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기억의 주인

[소을 중편] 기억의 주인 12

지혜의 여신 2009. 6. 28. 22:29

 

 

 

 

 

-신화대-

 

개강과 입학을 맞은 교정은 활기가 넘쳤다.
가을은 뒤늦은 1학년 새내기 생활을 마치고 문헌정보학과의 2학년 부과대표를 맡아 분주하게 지냈다.
과대표와 함께 개강 파티를 비롯한 여러 가지 행사를 추진하느라 요즘은 잔디조차 자주 보기 힘들었다.
그나마 같이 교양과목을 듣지 않았다면 일주일에 한 번 보는 것조차 어려웠을 지도 몰랐다.

 

공강시간을 맞아 잠시 사회대 학생 휴게실에서 휴식을 취하던 가을은 휴대전화의 진동을 느끼고 전화기를

꺼냈다.
발신인을 확인하니 예상대로 이정이었다.
받을까 말까 고민하다 나중에 또 전화가 올 거라는 생각에 가을은 통화버튼을 눌렀다.

 

가을: 이정 선배?
이정: 지금 어디에 있어?
가을: 사회대 건물이에요.
이정: 요새는 아예 그곳에서 상주하네.
가을: 그렇게 됐네요. 선배는요?
이정: 난 지금 라운지야. 오늘 수업 다 끝나면 이쪽으로 올래?
가을: 미안해요. 요새는 일이 많아 정신이 없네요. 이달말이 되어야 좀 한숨 돌릴 수 있을 거 같아요.
이정: 일이 그렇게나 많은 거야?
가을: 그것도 있고요. 이제 전공을 선택하니 공부할 것도 많아서요.
이정: 그래...
가을: 미안해요. 이만 끊을게요. 오늘 학과별 회의 준비를 해야하거든요.
이정: 알았어.

 

먼저 통화를 끝낸 가을은 이정의 아쉬운 듯한 말투에 미안함을 느꼈다.
지금이라도 당장 F4 라운지로 가고 싶었지만 막상 이정의 얼굴을 보자니 자신이 없었다.
가을은 개강 직전의 강원도 여행을 떠올렸다.

 


2월의 마지막날, 이정은 가을과 함께 강원도로 당일치기 여행을 떠났었다.
이제는 눈을 보기 힘들테니 마지막으로 구경하자는 제안에 기쁜 마음으로 이정의 차를 탔던 가을이었다.
차안에서 가을은 전시 준비로 바쁠텐데 시간을 뺏어 미안하다고 사과했고, 이정은 머리식히고 싶었다며

안심을 시켜줬었다.
이정이 도착했다며 차를 세우자, 주변은 전날 내린 폭설로 하얗게 뒤덮여 아름다웠다.
가을은 기쁨에 넘쳐 정신없이 설경을 구경하고 사진을 찍었었다.

 

그렇지만 그 행복은 점심식사를 하러 간 허름한 식당에서 깨져버렸다.
이정은 분명 가을이 좋아할 거라면서 쟁반국수를 주문하고는, 매우면 설탕을 넣어 먹으라고 조언을 해줬다.
가을은 그 음식도, 조언도 은재에 관한 이야기라는 걸 깨달았지만 차마 확인을 할 수 없었다.
결국 국수도 다 먹지 못하고 가을은 그 여행이 은재의 취향에 따른 것인지를 고민하느라 마음이 무거웠었다.

 


이제 가을은 이정을 만나는 게 두려웠다.
자꾸만 이정의 말과 행동이 자신을 위한 것인지 은재와의 추억을 떠올리기 위한 것인지 묻고 싶어졌다.
처음에는 그런 의심이 들어도 금방 떨쳐낼 수 있었지만 점점 그러기가 힘들어졌다.
아무리 지후가 자신의 욕심이 당연한 것이라 말해도 가을은 처음 결심과 상충되는 자신의 마음과 싸우느라

지쳐버렸다.
그래서 온갖 핑계를 다 대어가면서 이정과의 만남을 피했다.
당분간이라도 이정을 만나지 않으면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지 않을까 실낱같은 기대를 품고서.

