거든.. 그 뒤로도 계속 줄줄이 잡혀있구.
일현: 핑계좋구나. (의혹섞인 시선으로) 너 설마하니 전시 핑계대로 사과안하고 이대로...
이정:(말끊으며) 절대 아냐. 나도 당장 전시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서울가서 가을양한테 사과하고 싶어.
      하지만 가을양이 얼마나 열심히 사는지 잘 아니깐... 내가 무책임하게 전시 취소했다간 당장 전시부터 다 하고 오라고 할 걸.
일현:(비꼬듯이) 아~주 바른생활 아가씨구나, 가을양.       
이정: 나한텐 과분하지.      
일현: 암튼 전시 끝나고 가을양에게 사과안하면 나도 너랑 의절이다. 알아 둬.
 
이정은 항상 예의바른 신사인 일현이 어울리지 않게 으름장을 놓는 모습을 보자니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키득거리면서 이정은 자신과 일현의 잔을 채우고는 술잔을 들었다.

 

이정: 사나이 대 사나이로 약속할게. 이 전시 끝나면 꼭 가을양 찾아가서 사과한다고.
일현:(자신의 잔 들고) 준표나 지후, 우빈이한테 확인한다.
이정: 내가 전화할게.
일현: 약속이야.

 

형제는 잔을 부딪히고는 남김없이 술을 마셨다.
한국말로 대화하는 통에 주인은 하나도 못 알아들었지만, 눈치를 보니 형이 동생의 큰 문제를 해결해 준 것 같았다.      
주인은 형제의 자리에 가장 자신있어 하는 꼬치요리를 놓아주었다.
   
주인: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일이 잘 해결된 거 같으니 특별 서비스를 내주지.
일현:(환하게 웃으며) 역시 켄짱은 진정한 사나이에요.
이정:(같이 웃으며) 왜 형이 여길 좋아하는 지 알겠네요. 정말 화끈하신 분이세요.
주인:(만족스럽게) 그럼, 남자는 모름지기 배포가 커야지, 암.

 

그 뒤로도 오랫동안 이정과 일현은 술잔을 채우고 비우기를 반복했다.
일현은 곱상한 외모와는 달리 주량이 어마어마해서 평소에도 왔다하면 매출을 대폭 올려 주인을 행복하게 만들어줬다.
오늘은 동생까지 왔으니 매출 신기록을 세우겠다 싶어 주인은 싱글벙글이었다.
그렇게 도쿄의 밤은 깊어갔다.

 

 

-가을의 집-

 

가을은 방에서 이정에게 줄 생일 선물을 만드느라 정신이 없었다.
책갈피에 십자수로 기형도의 시를 수놓는데 열중하느라 전화가 오는 줄도 몰랐다.
마침 방에 들어왔던 겨울이 빽 소리를 질렀다.

 

겨울: 언니, 전화받아!

 

가을은 겨울의 외침에 정신을 차리고 전화를 받았다.

 

가을: 여보세요?
잔디: 가을, 뭐하길래 전화도 안받아?
가을:(십자수 보고는) 미안... 책 읽느라 정신이 없어서...
잔디: 시험공부 열심히 하는 것도 좋지만 우리 화창한 일요일을 맞아 잠시 휴식 좀 취하지 않을래?
가을:(날카롭게) 또 어디 놀러가자고?
잔디: 아니 그건 아니고... 기분전환 할 겸 남산이나 가자고...
가을: 또 준표 선배한테 끌려갈려고? 아서라.
잔디:(억울해하며) 너무 울궈먹지 마.
가을: 지금 할 공부가 태산이라 안되겠다. 담에 가자.
잔디:(삐친 목소리) 넌 나보다 공부가 더 중요하다 이거지...
가을:(애교섞으며) 미안~ 우정이 장학금을 내주진 않거든.
잔디: 너무해~ 나 그냥 구준표랑 놀아야겠다.
가을: 잘 생각했어. 기분 전환 잘해.

 

가을은 전화를 끊고 다시 십자수를 하려다 이상한 느낌이 들어 주위를 둘러봤다.
겨울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겨울: 언니, 십자수가 언제부터 대학 시험교재가 됐수?
가을:(당황) 이건 머리식히려고 하는 거야.
겨울: 언니는 오늘 오전 내내 머리 식혀?
가을: 네가 쉴 때마다 들어온 거지.

 

겨울은 추궁하는 표정으로 가을을 째려봤다.
가을은 가슴이 뜨끔했지만 태연한 척 했다.

