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기억의 주인

[소을 중편] 기억의 주인 13

지혜의 여신 2009. 6. 28. 22:31

 

 

 

-신화대-

 

가을은 오전 강의가 끝나자마자 사람이 없을만한 곳을 찾아 건물밖으로 나왔다.
밤새 울은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아침 일찍 얼음물에 얼굴을 담궜지만 부은 눈만큼은 감출 수 없었다.
그래서 보통은 잘 쓰지 않는 챙달린 헌팅캡을 깊숙히 눌러쓰고 학교에 왔다.
다행히도 오전에는 강의가 한 과목 뿐이라 공강시간과 점심시간에만 사람들을 피하면
오후에는 눈의 붓기도 많이 가라앉을 거라고 기대했다.   
또 한 가지 다행스러운 점은 오늘은 학과일이 하나도 없다는 거였다.
지금으로서는 밤새워 우느라 한잠도 못잔 몸이 저녁까지 버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무작정 걷던 가을은 어디로 가야할지 고민하느라 잠시 멈춰섰다.
날씨가 따듯하면 외진 곳의 벤치에서 자면 될텐데 아직은 찬바람이 부는 3월 중순이었다.
가뜩이나 추위에 약한 가을로서는 갈만한 곳이 별로 없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아쉬운 대로 도서관에 가야겠다고 결심한 찰나, 전화가 왔다.
발신인은 잔디였다.
받을까 말까 고민하다 잔디의 성격을 잘 알기에 통화 버튼을 눌렀다.

 

잔디: 가을~ 어디야? 오전 강의 끝났지?
가을: 지금 도서관으로 가는 중이야.
잔디: 나 잠깐만 보면 안 돼? 이제부터 두 시간이나 비잖아.
가을:(한숨) 잠깐으로 안 끝날 거 다 알거든. 오늘 수업 다 끝나면 봐.
잔디: 가을아 너 목소리 왜 그래? 어디 아파?

 

때로 잔디는 예상밖으로 예민하게 행동해서 가을을 놀래켰는데 지금이 딱 그랬다.
밤새 울어 가라앉은 목소리를 감지해낸 것 같았다.

 

가을: 감기 기운이 좀 있어서 그래.
잔디: 뭐? 어제 너무 얇게 입었더라니... 괜찮아?
가을: 아직은 괜찮아. 이따 봐.
잔디: 그래.

 

가을은 통화를 끝내고 안도의 한숨을 쉬고는 서둘러 도서관으로 갔다.

 

도서관에 들어가자마자 가을은 책가방을 보관함에 넣고는 3층 문학 서고로 올라갔다.
사람이 별로 없을만한 장소를 찾다보니 자연스럽게 시집이 있는 책장앞으로 왔다.
목적없이 책제목을 훑어보던 가을의 눈에 뮐러의 '겨울 나그네' 시집이 들어왔다.
지후의 연주가 생각나 가을은 시집을 집어들고는 소파로 가서 앉았다.
봄의 꿈을 가장 먼저 찾아 읽기 시작했다.

 

봄의 꿈(Fruhlingstaum)
 
난 활짝 핀 꽃의 꿈을 꾸었네. 5월에 피는 꽃을.
난 푸른 들의 꿈을 꾸었네, 즐겁게 새가 노래하고 있었네.

 

새벽닭이 울 때에, 난 눈을 떴다네
이 곳은 춥고 어두웠으며, 지붕에선 까마귀가 울고 있었네.

 

그런데 창문 유리위에, 누가 꽃들을 그려 놓았을까?
나를 비웃고 있는가, 겨울에 꽃을 봤다는 사나이를?

 

난 사랑의 꿈을 꾸었네, 아름다운 소녀와의 사랑을,
키스와 포옹의 기쁨과 행복의 꿈을.

 

까마귀가 다시 울때, 난 잠에서 깨어났네.
이제 나는 여기 홀로 앉아, 내 꿈을 되새겨 보네.