 

 


-F4 라운지-

 

이정은 가을과의 통화를 끝내고 미간을 찌뿌렸다.
새학기가 시작되자 가을이 부과대표가 되어 분주하게 지내는 바람에 아직까지 한 번도 얼굴을 못봤다.
하지만 어쩐지 가을이 자신을 피하는 것 같아 더 기분이 안좋았다.
그런 이정을 보고 우빈이 다가왔다.

 

우빈: yo 이정, 왜 그래? 얼굴표정 안좋다.
이정:(애써 냉정하게) 가을양이 엄청 바쁘네. 부과대표가 되면 그렇게 할일이 많나?
우빈:(어깨 으쓱하며) 글쎄, 우리가 언제 그런 거 해봤어야지.

 

잔디는 준표와 함께 간식을 먹다 우빈과 이정의 대화를 듣고 가을의 편이 되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잔디: 선배, 가을이 엄청 욕심 많은 애에요.
이정: 욕심? (잔디를 보면)
잔디: 걔 돌아가신 어머니 보험금으로 학교 다닌다고 늘 열심히 대학생활 해야한다는 사명감에 불타있거든요.
      그래서 학기중엔 공부하느라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하는 애라고요.
      근데 이번 학기엔 부과대까지 맡으니 정신이 없을걸요.
      오죽하면 알바도 안하고 주말 과외만 하나 구하고 말았겠어요.
준표: 정말? 의외네.
우빈: 그래서 늘 장학금에 목을 맸었던 거구나. (준표 보며) 너 힘쓰면 장학금 받게 할 수 있지 않냐?
잔디:(발끈) 선배, 안그래도 우리 가을이 실력이면 성적 우수 장학금 얼마든지 받거든요.
준표: 잔디밭, 성질 내지 마. 우빈이는 어디까지나 니친구 도와주려고 한 거잖아.

 

준표와 잔디는 결국 이 문제로 간식을 먹는 내내 말다툼을 벌였다.
이정은 잔디의 설명을 듣고 생각에 잠겼다.
한편 지후는 말없이 모든 대화를 다 들으면서 이정을 유심히 지켜봤다.

 

 


-도예실-

 

"쨍그랑"

 

자기가 깨지는 소리가 도예실을 채웠다.
이정은 오늘 새로 구운 작품들을 하나 하나 망치로 깨고 있었다.
보통 흙일을 할 때에는 잡념이 들지 않았는데 오늘따라 완전히 집중할 수 없었다.

 

작업대와 바닥에 가득한 파편을 보면서 이정은 인정하기 싫었던 이유를 떠올렸다.
은재는 자신의 마음을 받아 준 후부터는 별다른 약속을 하지 않아도 매일 도예실로 찾아왔었다.
함께 있는게 당연한 일인 것처럼.
하지만 가을은 지금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느라 이정을 외면하고 있었다.
은재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행동이었다.
마음 한 편이 답답해졌다.

 

 


-지하철 역앞-

 

가을은 개강 파티를 끝내고 자정이 거의 다 되어 지하철을 내렸다.
원래 술을 잘 못하는 터라 3차까지 간다는 과 친구들과 헤어져 집에 오는 길이었다.
약간은 발간 얼굴로 집에 들어가려니 아버지와 겨울이에게 신경이 쓰여 역에 있는 화장실에 들러 찬물로

세수를 하고 나왔다.
남은 취기가 완전히 가신 듯해 개운해진 가을은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역밖으로 나와서 몇 걸음 걷지 않았는데 갑자기 눈앞에 환해졌다.
무슨 일인가 싶어 어리둥절해하며 손으로 눈앞을 가리자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이정: 그대 술마신 거야?