 

겨울: 그거 언니 남친 선물이지?
가을:(화들짝) 나, 나한테 남친이 어딨어?
겨울:(가을 책상위 큐브 집으며) 이거 맞춰주신 그 분이지, 누구겠어?
가을:(재빨리 큐브 뺏으며) 그거 만지지 말랬지!
겨울: 시치미 떼지 마. 잔디언니한테 다 들었어. 저 쿠션 주인공이잖아.

 

겨울이 가리키는 손은 이정 캐릭터를 수놓은 쿠션을 향했다.
가을은 얼굴이 화끈거리는 게 느껴졌다.

 

가을: 겨, 겨울아...
겨울:(고개저으며) 하여튼 여자들 우정은 이래서 문제있다는 거야...
     남친 선물 만드는데 정신팔려 절친한테 거짓말이나 하고 말이지..쯧쯧   
가을:(애원조로) 나 아직 남친 없어. 진짜야.
겨울:(고개 좌우로 까딱) 좋아, 그럼 사모하는 사람인 거지? 나 언니가 식구랑 잔디언니 빼고 사람 수놓는 거 첨봤어.
가을:(난감) 그게 말이지...
겨울:(사악한 미소지으며) 드디어 우리 언니에게도 사랑이 온 거지? 그치?

 

가을은 겨울의 추궁에 할 말을 잃었다.
이 상황을 잘 넘어가고 싶었지만 저 날카로운 눈빛을 보니 힘들 거 같았다.

 

가을:(사정조로) 겨울아~ 나중에 잘되면 말해줄게.
겨울:(십자수 보고) 그걸로 고백하려고?
가을:(십자수 숨기며) 그, 그래...
겨울:(만족스럽게 웃고) 그럼 잘 해봐. 잔디 언니한텐 비밀로 해줄게.
가을:(한숨쉬고) 엄청 고맙다...

 

겨울이 입이 찢어져라 웃으며 방에서 나가자, 가을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로즈마리꽃을 수놓은 책갈피 뒷면을 보고는 저도 모르게 한탄했다.

 

가을: 내가 지금 뭐하는 거냐고... 낼 모레가 시험인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가을은 또 다시 글자를 수놓기 시작했다.

 

 


-일본, 나가노-

 

이정은 도쿄에서의 전시를 성황리에 끝내고 나가노 전시를 시작했다.
일현과의 즐거운 시간이 눈깜짤할 사이에 지나가버려 서운함이 컸지만, 그래도 무거운 짐을 덜어내 후련함도 그만큼 컸다.

 

일본으로 오면서 함께 가져왔던 가을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 망설임, 아버지에 대한 증오는 이제 어떻게 사과를 할 것인가라는 고민으로 바뀌었다.
항상 솔직하게, 진심으로 자신을 대했던 가을에게 어설픈 변명을 늘어놓을 수는 없었다.
닥치는 대로 영화도 보고, 책도 읽었지만 아직까지는 해답을 얻지 못해 슬슬 답답해지려던 찰나였다.

 

나가노에서 전시를 시작한 지 3일째 되는 날, 이정은 박물관 임원들의 생일 축하 케이크를 들고 호텔로 돌아왔다.
늘 F4 친구들과 함께 생일파티를 했는데, 올해는 혼자 보내려니 어딘지 서글펐다.
물론 일현은 미리 도쿄에서 생일축하 선물도 건네줬고, 아침에 다시 전화로 축하를 해줬다.
가을이 옆에 없어서 더 스산하게 느껴지는 거였겠지만, 그래도 말없는 F4 친구들도 서운했다.

 

케이크를 먹어야하나 말아야하나 고민을 하던 이정은 노크 소리가 들리자 F4 친구들이 도착했나 싶어 얼른 문을 열었다.
그러나 기대했던 친구들 대신 커다란 상자를 들고 있는 벨보이만 복도에 서있었다.

 

벨보이: 손님, 선물이 도착했습니다
이정:(당황) 예?
벨보이: 친구분이 생일 축하 선물이라면서 직접 호텔로 가져왔습니다.
이정:(복도 둘러보며) 그 친구는요?
벨보이: 지금 막 떠나셨습니다. 어디다 놓으면 될까요?
이정: 저기 커피 테이블에 두세요.

 

벨보이는 이정이 시키는 대로 탁자위에 상자를 놓고는 사라졌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상자를 보고 있자니 휴대전화가 울렸다.
평소와 달리 우빈이 영상통화를 걸었다.
생일이라 그런가보다 하면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싱글벙글 웃는 우빈의 얼굴이 보였다.