 

두 눈을 감아 버렸네, 내 가슴은 아직도 따듯하게 뛰고 있네.
꽃은 언제 다시 피려나? 그녀를 언제 다시 안아보려나?

 


시를 읽던 가을의 눈에 다시 눈물이 고이더니 한 방울 두 방울 흘러 넘쳤다.
이 시가 마치 자신의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이정과의 즐거운 시간이 시처럼 꽃과 사랑이 가득한 꿈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눈물을 닦기 위해 가을은 서둘러 화장실로 뛰어갔다.
찬물로 세수를 하고 난 후 거울을 보자 슬픔이 가득한 얼굴이 보였다.
실연당한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겨울길을 헤매는 나그네 같았다.
'지후 오빠.. 우리가 이렇게 될 걸 알고 그때 그 노래 연주했던 거에요? 그런 거에요?'

 

또다시 눈물이 차올라 가을은 재빨리 휴지를 눈가에 갖다댔다.

  

 

-F4 라운지-

 

준표는 잔디와 전화로 또다시 설전을 벌이고 있었다.
잔디의 목소리에 날이 바짝 선 게 화가 단단히 났다 싶어서 준표는 난감했다.

 

잔디: 이정 선배 대체 어디 있는 거야?
준표:(한숨) 나도 좀 알았음 좋겠다.
잔디: 구준표 혹시 너 일부러 안 알려주는 거 아니지?
준표:(버럭) 미쳤냐? 그 자식 뭐가 이쁘다고 숨겨줘. 나도 지금 찾고 있다고.
잔디: 선배 보면 당장 알려줘야해, 알았지?
준표: 알았어. 알았다고.

 

잔디가 먼저 전화를 끊자 준표는 홧김에 전화기를 소파에 던졌다.
우빈과 지후는 그런 준표를 보고 키득거렸다.

 

우빈: 정말 못말린다. 너희 어제 뭔 일 있었던 거야?
지후: 잔디가 무슨 일로 화가 났는데?

 

준표는 불만어린 표정으로 머리를 한 번 긁적이더니 소파에 풀썩 주저앉았다.

 

준표: 정말 난 가끔 잔디밭이 나랑 사귀는 건지 친구랑 사귀는 건지 분간이 안간다니깐.
지후: 가을이 문제야? (웃음 사라진다)
준표: 어제도 데이트하다 내가 화장실 간 사이에 지 친구한테 전화하더니, 오늘은 친구 목소리가 안좋다고

이정이 찾느라 난리다.
우빈: 왜? 이정이랑 가을 무슨 일 생겼대? (역시 걱정)
준표: 몰라~ 잠시 통화한 거 갖고 목소리가 심상치가 않다고 펄펄 뛰는데 못말리겠다.
우빈: 어제 둘이 화이트 데이라 만났던 걸로 아는데...
준표: 어후~ 소이정 이 자식 괜히 가을인지 겨울인지랑 만나느라 잔디밭 신경쓰게 만들고.
      아니, 만나려면 제대로 만나던가. 그럼 우리도 걱정 안하지.
      암튼 친구가 아니라 골칫거리 그 자체에요.
      진짜 내가 먼저 손보려고 벼르는 중인데 어디로 숨은 거냐고 (짜증 가득한 표정).
지후: 오늘은 내내 안보이던데.
우빈: 그러게. 또 도예실에 처박혀 있는 거 아냐? 곧 전시한다고 했잖아.

 

지후와 우빈은 불길한 예감이 들은 듯 서로 설마하는 시선을 교환했다.

 

 


-카페-
 
잔디는 평소와 달리 창가가 아니라 가장 안쪽 자리에 앉아 초조한 표정으로 계속 출입문을 바라봤다.
짧은 전화통화로 들었던 가을의 목소리는 아무래도 감기 기운때문에 가라앉은 것 같지 않았다.
준표의 말대로 별 일이 없기를 바랬지만 불안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드디어 가을이 들어왔다.
늘 앉던 창가로 걸어가다 두리번거리더니 잔디를 발견하고는 미소를 지으며 잔디의 맞은편에 앉았다.
하지만 잔디는 가을이 평소와 달리 모자를 깊이 눌러쓴 모습을 보자 더욱 불안해졌다. 