 

이정이 차에서 내려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가을은 온 몸이 굳어버리는 것 같았다.
차의 헤드라이트를 등에 지고 걷기 때문에 이정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에는 불만이

어려있었다.

 

가을: 이정 선배...
이정: 술도 깰겸 잠시 나랑 드라이브 하지 않을래?

 

가을은 지금 거절할 핑계가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순순히 이정을 따라 차에 올랐다.
사실 반가운 마음도 아주 많았던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이정의 차안-

 

차안에서 이정의 얼굴을 자세히 보니 조금 전의 목소리와는 달리 평소처럼 여유가 있는 듯 했다.
하지만 가을은 이정의 눈에서 불만 한 자락을 읽어냈다.

 

이정: 오늘은 무슨 일이었던 거야? 술을 다 마시고?
가을: 개강파티가 있었어요.
이정: 그런 거 하면 이렇게 늦게까지 술을 마셔?
가을: 난 양호한 거죠. 3차간 애들도 있거든요.
이정: 술도 잘 못하는 데 3차 갔다간 아예 자려고? 게다가 남학생들도 있을 거 아냐.
가을:(기막혀서) 선배, 우리 과엔 남자 별로 없어요.
      그리고 솔직히 가끔은 술도 잘해서 밤새도록 같이 어울려 놀면 참 좋을텐데 하는 생각 들어요.
이정: 꼭 밤새 술마셔야 친해지는 건 아니잖아.
가을: 그건 그렇지만, 나중에 사회생활 할 때에는 술못하는 게 단점이 되겠다 싶어 걱정스럽기도 해요.

 

이정은 벌써 졸업 이후를 생각하는 가을이 낯설게 느껴졌다.
정작 졸업반인건 자신인데.
'하긴, 난 앞날이 다 정해진 사람이지'

 

가을: 근데 무슨 일이에요? 전시회도 이제 한 달도 안남았잖아요.
이정: 늘 보던 얼굴 못보니까 작업도 안되더라고.
가을: 예?
이정: 오늘 구운 것들 다 쓸 수 없어서 깨버렸어.
가을:(기겁해서) 선배!
이정: 잔디한테 얘기 듣긴 했는데...(한숨) 어머님한테 자랑스러운 딸이 되고 싶은 맘 이해해.
     하지만 주말까지 시간을 못내는 건 이해하기 힘들더라고.
가을: 미안해요. 개강한지 얼마 안돼 정신이 없었어요.
      나 어렸을 때부터 워낙 병원에 자주 입원을 해서 잔디를 빼면 책이 내 유일한 친구였어요.
      그래서 책과 함께하는 도서관 사서가 되고 싶었어요.
      이제 문헌정보학과에 들어가서 내 꿈을 이루기 위한 첫걸음을 내딛게 되었거든요.
      (진지한 어조로) 선배에게 도예가 전부인 것처럼 지금 내겐 공부가 전부에요.

 

두 사람은 잠시동안 침묵에 빠졌다.
이정은 그동안 봐왔던 가을과 지금 옆에 앉은 가을이 약간 틀리다는 것을 인정해야했다.
자신에게 모든 것을 맞추던 모습은 사라지고 이제 가을은 본인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은재와는 다른 가을의 세계에 대해서.
무언가 자신의 예상과 틀어지고 어긋나는 게 느껴졌다.
이정은 그게 너무나 싫었다.

 

이정: 설마 화이트 데이때도 학과 업무로 바쁜 건 아니겠지?
가을: 네?
이정:(달콤한 말투로) 그 날만큼은 날 위해 시간을 내줄 수 있지?
가을:(당황) 그게... 확인을...

 

이정은 한 손으로만 운전하며 한 손은 가을의 손을 꼭 잡았다.
가을이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하는 게 보였다.

 

이정: 설마 그대의 과친구들이 모두 다 솔로부대인건 아니겠지?
가을: 예?
이정: 그 날만큼은 그대가 일찍 집에 가도 모두 다 양해해주지 않을까?
가을: 아마... (핑계거리가 생각나지 않는다)
이정: 정 힘들면 내가 데리러 갈게. 그럼 다 이해해주겠지?
가을: 안그래도 돼요!

