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기억의 주인

[소을 중편] 기억의 주인 15

지혜의 여신 2009. 6. 28. 22:35

 

 

 

-인천공항-

 

이정은 출국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수화물을 부치고 체크인 절차를 마친 다음, 잠시 시간이 비자 휴대전화를 꺼냈다.
다른 F4 친구들에게 전화를 할까 잠시 고민하다 결국은 도로 가방에 집어넣어버렸다.
평소와 달리 혼자 출국을 하려니 기분이 이상했다.

 

문득 가을이 떠올랐다.
자신이 울려버리지 않았다면 지후의 말을 따라 과연 지금 자신은 가을과 함께 출국했을까.
'보나마나 공부해야 한다고, 안간다고 했겠지.'

 

이정은 고개를 저으며 씁쓸한 미소를 짓고는, 발걸음을 출국장으로 옮겼다.
공항 안전요원이 자신의 여권과 보딩 패스를 확인하고 다시 건네주었다.
출입문을 통과하기 직전, 마치 가을이 마중나온 것처럼 이정은 뒤를 돌아보며 조용히 작별인사를 했다.

 

이정: 안녕, 가을양...

 

 


-지하철 안-

 

가을은 자리에 앉아 책을 읽다가 이상한 느낌에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꼭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을 부른 것 같았다.
하지만 토요일 정오의 한가한 지하철 안에서 가을에게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묘한 기분에 휩싸인 채, 가을은 한참동안 멍하니 앉아있었다.

 

 


-일심 건설 로비-

 

일심 건설 창립 기념 파티가 한창인 로비의 한 편에서는 현악사중주가 끊임없이 클래식을 연주했다.
우빈의 부모는 일심 건설 경영진과 함께 VIP 손님을 접대하는 중이었다.
밝은 잿빛 턱시도를 입은 우빈은 파티에 참여한 여러 여성들과 가벼운 인사와 대화를 나눴다.

 

그러다 로비에 준표와 잔디가 등장하자 자연스럽게 이야기하던 여성과 헤어져 두 사람을 반겨주었다.
준표는 검정 턱시도를, 잔디는 노란 미니드레스에 자주색 스툴을 둘렀다.
주변 사람들은 너무나도 멋진 세 남녀를 보면서 수근거렸다.

 

우빈: yo 준표, 잔디, 어서 와. 오늘따라 아주 둘 다 눈이 부시는데. (장난스러운 웃음)
잔디:(환하게 웃으며) 선배야말로 정말 멋있어요.
준표:(거드름 피우며) 당연한 말을 왜 하냐.
우빈:(아랑곳않고) 와줘서 고마워. 슬슬 식사나 하라고.
준표: 지후랑 이정인 어딨냐?

 

마침 준표의 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흰 정장을 입은 지후가 로비에 나타났다.
지후는 우빈과 준표, 잔디를 발견하고는 미소를 지으며 세 사람이 있는 곳으로 갔다.

 

지후: 미안, 내가 제일 늦었네.
우빈: 아냐, 아직 이정이 안왔어.
준표: 이자식 요샌 연락도 안되고...(뚱한 표정)

 

지후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이정이란 말에 얼굴이 굳은 잔디의 얼굴을 흘깃 봤다.
 
지후: 이정이 오늘 출국했어.
준표, 우빈:(동시에) 뭐?
잔디: 예?

 

세 사람은 뜻밖의 소식을 들은 놀라움을 고스란히 얼굴에 드러냈다.
 
우빈:(다급히) 어디로 간 거야? 
지후: 일본으로.
준표:(미간 찌뿌리며) 일본? 전시는 아직 10일쯤 남은 걸로 아는데?
지후:(어깨 으쓱하며) 준비할 게 많다고 빨리 간대.
우빈: 너 확실한 거냐?
지후: 응. 직접 물어봤거든.

 

잔디의 표정은 매우 복잡했다.
설마 이정이 가을을 피하기 위해 일본으로 가버린 걸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준표: 왜 우리한텐 연락도 안하고?
우빈: 그러게. 알면 배웅나갔을 텐데.
지후: 그냥 혼자 가겠다고 해서 말안했어.
준표: 그래도 말하지...