 

가을: 오래 기다렸어?
잔디: 조금. 너 웬일로 모자를 다 썼어?
가을: 추워서.

 

가을은 예상대로 잔디가 예민한 반응을 보이자 우려가 앞섰다.
그나마 부은 눈이 어느 정도 가라앉은 게 천만다행이다 싶었다.
차를 주문하자마자 잔디의 질문이 쏟아졌다.

 

잔디: 정말 감기 맞아?
가을: 응. (웃으면서) 넌 어제 어땠어? 헬기는 정말 안탄거야?
잔디: 말 돌리지 마. 너 정말 어제 무슨 일 없었던 거야?

 

가을은 잔디가 자신의 의도대로 따라오지 않자 난감했다.
지금 자신을 보는 잔디의 눈은 지후만큼이나 날카로왔다.
어떻게해야 울지 않고 담담하게 말을 할 수 있을지 고민스러웠다.

 

잔디: 이정 선배랑 싸웠어?
가을: 나 어제... 다 끝냈어.
잔디:(경악해서 큰 소리로) 뭐? 진짜?
가을:(목소리 낮추며) 잔디야 제발 목소리 좀 낮춰줘. 사람들이 다 보잖아.
잔디:(조금 작은 목소리로) 왜? 뭣땜에?
가을: 날 너무 몰라줘서. 나 혼자서만 챙겨주는 거 지쳤어. 

 

잔디는 예상밖의 소리에 놀라 가을의 얼굴을 뚫어져라 봤다.
가을은 표정도, 목소리도 차분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기운이 없어 보였다.

 

잔디: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응?
가을: 이정 선배 나 좋은 데 데려가줬어. 정말 근사한 곳에서 맛있는 음식 잘 얻어 먹었어.
      그런데...
잔디: 그런데?
가을: 정말 엉뚱한 선물을 주더라고. 차라리 사탕이나 줬음 나았을텐데.
잔디: 뭘 줬길래?
가을: 그래서 나한테 진심이 아니다 싶어서, 이제 짝사랑 그만하기로 했어.

 

가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주문한 홍차가 나왔다.
잔디는 가을이 홍차 티백을 꺼내는 모습을 가만히 보다 다시 입을 열었다.

 

잔디: 도대체 뭘 줬길래 그러는 거야? 가을아, 나 좀 봐봐.
가을:(단호한 말투) 생각도 하기 싫어. 그건 더 이상 묻지 말아주면 고맙겠어.

 

가을은 잔디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여 홍차를 한 모금 마셨다.
잔디는 답답해서 견딜 수 없었다.
결국 두 손을 내밀어 가을의 손을 꼭 잡았다.

 

잔디: 너 정말 왜 이러는 거야? 어제만해도 이정 선배 그렇게나 좋아하던 애가 갑자기 끝냈다고 하고.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나한텐 말 못해?
가을:(잔디를 보며 담담하게) 현실을 깨달은 거야. 나혼자 좋아한다고 다 되는게 아니더라고.
잔디: 이정 선배가 혹시 죽은 첫사랑 얘기했어?
가을: (한숨) 첨엔 몰랐는데 점점 선배가 그 첫사랑만 생각하는 거 알겠더라고.
      너도 알지? 나 사람 표정 잘 읽는 거...
      나랑 같이 있어도 그 사람만 생각한다면 더 이상 만나는 게 무슨 소용있겠니.
      그래서 관두기로 했어. 어쨌든 난 최선을 다했으니 이제 미련도 없고 부과대 맡아서 일도 많고...
잔디:(걱정어린 목소리로) 너 정말 괜찮은 거야? 응?
가을: 물론 조금은 맘아프지. 처음으로 좋아한 사람인데...
      그래도 할 수 없잖아... 어차피 첫사랑은 안이뤄진다는 말도 있잖아.