 

급기야 가을은 비명조로 소리쳤다.
사회대에 이정이 나타나 자신과 함께 가는 모습을 과 친구들이 보게 된다면 뒷일이 감당되지 않을 게 뻔했다.
이정은 사색이 된 가을의 얼굴을 보고 장난꾸러기처럼 씨익 웃었다.

 

이정:(만족스러운 말투로) 그 날 수업이 몇시에 끝나지?
가을: 그 날은 가장 늦게 끝나요. 6시에요...
이정: 늦게도 끝나는군. 그럼 늦어도 6시 반시까지는 만날 수 있겠지?
가을: 예...

 

가을은 화이트 데이가 기다려지는 동시에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지금 이정이 데이트 신청을 하는 사람이 자신인지 은재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신화대-

 

수업이 끝나고 가을과 잔디는 함께 강의실에서 나왔다.
두 사람 모두 다음 시간은 비어있는 터라 학생회관 휴게실로 갔다.
캔커피와 홍차를 각각 들고 잔디와 가을은 저녁에 있을 화이트 데이 이벤트에 대한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가을: 잔디야, 준표 선배가 오늘은 어디로 안데려간데? 작년엔 헬기까지 동원했다면서 큭큭.
잔디:(끔찍하다는 표정으로) 올해는 제발 조용히 넘어가자고 신신당부를 했다고.
가을:(눈빛을 반짝이며) 그럼 어디로 가?
잔디: 몰라~ 무조건 예쁘게만 입고 집에서 기다리라는데 그럼 내가 아나? 칫!

 

잔디는 뾰루퉁하게 대답했지만 가을의 눈에는 그런 잔디가 너무나도 사랑스럽게 보였다.
평소와는 다르게 정성스럽게 화장한 잔디의 모습은 분명 오늘을 기대하는 숙녀의 모습이었다.
가을은 그런 잔디가 몹시도 부러웠다.
제대로 연애를 하지 못하는 자신과 달리 한없이 사랑받고 사랑하는 잔디가 눈부시도록 예뻐보였다.
잔디는 조심스럽게 가을에게 말을 걸었다.

 

잔디: 넌 오늘 이정 선배와 어디서 만나기로 했어?
가을: 나? 난 수업이 6시에 끝나서 바로 학교 앞에서 만나기로 했어.
잔디: 그래? 어디 좋은데 데려가려나?
가을: 글쎄... 난 도예실이 제일 좋은데.
잔디: 왜 하필이면 거기야?
가을: 그냥... 이정 선배의 본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라서 그런가?
      거기 흙냄새도 좋고, 사방에 가득한 자기 보는 것도 좋고, 선배가 주는 차도 제일 맛있고...
      도예에 집중하는 이정 선배는 정말 근사하거든...

 

가을의 꿈꾸는 듯한 표정에 잔디는 마음이 착잡해졌다.
추위를 많이 타는 가을이 아직 꽃샘 추위가 남은 3월에 바지 대신 원피스를 입고, 어그 부츠 대신 하이힐을

신고, 좀처럼 하지 않는 화장까지 했다.
이정의 작업공간이 제일 좋다고 말할 정도로 이정에 대한 마음이 애틋한데 정작 이정은 가을의 맘을 몰라준

마음의 평화나 얻으려한다니.
너무 불공평하단 생각이 들었다.

 

몇 번이나 이정에게 따질까 했지만 준표의 만류로 꾹 참고 있었다.
차라리 가을이 바빠서 못보는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었다.
자기 생활에 충실한 가을을 보면 이정도 가을의 빈자리를 아쉬워하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오늘은 화이트 데이니까 가을이 즐거운 시간을 갖기를 바랬다.