 

준표와 우빈은 심각해진 표정으로 지후를 보고는 서로의 얼굴을 봤다.
잔디도 왠지 모르게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지후의 얼굴은 평소와 같이 감정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지하철역 앞-

 

가을은 MT를 마치고 완전히 지쳐버린 몸을 이끌고 지하철 역을 빠져나왔다.
결국 문헌정보학과 여학생들끼리 MT를 가게 되어 방을 하나만 빌린 탓에, 가을은 어젯밤 과친구들이 계속 주는 술을 마시다 잠이 들어버렸다.
오늘 아침에 깨고 나니 자신처럼 술이 약한 친구 세 명만 일찍 일어나는 바람에, 해장국을 끓이고 술취한 20여명의 뒷정리를 도맡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집에서 푹 쉬고 싶은 마음에 발걸음을 재촉하던 가을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서 발걸음을 멈췄다.
지후가 오토바이에서 내려 웃으면서 자신에게 걸어오는 게 보였다.

 

가을:(의아) 지후 오빠?
지후: MT 잘 다녀왔어?
가을: 아 예, 재미있었어요. 오늘 아침엔 거의 다 뻗어버려서 좀 힘들었지만요.
지후: 술도 약하면서 괜찮았던 거야?
가을: 큭, 아예 일찍 잠이 들어버리니 차라리 낫더라구요.
지후: 넌 술버릇이 얌전해서 정말 다행이야.
가을: 그건 그렇고 무슨 일이에요?
지후: 잠깐 오빠하고 데이트 하지 않을래?

 

가을은 여전히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지후를 봤다.
지후는 그런 가을에게 헬멧을 건네주었다.

 

 


-근린공원-

 

지후와 가을은 오토바이에서 내려 벤치에 앉았다.
일요일 오후라 그런지 공원에는 나들이 나온 가족이 많았다. 
공원 곳곳에는 노란 산수유가 피어 봄이 성큼 다가왔음을 실감시켜 주었다.

 

두 사람은 잠시동안 공원 풍경을 둘러보았다.
지후는 크로스백에서 이정이 주었던 작은 상자를 꺼내 가을의 눈앞에 보여줬다.
어리둥절해진 가을은 이게 뭐냐는 표정으로 지후를 봤다.

 

지후: 이정이가 너에게 전해달라고 했어.
가을:(눈 동그래지며) 예?!

 

가을은 떨리는 마음을 겨우 달래가면서 지후의 손에서 상자를 받았다.
포장지를 풀고 상자를 여니 하얀 도자기 천사상이 나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상자 안을 살펴보니 미니카드가 들어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카드를 펴자, 처음 보는 이정의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그동안 정말 고마웠어.
 지난 겨울 너무나도 많은 위로를 받았어.
 난 이제 한동안 해외에서 전시를 할 거야.
 너무 공부와 학과일에 매달리지 말고 항상 건강하길 바래."

 

가을은 울음을 참으려고 애썼지만 눈물이 또 흘러나왔다.
카드를 꼭 쥔 채로 다른 손으로 입을 꼭 막았다.

 

지후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가을을 보고는 이정이 만든 천사상과 카드를 봤다.
이정이 자신의 방식대로 사과를 하는구나 싶었다.
 
지후: 맘껏 울어, 가을아. 내앞에선 울어도 돼.

 

그 말이 신호라도 된 것처럼 가을은 본격적으로 울기 시작했다.
지후는 말없이 팔을 뻗어 가을의 어깨를 감싸주었다.
가을은 지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한참 울었다.

 

가을:(조용히 읖조리듯) 난 이정 선배의 수호천사가 되고 싶었어요..
지후: 그랬어?
가을: 이정 선배를 구해주고 싶었는데...
      난 생각만큼 강하지도, 착하지도 않았어요...
지후:(부드럽게) 아냐 그렇지 않아.
가을: 네?
지후: 이정이에게 있어서 넌 천사였어.
가을:(못믿겠단 표정) 설마요...
지후:(천사상 가리키며) 이걸 보고도 모르겠어? 넌 은재를 잃고 고통스러워하던 이정일 구해준 거야.
      