 

가을은 억지로 잔디에게 웃어주었다.
하지만 잔디의 눈에는 그 웃음이 너무나도 슬퍼보였고 애써 괜찮은 척하는 가을이 너무 안쓰러웠다.  
 
잔디:(안타깝게) 가을아...
가을:(시선을 깔고) 그냥 지난 겨울 봄꿈을 꾸었다고 생각할래.
잔디: 뭐?
가을: 이제 봄이 왔으니깐 꿈에서 깨어나야지.

 

가을은 조용히 차를 마셨고 잔디는 안타까운 눈빛으로 가을을 봤다.
카페 안에서는 화이트 데이 다음날답지 않게 슬픈 발라드가 흘러 나왔다.
 
늘 너에게는 잘 하고 싶은 그 마음 뿐 다른 뜻은 정말 없었는데
그게 왜 우릴 더욱 멀게 했는지 생각하면 너무 안타까워.
이제는 다 끝난걸 알아. 영원히 난 너를 볼 수가 없어.

 

노래를 듣던 가을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그런 가을을 보며 잔디의 눈이 동그래졌다.
잘 버텨왔던 가을은 결국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소리없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착잡한 표정으로 잔디는 가을의 옆자리에 앉아 조용히 가을의 머리를 자신의 어깨에 올려놓았다.
한 손으로는 냅킨을 집어 가을에게 건네주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가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말없이 냅킨을 받아든 가을은 본격적으로 잔디에게 몸을 기대어 눈물을 흘렸다.

 

잔디의 얼굴은 가을에 대한 안쓰러움과 이정에 대한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
왜 하필 화이트 데이에 이별을 하게 만들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어제 기대로 눈빛을 반짝이던 가을이 하루만에 노래가사를 들으며 울고 있다니 정말 기가 막혔다.
맘같아선 당장 이정을 찾아가서 따지고 싶었지만 지금은 가을을 위로하는 게 먼저였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가을은 눈물을 그치고 안정을 찾았다.
자신을 걱정어린 시선으로 보는 잔디가 보였다.

 

잔디: 가을아 오늘 우리집에서 잘래?
가을: 그건 곤란한데. 내일은 1교시부터 있거든.
잔디:(일부러 씩씩하게) 그럼 지금 들렀다 가. 구준표가 어제 준 선물 보여줄게.
가을:(억지로 웃으며) 또 얼마나 비싼 걸로 준 거야?
잔디:(가을에게 어깨동무하며) 기대하라고.

 

 


-이정의 집-

 

거실 탁자와 바닥에 빈 술병이 가득한 가운데 이정은 소파에 누워 있었다.
어젯밤 가을을 울려버리고는 밤새 클럽에서 술을 마시다 본가의 기사를 불러 겨우 집으로 왔었다.
옷도 갈아입지 않고 그대로 거실 소파에 잠이 들었다가, 깨어나자마자 다시 집에 있던 술을 모조리 꺼내 마셔버렸다.
아무리 술을 마셔도 상처를 드러낸 채 눈물을 흘리는 가을의 얼굴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니 마실 수록 그 슬픔에 젖은 얼굴이 오히려 더 또렷하게 떠올랐다.
차라리 자신에게 화라도 냈더라면 이렇게까지 죄책감과 자기 혐오에 시달리지 않았을 지도 몰랐다.
그저 떨리는 목소리로 울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얘기했던 가을의 말이 자신의 이기심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확실하게 알려줬다.
지후의 말대로 자신은 가을을 은재 대용품 취급을 했었다.
단지 은재의 심장을 이식받았다는 이유로 가을의 마음을 하나도 헤아리지 않은 채로 말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가을의 마음은 처음부터 생각조차 하지 않았었다.
'절대 용서하지 않겠지.'