 

잔디: 그래도 도예실은 안 돼. 너 발렌타인 초콜렛 얼마나 정성스럽게 만들었는데 그만한 보답은 해줘야지.
가을: 얘도 참... 난 어디든 이정 선배와 함께면 괜찮아.

 

속으로 가을은 덧붙였다.
'은재씨만 생각해주지 않으면 좋겠어. 그럼 어디서 뭘하든 최고의 화이트 데이가 될 거야'

 

 


-고급 레스토랑 겸 바-

 

중세 유럽의 귀족 연회장같이 꾸며진 이 곳에 도착하자마자 가을은 감탄사를 연발했다.
자신이 정말 한국에 있는 게 맞나 의심스러워질 찰나, 이정은 웃으며 창가 자리로 데려 갔다.
커다란 통유리를 통해 보이는 정원에는 아름다운 조각과 장식이 은은한 조명을 받아 빛이 났다.

 

앞에 앉은 이정은 오늘따라 너무나도 근사했다.
몸에 꼭맞는 진한 회색 수트에 스카프를 하고 자신을 향해 달콤한 웃음을 지어주는 이정을 보자니 아찔하기까지 했다.
그런 가을의 마음을 아는 지 모르는지 이정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메뉴를 주문했다.

 

처음 보는 서양 음식뿐이었지만 가을의 입맛에 꼭 맞았다.
이정은 술이 약한 가을을 위해 와인을 과감히 생략했다.
식사 시간은 정말 즐거웠다.
이정은 가을이 좋아할 만한 이야기만 했다. 도자기 이야기, 다른 나라에서 했던 전시회 뒷얘기 같은 것들을.
가을은 오랜만에 은재에 대한 생각을 떨쳐버릴 수 있었다.

 

후식으로 달달한 정통 유럽식 케이크와 홍차를 먹은 후, 이정은 그제서야 와인을 주문했다.
발렌타인 데이 때 함께 마신 아이스바인이었다.
가을은 자신이 몹시 좋아했던 와인이 나오자 은근히 기뻤다.
어쩌면 이정이 조금은 자신을 생각해주는 게 아닐까하는 기대도 살짝 들었다.

이정은 가을의 앞에 화이트 데이 선물을 놓았다.

 

이정: 그대 맘에 들었으면 좋겠는데.
가을: 이것도 선배가 직접 만든 건가요? (방긋 웃는다)
이정: 열어 봐.

 

가을은 포장을 풀기 시작했다.
상자안에서 화려한 문양을 새긴 청자 아로마 램프가 나왔다.
늘 아로마 램프를 사볼까 생각했던 가을은 예상했던 사탕바구니 대신 원하던 선물을 받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환해진 가을의 얼굴을 보니 이정은 흐뭇했다.
지난 번 만났을 때 약간은 지쳐보였던 가을의 얼굴이 자신의 선물을 받고 지난 겨울방학때처럼 밝아지자 왠지 모를 뿌듯함마저 들었다.

 

가을:(감격에 들뜬 목소리) 선배, 정말 고마워요.
이정: 좋아할 줄 알았어.
가을: 나 정말 이런 램프 사고 싶었거든요. 어떻게 알았어요?
      설마 잔디한테 물어보기라도 한 거에요? (기대감 가득한 표정)
이정: 그대 원래 아로마 테라피 좋아하잖아. 
가을: 예?
이정:(다정한 말투로) 오일도 부족해서 아예 화분을 키울 정도잖아.
      이왕이면 내가 만들어 준 램프로 아로마 테라피 하는 게 더 좋을 거 같아서.
 
가을의 귀에 어디선가 종소리가 울리는 것 같았다.
신데렐라가 요정 대모에게 선물받은 마법이 모두 풀리는 밤 12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가을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버렸다.

 

가을:(혼잣말로) 아니야...
이정:(다급히) 왜 그래? 그대 괜찮아?