가을은 지금 이순간처럼 지후의 말이 사실이길 바란 적이 없었다.
잔디는 지후가 가끔 남들이 보지 못한 진실을 말해준다고 얘기했었다.
정말 이정이 그렇게 생각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가을: 정말 그렇게 생각할까요?
지후: 응. 적어도 이정인 도자기를 만들 때에는 진실해지거든.
가을: 그럼 왜 직접 주지 않고 오빠에게...
지후: 미안해서 그렇겠지. 네 얼굴 볼 면목이 없다고 말야.

 

가을은 천사상과 카드를 가슴에 꼭 안았다.
이정의 마음이 전해지기를 바라면서.
'바보, 직접 주지 않으면 어떤 마음인지 알 수 없잖아요.'

 

가을: 지금 도예실에 가면 선배 볼 수 있을까요?

 

가을은 조심스럽게 지후의 얼굴을 바라봤다.
지금 가을은 아주 조금일지라도 희망을 갖고 싶었다.
하지만 지후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지후: 이정이... 어제 일본으로 떠났어.
가을:(깜짝 놀라) 예? 벌써요?
지후: 준비할게 많다고 하네...
가을: 전시는 아직 시간이 남았을텐데...
지후: 얘기 들어보니까 일본 전체를 다 돌면서 전시하려나봐.

 

가을은 망연자실해졌다.
이정의 마음을 당장 확인하고 싶은데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문득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가을: 오빠... 설마 선배 안돌아오는 거 아니겠죠?
지후: 당분간은 안올거야...
가을: 영영 안돌아오는 건 아니겠죠?

 

가을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지후는 겁에 질린 가을의 얼굴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지후: 돌아올 거야... 언제가 될 지는 몰라도...
가을: 내가 결국... 선배를 몰아내버렸네요... (눈물 맺힌다)
지후: 이건 이정이가 감내해야 할 일이야. 또 죄책감 갖지 마.

 

지후의 말에도 불구하고 가을은 또 가슴이 아파왔다.
아주 돌아오지 않을 것같은 불안감이 가을을 사로잡았다.

 

 


-F4 라운지-

 

준표:(버럭) 소이정 이 자식! 아주 그냥 가지가지로 속썩이네.  
우빈:(달래는 말투로) 본인도 오죽하면 일본으로 갔겠냐.
지후:(덤덤하게) 비겁한건 사실이지.

 

준표와 지후, 우빈은 이정에 대한 이야기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당장 일본으로 날아가겠다며 흥분한 준표에게 지후는 이정과의 대화를 들려줬다.

 

준표: 그러게 미안할 짓을 왜 하냐고.
우빈: 좀 엉뚱하게 들리겠지만... 참 차은재 대단하다 싶네...
준표: 뭐?
우빈: 걔 때문에 이정이가 플레이보이 됐고, 죽은 다음에도 저렇게 이정이가 못잊어 이 사단이 벌어졌잖아.
지후: 절반은 이정이 탓이지. 준표같은 성격이었음 진작에 고백했을 걸.
우빈: 뭐 그건 그렇지. 휴우~ (한숨)
준표: 사과라도 제대로 하고 갈 것이지.
      그랬음 잔디 친구가 저 원망안한다는 말 듣고 맘을 바꿨을지도 모르는데...
지후: 늘 지레짐작하는게 문제라니까...

 

우빈은 곰곰히 생각에 잠겼다.
그동안 가을에게 대했던 이정의 말투나 행동은 과거 은재에게 대했던 것과 거의 같았다.
하지만 정말 이정이 한 번도 가을 자체에게 끌린 적이 없었는지 궁금했다.
처음 잔디가 라운지에 가을을 데려왔을 때, 우빈은 이슬같이 맑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연하이기도 하고 잔디의 친구이기도 해서 자신은 관심을 갖지 않았지만, 가을은 남자들이 좋아할 만한 매력이 많았다.
얌전한 성격에 항상 남을 먼저 생각해주는 사려깊고도 자상한 마음씨, 뛰어난 수예솜씨까지...
그에 비해, 은재는 약간은 털털하고 덜렁거리는 데다 눈치가 없고 단순한 편이었다.
이정은 가을과 은재가 똑같이 행동한다고 했지만, 두 달 넘게 만나면서 둘의 차이점을 과연 이정이 감지하지 못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은재가 봄의 생동감이라면 가을은 이름처럼 차분함과 잔잔함과도 같았다.