 

우빈: My bro. 생일 축하해. 선물 잘 받았어?
이정: 너희쪽 사람이 놓고 간 거였어? 어쩐지 벨보이가 팁도 안받고 재빨리 사라지더라.
우빈: 원래는 작년처럼 우리가 찾아가주실까 했는데, 뭐 가을이 기말고사 치느라 안가는데 우리가 가서 의미가 있겠나 싶더라고.
이정: 피식, 눈물나게 고맙다. 모두 옆에 있어?
우빈: 준표랑 지후, 잔디는 옆에 있어. 참고로 가을인 지금 도서관에서 시험공부중이야.

 

화면으로 준표와 지후, 잔디가 들어왔다.

 

준표: 생일 축하한다.
지후: 축하해.
잔디: 선배, 생일 축하해요.

 

모두 다 기대에 들뜬 얼굴이라 이정은 약간 당황했다.

 

이정: 고마워. 근데 다들 표정이 왜 그래?
우빈: 빨리 선물 풀어봐.
잔디: 가을이 거 제일 위에 있어요 선배.
이정:(화들짝) 정말?
준표: 소이정, 끊지말고 보여줘야 해.
이정:(다급) 알았어.

 

이정은 조심스럽게 카메라를 소파위에 올려놓고는 재빨리 상자를 풀기 시작했다.
잔디의 말대로 가을의 이름을 적은 아주 얇은 포장상자가 보였다.
책인가 싶어 서둘러 포장을 풀으니 기형도 시집이 나왔다.
생일 축하 카드를 찾아 책장을 넘기자 제일 먼저 십자수 책갈피가 눈에 띄었다.
분명히 가을이 손수 수를 놓았으리라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정은 책갈피를 들어 수놓은 글을 읽었다.

 

이정: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무언가 따듯한 기운이 이정의 가슴을 채우고 있는 것 같았다.
언제나처럼 가을은 이정에게 가장 필요한 위로를 건네주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고, 더이상 자책하지 말라는 가을의 따스한 마음이 느껴졌다.
이정은 자기도 모르게 책갈피를 입에 가져가더니, 마치 책갈피가 가을인양 조심스럽게 입을 맞췄다.

이 때, 휴대전화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준표: 어이 이정, 가을 선물 봤어?
잔디: 선배, 가을이가 또 책 선물한 거 아니죠?
우빈: 우리도 못봤어. 좀 보여줘~

 

이정은 피식 웃더니 카메라에 책갈피를 갖다댔다.

 

이정: 잘 보여?
지후:(웃으며) 역시 가을이다운 선물이네.
잔디:(감탄) 와~ 정말 예쁜데요. 나한테 해준 거보다 몇 배는 더 공들인 티가 나요.
우빈:(휘파람 불며) 대단한 가을. 어디 뒷면도 봐봐.

 

이정은 시키는 대로 보라색 꽃을 수놓은 책갈피 뒷면을 보여줬다.

 

잔디: 어~ 이거 가을이 탄생화에요.
이정: 가을양 탄생화가 뭔데?
잔디: 로즈마리라고...
준표:(끼어들어) 잔디밭, 넌 탄생화가 뭔데?
잔디:(뜨악) 넌 지금껏 내 탄생화도 몰랐니?
준표: 난 그런게 있는 줄도 몰랐지.
잔디:(버럭) 구준표!
우빈:(재빨리 끼어들어) 어쨌든 정성 가득한 선물 받아 좋겠다, 이정아.
지후: 이제 그만 끊도록 해, 그래야 내 선물 받을 수 있어.

 

이 말을 끝으로 통화가 일방적으로 끊겼다.
지후가 무슨 선물을 하려나 호기심이 생기려던 찰나, 휴대전화 화면에 사진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안내메시지가 떴다.
메시지 확인 버튼을 누르자 환하게 웃는 가을의 사진이 계속 들어왔다.
너무나도 보고싶었던 가을 특유의 예쁘고 따스한 웃음이었다. 
그동안 휴대폰으로 왜 사진을 찍는지 알 수 없었는데 오늘에야 그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이제는 언제든지 가을의 웃음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하니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이정은 세심한 지후의 배려가 정말 고마웠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예전에 지후가 탐냈던 오브제를 즉시 선물해야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뒤이어 문자메시지가 도착하자, 그 다짐은 곧바로 사라졌다.

 

"이렇게 예쁜 가을 너무 오래 혼자두면 누가 채가도 난 책임없다. 빨리 돌아와. -지후"

 

이정:(실소) 하, 윤지후.

 

이정은 지금 지후의 문자에 웃어야할지 화내야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즉시 통화버튼을 누를까 했지만 손가락이 먼저 가을의 사진들을 다시 불러냈다.
화이트 데이 이후 처음 보는 가을의 얼굴을 갈증난 아이처럼 보느라 이정은 다른 친구들 선물은 까맣게 잊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