 

조금 전의 행복해하던 표정 대신 충격으로 얼굴이 굳어버린 가을을 보고 이정은 자신이 무얼 잘못했는지 몰라 불안해졌다.
가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몸을 부들부들 떨더니 이정 대신 와인잔을 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가을: 은재씨가 그랬나요?
이정: 뭐?
가을: 은재씨가 아로마 테라피 좋아했어요?
이정: ! (표정이 굳는다)
가을: 난... 허브는 키워도... 오일은 한번도 산 적이 없어요...
이정: ...... (난감하다)
가을: 늘... 호기심은 있었어요... 정말 좋은 걸까하고...
     (이정을 보며) 나... 한 번도... 선배한테 아로마 테라피 하고 싶단 말... 한 적이 없어요...
이정: 그게...

 

상처받은 가을의 표정을 보며 이정은 마치 마법에 걸린 듯 평소처럼 매끄럽게 거짓말로 위기를 모면할 수 없었다.
이정이 아니라고 자신의 말을 부인해주길 간절히 바랬지만 결국 침묵을 지키자 가을은 절망감에 사로잡혔다.

 

가을:(난처해하는 이정을 보며) 날... 위한 게... 아니었네요...

 

가을은 눈물이 날 것 같아 얼른 외투와 가방을 집어들고 밖으로 나갔다.       
이정은 그런 가을을 바라보다 얼른 정신을 차려 따라 나갔다.

 

 


-카페 앞 도로-

 

이정은 휘청거리며 걷는 가을의 손목을 잡고 자신을 마주보도록 돌려세웠다.

 

이정: 가을양! 

 

가을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런 가을을 보면서 이정은 가슴이 아파왔다.

 

가을: 나... 알고 있었어요.
이정: 뭘?
가을: 선배가 내 안에 은재씨 심장있다고 믿는 거... 알고 있었어요.
이정: 뭐?! (말문이 막힌다)
가을: 나도 첨에는 내 심장이 날 이정 선배 좋아하게 만든게 아닐까 고민했어요.

 

이정은 스르르 가을의 손목을 잡은 손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가을: 그런데 아니었어요. 내 가슴이 이정 선배를 좋아하는 거였어요.
      하루 종일 선배 생각하고, 얼굴만 봐도 좋고, 웃는 모습 보면 더없이 기쁘고...
      설사 내 심장이 은재씨 거라 처음 이정 선배를 보고 마구 뛰었다 해도... 그랬다 해도...
      내 마음이, 내 영혼이 선배 진심으로 좋아한다고... 그렇게... (목이 메어온다)

 

이정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가을은 헛기침을 한 번 했다.

 

가을: 선배가 그 사람 잊지못해 슬퍼하는 모습 보는 거 정말 가슴아팠어요.
      그래서 도와주고 싶었어요. 내가 선배 웃게 할 수만 있다면 평생 날 그 사람 대신으로 봐도

좋다고 생각했어요.
      어차피 내 심장이 그 사람꺼라면 그 사람 대신 내가 이정 선배 위로해주겠다고.
      나도 그 사람만큼 선배 좋아하니까요. 
      그랬는데... 선배가 날 보고 웃어주니까 나도 모르게 욕심이 들더라구요.
이정: !
가을: 조금은... 아주 조금은 선배가 날 봐주길 바랬어요.
      그래서 나도 내 자신에게 많이 실망했어요. 내 사랑이 겨우 이것밖에 되지 않나 싶어서...
      대책없는 짝사랑인거 다 알고 시작했는데... 왜 욕심이 생긴 건지...
 
가을은 잠시 숨을 멈추고는 너무나도 슬프게 이정을 바라봤다.

 

가을: 하지만... 오늘만큼은... 적어도 오늘만큼은... 선배가 나만을 봐줬으면 했어요.
      첫사랑의 심장이 아닌 추가을을요.
      그랬는데... 선배는 그 사람 뿐이잖아요. 나를 봐도 그 사람만 생각하잖아요.
      그럼 내가 너무 불쌍하잖아요.