 

우빈: 정말 이정인 단 한번도 가을이 은재와 틀리다고 생각을 안했던 걸까?
지후: 그렇진 않을걸. 내 생각엔 발견해도 의도적으로 외면했을 거라고 봐.
      워낙 고집불통이니깐 말야
우빈: 그럼 역시 이정이도 가을이 자체에게 어느 정도 끌리지 않았을까?
준표: 만약 그렇다면 왜 도망가는 거야? (이해못하겠단 표정)
지후: 또 상처줄까 겁이 나서겠지.
우빈: 그러니까 더 미안해서일 수도 있고.

 

준표는 여전히 이해못하겠다는 표정이었고, 지후와 우빈은 의미있는 시선을 주고 받았다.
어쩌면 지금 상황이 완벽히 절망적이지는 않다는, 작게나마 희망이 있을 수도 있다는 기대가 담겨있었다.

 

지후: 어쨌든 지금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없어.
      가을이도 이정이에 대한 마음이 그대로니까 기다릴 거야.
      문제는 이정이지.
우빈: 정말 자기 마음 빨리 깨달았음 좋겠다.
      난 두 사람이 잘됐으면 하는데...
준표: 만약 미안해서 못나타나면 잡아와서라도 둘이 대면시키겠어.
      언제까지 피하기만 할 거냐고... 사내 자식이 말야.. (불만 어린 표정)  
지후: 아직은 아냐... 시간이 더 필요해...

 

 


-일본 쿄토-

 

3월말 교토는 벚꽃이 만개해 아름다운 풍경을 뽐내고 있었다.
이정은 공원을 둘러보면서 벚꽃이 흩날리는 광경을 바라봤다.
떨어지는 벚꽃잎이 눈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재가 지금 여기에서 이 풍경을 보면 좋아하리라.
하지만 은재의 좋아하는 얼굴을 완전히 되살리기 전에 또 다른 기억이 떠올랐다.

 

이정: 그대 눈 좋아하나봐?
가을: 무지무지 좋아해요. 그리고... (이정을 보며 미소짓는다)
이정: 그리고?
가을: 선배랑 눈이랑 인연이 있는 거 같아요.
이정: 왜 그런 생각을 하지?
가을: 처음 선배 귀국했다고 잔디한테 들었던 날 첫눈이 내렸거든요.
      나 그 때 선배가 첫눈 오는 날 귀국해서 참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너무나도 눈을 좋아했던 가을.
아마 지금 벚꽃잎이 눈처럼 흩날리는 경치를 보면 눈이 오는 것 같다고 좋아할 것 같았다.
서울은 아직 벚꽃이 피려면 멀었을텐데...

 

어느 새 걸음을 멈추고 떨어지는 꽃잎을 잡으려는 듯 한 손을 앞으로 내민 이정을 공원 방문객들은 흘깃 보고 지나쳤다.
잘생긴 청년이 그리움 가득한 얼굴로 서있는 걸 보니 애인과 싸우고 혼자 있나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이정은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 까맣게 모른 채로 한참동안 멍하니 같은 자세로 서있다 . 

 

       

그날 밤, 이정은 투숙중인 호텔 바에서 술을 마셨다.
무대에는 백인 가수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경쾌한 노래보다는 주로 호소력있는 발라드를 부르는데 꽤나 듣기 좋았다.  
계속 손님들의 신청곡을 받아 부르던 중, 한 곡이 이정을 사로잡았다.