 

이정은 시간이 몇 시인지도 확인하지 않은 채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멍하니 있었다.
머리속이 텅 비어버린 것 같았다.
갑자기 침묵만이 흐르던 집안에 벨소리가 울려퍼졌다.
얼굴을 찡그리던 이정은 마지못해 전화기를 집어들었다.
발신인은 지후였다.
올 게 왔다싶어 통화버튼을 눌렀다.

 

지후: 소이정. 나 지금 너희 집으로 가고 있어.
이정: 하아~ 정말 너 귀신이구나.
지후: 학교에도, 도예실에도 안나타났으니 집밖에 더 있겠어.
      그래도 전화받는거 보니 이젠 정신은 차린 모양이네.
      조금전까지 너한테 수십통도 넘게 했는데.
이정: 언제 도착해?
지후: 10분후에.
이정: 알았다.

 

이정은 종료 버튼을 누르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주변에 널린 빈 술병을 보자 한숨이 절로 나왔다.
비틀거리면서 부엌으로 들어간 이정은 우선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셨다.
찬물이 몸에 들어가자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다시 거실로 나와 술병을 모두 치우니 초인종이 울렸다.

 

현관문을 여니 딱딱하게 표정이 굳은 지후가 서있었다.
이정이 들어오란 말도 하지 않았지만 자기집인양 지후는 성큼성큼 들어왔다.
평소 깔끔했던 거실은 술냄새가 가득했고, 항상 세련된 분위기를 냈던 이정은 옷이 다 구겨진 채로 산발이 된 머리에 퀭한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지후는 한숨을 내쉬었다.

 

지후: 하아~ 역시 예상대로구나, 소이정.
이정: 다 알고 왔잖아.
지후: 여기 오는 내내 내가 혼자 소설쓰는 거였으면 했는데...

 

이정은 머리가 아파 소파에 앉았다.
지후도 맞은편에 앉았다.

 

지후: 어제 무슨 일 있었던 거야? 어떻게 했길래 가을이 울린 거야?
이정:(지후 보지 않고) 가을양 지금 어때?
지후: 몰라.
이정: 뭐? (놀라 지후 얼굴 본다)
지후: 아마 지금은 잔디랑 같이 있을 거야.
이정: 아, 금잔디가 있지. (고개를 젖혀 소파에 기댄다)
지후: 결국 가을이가 은재가 아니라는 거 깨달은 거냐?
이정: 그래... 아주 최악의 방식으로...
      네 경고 무시하고 가을양 은재로 생각하다 상처주고 울려버렸어.
      나란 놈 정말 구제불능에 이기주의자라는 거 뼈저리게 깨달았다.
지후: 어떻게 한 건데?

 

이정은 어제 일을 떠올리자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또 다시 가을의 눈물이 떠오르자 가슴이 쓰라렸다.

 

이정: 내가 가을양한테 아로마 램프를 만들어줬어.
      은재가 아로마 테라피 좋아해서 당연히 가을양도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거든...
      근데 가을양은 그런 얘기 나한테 한 번도 안했다며 굳어버렸어.
지후: 바보같은 놈.
이정: 그냥 바보라면 가을양 울리지도 않았겠지.
      역시 난 아버지 닮았나봐. 그렇잖으면 그렇게 잔인할 수 있겠어.
       
지후는 가을이 지금 얼마나 아파하고 있을지 짐작이 갔다.
결국 비극을 초래한 이정이 정말 밉고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이렇게 무너져버린 이정의 모습을 보니 생각했던 대로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지후: 괜한 핑계대지 마.
이정: 뭐?
지후: 이번에 네가 벌인 일이 네 아버지랑 무슨 상관이 있단 거야?
      네가 맹목적으로 은재의 환상 쫓다가 괜히 착한 가을이 상처준 거잖아.
이정: 하하... 그런건가...
      난 아버지보다 더 나쁜 놈이었구나... 아하하

 

미친 사람처럼 웃는 이정을 보고 있자니 지후는 억눌렀던 분노가 되살아났다.
자리에서 일어나 이정의 멱살을 잡았다.