 

I'm just the pieces of the man I used to be. 난 이제 예전의 나의 조각에 불과할 뿐이에요.
Too many bitter tears are raining down on me. 쓰라린 눈물을 비오듯 너무 많이 흘렸어요

 

I'm far away from home. 난 집을 떠나 멀리 왔어요
And I've been facing this alone for much too long. 그리고 너무도 오랫동안 세상을 혼자 맞서 왔죠

 

I feel like no one ever told the truth to me about growing up 어른이 되어 힘겹게 살아가는 것이
and what a struggle it would be. 어떤 것인지에 대해 아무도 내게 말해주지 않았던 것 같아요

 

In my tangled state of mind. 혼란한 머리 속에선 내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I've been looking back to find where I went wrong. 돌이켜 생각해 왔었어요

 

Too much love will kill you. 너무 깊은 사랑은 해로워요
If you can't make up your mind. Torn between the lover. And the love you leave behind. 만약 사랑하는 사람과 뒤에 떠나보낸 사람 사이에서 고민한다면요

 

You're headed for disaster. 당신은 파멸을 향해 가고 있는 거에요
Cause you never read the signs. 표지판을 볼 수 없기 때문이죠
Too much love will kill you every time. 너무 깊은 사랑은 언제나 해로워요

 

I'm just the shadow of the man I used to be. 난 단지 예전의 나의 그림자에 불과해요
And it seems like there's no way out of this for me. 그리고 내가 여기서 빠져나갈 방도가 없는 것 같아요

 

I used to bring you sunshine. 당신께 밝은 햇빛을 안겨드리던 내가
Now all I ever do is bring you down. 이젠 실망만 시켜드리는군요

 

How would it be if you were standing in my shoes. 만약 당신이 나라면 어떨까요
Can't you see that it's impossible to choose. 맘대로 선택할 수 없다는걸 당신은 모르나요.

 

No, there's no making sense of it. 그래 봤자 아무 의미 없어요
Every way I go I'm bound to lose. 내가 어떻게 하든지 난 실패하게 되어있나 봐요

 

Too much love will kill you. Just as sure as none at all. 너무 깊은 사랑은 고통스러워요 너무도 확연한 사실이에요
It'll drain the power that's in you. Make you plead and scream and crawl. 사랑은 당신의 기운을 빼버리고 간청하고 애원하게 만들죠

 

And the pain will make you crazy. 그 고통에 당신은 미치게 될걸요
You're the victim of your crime. 당신이 했던 사랑의 희생자인 거에요

 

Too much love will kill you every time. 너무 깊은 사랑은 언제나 해로워요

Too much love will kill you. It'll make your life a lie. 사랑에 너무 빠지면 삶을 거짓으로 만들어 버려요

 

Yes, too much love will kill you. 그래요, 너무 깊은 사랑은 해로워요
And you won't understand why. 어느 길로 가야할지 모르게 되죠

 

You'd give your life. You'd sell your soul. 삶을 팽개치고 영혼까지 팔게 될 거에요
But here it comes again. 그런 사랑이 다시 내게 다가오는군요,
Too much love will kill you in the end. 결국엔 그 지독한 사랑으로 난 파멸하게 될 거에요.

 


분명히 아는 노래였는데 오늘따라 그 가사가 너무나도 가슴에 와닿았다.
지독한 사랑은 삶을 거짓으로 만들고 어디로 가야할 지 모르게 만들어 자신을 파멸시킨다...

 

아주 어릴 적부터 부모님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아버지는 항상 밖으로 나돌기만 했고,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의 뒷모습만 바라봤다.
하지만 대외적으로 함께 나가야하는 장소에서는 다정한 부부 모습을 완벽하게 보여줬다.
연극을 하느라 지친 어머니에게 형은 구원의 동아줄같은 존재였다.
아버지를 쏙 빼닮은 외모를 가졌지만 아버지와는 달리 한없이 다정하고 친절하고 예의바른 형이었다.
공부도 도예도 무엇이든 잘했던 형은 우송의 차기 당주로서 손색이 없다는 찬사를 항상 받았었다.
반면 이정은 완벽한 형의 그늘에 항상 가려진 존재였다.
그러다가 형은 대학에 합격하자마자 모든 것을 버리고 집을 뛰쳐나갔고 자신은 얼떨결에 공식 후계자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항상 자신은 우송의 후계자가 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런 자신을 알아봐주고 다가와준 사람이 아버지 친구의 딸인 은재였다.
어린 날부터 얼마나 은재를 사랑해왔는지 모른다.
그랬기에 형의 그림자에 불과한 자신이 항상 불만족스러웠다.
그런 자신을 은재가 진심으로 사랑해줄 거라고는 상상도 못해서 17세의 발렌타인 데이때 은재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은재가 신화대에 합격했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 준표와 잔디가 우여곡절 끝에 사랑을 지켜낸 모습을 보고 이정은 겨우 용기를 냈다.
뒤늦은 고백을 들은 은재는 눈물을 흘리며 항상 이정 자신뿐이었노라고 말해주었다.
그 후 2년은 이정에게는 천국같은 나날이었다.
항상 은재와 함께하면서 가족에게서 받은 상처가 다 아무는 것 같았다.

 

덕분에 이정은 형을 찾아가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형은 자신이 도예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에 자신에게 우송의 후계자 자리를 물려주기 위해 집을 나갔다고 말해줬다.
그러면서 미안하다는 사과도 함께 해줬다.
삭막한 집안에 이정 홀로 남게 해서 항상 마음에 걸렸노라고.
형의 진심을 뒤늦게 알게 된 이정은 형의 그림자라는 자격지심을 겨우 던져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 겨우 평안해진 이정의 마음은 은재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산산조각이 났다.
정말 은재를 따라 죽고 싶었지만 은재 부모와 형, F4 친구들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하지만 도저히 은재의 추억이 가득한 한국에 있을 수가 없어서 외국으로 떠나버렸다.
전시 핑계를 대며 전세계를 돌아다녔지만 항상 은재가 떠올라 슬픔은 커져만 갔다.
결국 외로움과 슬픔에 지쳐버린 이정은 한국으로 돌아왔다.
친구들의 곁에 있으면 언젠가는 상처가 아물 거라고 기대하면서.

 

그리고 잔디의 친구인 가을을 만났다.
묘하게도 은재와 닮은 구석이 있어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그러다 은재의 심장을 갖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에는 은재가 가을의 몸을 빌어 다시 자신에게 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가을에게 다가갔고, 가을과 함께 하면서 슬픔을 떨쳐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지후의 충고가 모두 다 옳았다.
두 사람은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단지 은재가 있어야만 살 수 있다고 믿었던 자신의 고집이 그 사실을 깨닫길 거부했던 거였다.
머리는 가을이 은재와 다른 사람이라는 걸 감지했는데 자신의 아집으로 그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결국 저 노래대로 은재에 대한 그리움이 집착으로 변해 가을의 마음을 알아보지 못하고 큰 상처를 주었다.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구원의 손길을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놓쳐버리다니...  

 

지금쯤 가을은 지후에게서 천사상을 받았는지 궁금해졌다.
라운지에서 잔디의 따귀와 함께 호통을 듣고 난 후 도예실로 오자마자 거의 무의식중에 만든 작품이었다.
그 천사상은 보면 볼수록 가을 같았다.
그래서 지후에게 가을에게 전해달라고 부탁을 했었다.
자신이 준 상처를 위로하는 데에는 턱없이 부족하겠지만 정말 고마웠다는 진심을 전해주고 싶었다.
어쩌면 영원히 가을이 자신을 용서하지 않을까 겁이 나서였을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이제 은재를 떠나보내며 얻은 상처는 아물었지만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 전시를 통해서 갈 길을 찾기를 간절히 바랬다.

 

하지만 지금 현재의 바람 한 가지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갈 때에는 가을도 자신도 서로 담담히 마주볼 수 있기를,
가을이 그 예쁜 웃음을 되찾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랬다.

 

 


-신화대-

 

신화대 교정은 벚꽃과 목련이 만개해 아름다웠다.
하지만 중간고사 기간인터라 신화대 학생들은 봄꽃이 만든 아름다운 경치를 마냥 느긋하게 감상할 수 없었다.

 

가을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학과일을 하려니 작년만큼 공부에 몰두할 수 없어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잔디와 지후는 그런 가을이 걱정되어 틈만 나면 불러내어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려고 애를 썼다.

 

한번은 준표가 가을을 교토로 데려가줄 수 있다는 말을 지나가듯 했다.
이정을 만나게 해주려는 속뜻을 알고 가을은 정중히 거절했다.
표면적인 이유는 중간고사 준비였지만 사실은 두려움 때문이었다.
천사상을 받은 후, 가을의 마음속은 희망과 절망이 번갈아가며 차지해 매우 어지러웠다.
만약 이정과 만나서 가을은 그저 고마운 사람일 뿐이고 은재만을 사랑한다는 말을 들으면 과연 그 상처를 감당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막연하게 이정이 돌아오면 그 때에는 그가 은재의 그림자를 선택한다해도 울지 않고 감내할 수 있을거라 믿었다.
지금으로서는 그저 이정이 건강하기를, 무사히 전시를 마치고 돌아오기만을 기도했다.