 

지후: 뭐가 우스워? 가을이 울려놓고 지금 웃음이 나와?
이정: 윤지후, 나 정말 신도 버렸나보다.
      부모님은 형밖에 몰랐는데 그 형은 날 위한답시고 날 버리고 떠나가고..
      은재가 날 구원해주나 했는데 갑자기 영원히 날 떠났고...
      순수하게 날 도와주고 싶어했던 가을양은 내 잘못으로 다신 볼 수 없게 되었고...
      너도 이젠 날 용서하지 않을 거고...
      준표랑 우빈이도 이제 사실을 다 알게 되면 경악하고 나한테서 멀어지겠지?
      내가 얼마나 대책없이 나쁜 놈이면 이렇게 완벽하게 혼자가 되겠어. 안그래? 아하하
지후:(버럭) 소이정! 정신차려!

 

지후는 이정이 순간 미쳐버린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다행스럽게도 이정은 기괴한 웃음을 그쳤다.
이정의 얼굴에는 이제 후회와 자기 혐오가 피어올랐다.

 

이정:(갑자기 격정적으로) 알아. 진작 네 말을 들었어야 했어.
      아니, 최소한 가을양이 자신의 꿈을 얘기해줄 때, 그 때 가을양이 은재가 아니란 걸 인정해야만 했어.
      근데 내가 억지를 부린 거야.
      추가을은 그저 차은재의 심장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본인의 꿈을 향해 달려가는 한 사람이라는 걸 받아들이기 싫었어.
      그냥 은재처럼 내 곁에만 있어주기만을 바랬어.
      그래서 일방적으로 화이트 데이 약속을 잡고 은재를 위한 선물을 가을양에게 했던 거야.
      그리고 그 결과는 돌이킬 수 없는 상처였어. 가을양과 나 모두에게.. (목이 메어온다)

 

지후는 멱살잡았던 손을 풀었다.
우려했던 최악의 상황은 이미 눈앞에 벌어졌고 수습할 길은 보이지 않았다.
이정이 자신의 잘못을 끝까지 깨닫지 못했다면 절대 가만두지 않았겠지만, 설사 그랬다해도 그것으로 가을의 상처를 달랠 수는 없다는 걸 너무 잘 알았다.    

 

이정은 무너지듯 소파에 풀썩 앉았다.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져 양손으로 눈과 이마를 감쌌다.
지후 앞에서 울고 싶지는 않았지만 손바닥과 얼굴이 닿은 부분으로 눈물이 지나가는 게 느껴졌다.

 

지후는 소리없이 우는 이정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은재가 죽었을 때에도 남들 앞에서는 절대 울지 않던 이정이었다.
결국 상처는 가을과 이정 모두에게 너무 깊었던 모양이었다.
앞으로 두 사람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했다.

 

지후: 나 간다.

 

천천히 집을 나가는 지후나, 소파에 앉아있는 이정이나 양쪽 모두 참담한 심정이었다.
푹 가라앉은 거실의 분위기가 이정과 지후를 삼켜버린 것 같았다.       

 

 


-가을의 방-

 

잔디의 집에서 돌아온 가을은 방청소에 몰두했다.
마치 이정에 대한 감정의 찌꺼기까지 없애려는 듯 책상 아래와 옷장, 침대 아래까지 샅샅이 쓸고 닦았다.
아버지는 느닷없는 가을의 방청소를 보고 부과대표 일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고 생각했다.
한 시간에 걸친 대청소를 마치고 가을은 침대에 걸터앉아 생강차를 마시며 휴식을 취했다.
깔끔해진 방을 둘러보자니 무언가 후련해진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찻잔을 내려다 본 순간, 그 잔이 이정의 선물임을 깨닫고는 다시 슬픔이 밀려왔다.
'이럼 안 돼. 지금까지 죽어라 청소한 보람이 없어지잖아.'