 

잔디와 함께 시험 준비를 마무리짓기 위해 가을은 도서관으로 서둘러 걸어갔다.
그러다 문득, 도서관으로 올라가는 계단 옆의 커다란 벚나무에 시선이 갔다.
빨간 머리 앤에 나오는 눈의 여왕을 떠올리게 만드는 나무였다.
끊임없이 꽃잎이 팔랑거리면서 춤추듯 내려오자 가을은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한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꽃잎이 눈송이 같다는 생각이 들자 곧이어 이정이 떠올랐다.

지난 겨울 첫눈과 함께 자신의 삶에 등장했던 이정이었다.
지금 교토는 벚꽃이 저버렸을텐데... 그는 올해 벚꽃을 봤을까...
가을은 이정을 그리워하는 자신의 모습이 이정과 같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어쩐지 눈물이 날 거 같아서 가을은 재빨리 고개를 젓고는 서둘러 계단을 올라갔다.
세 시간 뒤에는 또 시험이었다. 
지금 이렇게 감상에 젖을 여유가 없었다.

 

 


-오사카-

 

이정은 교토의 전시회를 성황리에 끝내고 오사카에서 전시회를 가졌다.
교토 전시의 소문이 좋게 난 탓인지 오사카에서는 관람객이 훨씬 더 많았다.
관서지방의 유명한 도예가들은 이정의 작품에 좋은 평가를 내렸다.
드물게 한국에서 아버지까지 연락을 해 줄 정도였다.

 

하지만 분주한 전시회가 끝나고 혼자 남게 되면 쓸쓸함과 허전함이 이정을 놓아주지 않았다.
그게 싫은 이정은 밤마다 정처없이 오사카를 돌아다녔지만,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전시회 마지막날 저녁, 이정은 오사카 도예가 단체의 초청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호텔에서 차를 몰고 나왔다.
그 날따라 하루 종일 비가 내려 길이 매우 막혔다.
이정은 약속에 늦지 않기 위해 마음이 급해졌다.
일본 차의 네비게이션이 그다지 좋지 않다는 걸 알았지만 일단 이정은 우회로를 검색했다.
잠시 후, 옆 차선에 빈틈이 생기자 네비게이션이 알려준 우회로로 가기 위해 차를 빼내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초보 운전인 듯 운전을 매우 서투르게 하던 작은 차가 차선을 바꾸는 이정의 차를 그만 들이박고 말았다.
이정은 순간 눈앞이 흐릿해지더니 정신을 잃어버렸다.

 

 


-같은 시간, 학교앞 식당-

 

가을은 드디어 중간고사를 끝내고 과친구들과 함께 저녁을 먹고 있었다.
시험 스트레스를 모두 날리기 위해 술도 마시던 중이었다.
술이 약한 가을은 좀처럼 마시지 않다 친구들의 성화에 못이겨 술잔을 집어들었다.
그러나 갑자기 술잔은 손가락에서 미끄러져 바닥으로 떨어지더니 깨지고 말았다.

 

"쨍그랑"

 

가을은 크게 당황했고, 과친구들은 깜짝 놀라 가을을 바라봤다.

 

정민: 가을아 괜찮아?
가을: 어, 어.. 괜찮아.
영경:(알딸딸한 상태) 추가을 너 벌써 취했니? 큭.
가을: 글쎄... (멋쩍게 웃으며) 어쨌든 그만 마시라는 하느님 계시인거 같은데...
수연:(어이없어) 야, 그런 게 어딨어? 너 아직 한 잔도 다 안마셨다.
정민:(카운터를 향해) 아줌마, 여기 소주잔 하나 더 갖다 주세요~

 

가을은 깨진 잔을 보면서 무언가 대단히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바로 그 때가 이정이 일본에서 교통사고를 당한 순간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