 

가을은 고개를 젓고는 mp3 플레이어를 꺼내 이어폰을 귀에 꼽고는 음악을 틀었다.
처음에는 은근히 리듬감있는 시부야 클럽 음악이 흘러나와 의도대로 어느 정도 마음을 가볍게 해줬다.
하지만 언제 다운받은 건지 기억도 나지 않는 음악이 흘러나오자 가을은 홀린 듯 몇 번이나 반복해서 들었다. 
 
So goodbye, I think I should have told you. 그럼 잘 있어요. 하지만 이 말은 꼭 해야 할 것 같네요.
That I`m still yours. 난 아직도 당신뿐이에요.
So goodbye, my love.  그럼 잘 있어요, 내 사랑.

 

So goodbye, I hear the birds singing. 그럼 잘 있어요. 새들이 노래하는 소리가 들리네요.
It`s time to go. 이제는 가야 할 시간이라고요.
So goodbye, my friend. 그럼 잘 있어요, 내 친구

 

I thought you would do, but I was wrong. 당신도 나와 같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틀렸네요.

Now I see myself still left alone. 이제 난 혼자 남아있네요.
Now I think I know where I belong. 이제는 내가 어디에 있어야 할 지 생각해야겠어요.
I don`t want to let this life go on, no more, no more. 난 더이상 이런 삶을 계속 살고 싶지 않아요. 더 이상은 싫어요.

 

So goodbye, those bitter sweet memories once so lovely. 그럼 안녕. 한 때는 너무나도 사랑스러웠지만 이젠 달콤씁쓸한 기억들이여.
So goodbye, I`m gone. 그럼 안녕. 난 이제 떠나네.

 

So goodbye, those pretty starry eyes once just for me. 그럼 안녕. 한 때는 나만을 바라봤던 아름답게 빛나는 눈동자여.
So goodbye I`m gone. 그럼 안녕히. 난 이제 떠나요. 
So goodbye.. 그럼 잘 있어요..


가을의 눈에서 또 다시 눈물이 흘러내렸다.
자꾸만 우는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졌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왜 이렇게 가사가 자신의 얘기같은지 몇 번을 들어도 다음 곡으로 넘어갈 수가 없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가을은 일찍 자겠다는 애초 계획도 잊은 채 이 담담하게 이별을 고하는 노래를 들었다.
     

 


-이정의 방-

 

이정은 비틀거리며 방에 들어오더니 가운만 입은 채 침대위에 드러누웠다.
지후가 떠난 후 한동안 울다가 겨우 몸을 움직여 샤워를 하고는 방으로 들어온 상태였다.
어젯밤부터 계속 술을 마셔서인지 아니면 지후에게 감정을 다 쏟아낸 탓인지 몸에 힘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하자니 한숨부터 나왔다.
가을과 잔디는 물론이고 다른 F4 친구들을 만날 생각을 하니 암담했다.
또 작년처럼 해외로 도망가야하나 싶었다.
'비겁한 놈'

 

항상 자신은 도망만 다녔다.
은재가 형을 좋아한다고 믿었을 때에는 다른 여자들과 가벼운 만남을 전전했었다.
끝까지 자신의 사랑을 지켜냈던 준표를 본 후에야 비로소 은재에게 고백을 할 수 있었다.
뒤늦은 고백을 받아주었던 은재가 하늘로 떠나버리자 추억이 가득한 한국에 있을 수 없어 전시를 핑계로 해외를 떠돌았었다.    
그때는 F4 친구들이 자신을 기다려주었지만, 이제 다시 떠난다면 아마 기다려주지도 않을 것이라 생각하니 쓸쓸해졌다.
그렇지만 그것은 자신이 자초한 결과였다.
아무리 은재가 자신의 모든 것이라해도 가을에게 그렇게 잔인하게 굴어서는 안되는 거였다.
또 다시 어젯밤에 울던 가을의 얼굴이 떠오르자 가슴이 답답했다.

 

이정: 미안해 가을양. 정말 미안해...  

 

손으로 눈을 가린 채 이정은 뒤늦게 조용히 사과를 했다.
어제 가을에게는 차마 할 수 없었던 사과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