 

결국 가을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가을은 천천히 뒷걸음을 치더니 몸을 돌려 뛰어갔다.
 
이정은 멍하니 가을이 멀어지는 모습을 보고만 있었다.
가을이 자신의 마음을 정확하게 알고 있을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모든 것을 다 알면서도 자신을 위로해주겠다고 결심했다니.
지후의 차가운 말투가 떠올랐다.

 

지후: 전에 분명히 경고했지? 가을이는 너같은 이기주의자도 무조건 감싸줄 정도로 진심으로 널 생각하는

       애야.
      그런 가을이 은재 대용품으로 대하다 상처주면 난 절대 너 용서안할 거다.
이정: 가을양 맘까지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건 아냐.
지후: 준표가 예전에 잔디 맘 아프게 했지만 적어도 그 때 준표는 잔디를 지켜주려고 했었어.

근데 넌 뭐냐?
 
그렇게나 자신에게 헌신적이었던 가을이었는데 자신은 가을이를 상처주고 울려버렸다.
항상 반짝이던 가을의 눈이 슬픔에 뒤덮여 눈물을 흘릴 때 자신의 가슴에도 비수가 꽂히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자신은 가을에게 울지 말라고 다가갈 수도, 위로도 할 수 없었다.
거듭된 지후의 경고를 무시하고 착한 가을에게 상처를 줘버린 이기적인 자신이 지금처럼 혐오스러울 수가

없었다.

 

이정: 제기랄!


 

 

-가을의 방-

 

가을은 어떻게 집에 도착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그저 집에 들어오자마자 외투만 벗은 채 침대로 올라가 이불을 뒤집어 쓰고 펑펑 울었을 뿐이었다.
큰 소리로 마음껏 울고 싶었지만 차마 아버지가 들을까 싶어 손으로 입을 꼭 막았다.
그렇게 불편한 자세로 얼마나 울었는지 몰랐다.

 

어느 순간, 방바닥에 벗어놓은 외투에서 벨소리가 들렸다.
혹시 이정일까 싶어 재빨리 눈물을 닦으며 휴대 전화를 집어들었다.
하지만 발신인은 잔디였다.
순간, 잔디에게 모든 걸 털어놓고 싶었다.
그렇지만 지금 준표와 즐거운 화이트 데이를 보내고 있을텐데 그런 잔디의 행복을 망치고 싶지도 않았다.

 

또 다시 전화가 올세라 배터리를 분리해버린 후 다시 침대로 돌아가 이불을 뒤집어 썼다.
이미 베갯보가 다 젖을 정도로 울었지만 눈물은 샘물처럼 다시 흘러나왔다.

 

'누구든... 누구든 나 좀 구해줘, 제발...'

 

 

-신화 호텔 라운지-

 

잔디와 준표가 칵테일을 마시러 들어왔다.
준표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가을이 어떻게 지내나 궁금해서 잔디는 재빨리 전화를 했다.
하지만 가을의 컬러링인 바흐의 CELLO SOLO SUITE NO.1이 흐르다 전원이 꺼졌다는 안내소리만 들렸다.

 

잔디:(고개 갸우뚱) 얘가 배터리가 다 떨어졌나?

 

준표가 자리에 돌아오자 잔디는 얼른 휴대 전화를 가방에 집어넣었다.
하지만 준표는 그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준표:(짜증내며) 잔디밭, 꼭 오늘 이 시간까지 니 친구랑 전화해야 속이 후련하냐!

 

잔디는 준표에게 미안했지만 그래도 순순히 잘못했단 말을 하기 싫었다.

 

잔디:(버럭) 아 뭐 그럴 수도 있지. 이정 선배랑 가을이가 오늘 화이트 데이 어떻게 보내는지 넌 궁금하지도

       않냐?
준표:(움찔하다) 당연히 잘 지내고 있겠지. 그 자식만큼 여자한테 이벤트 잘 해주는 남자가 또 어딨냐?
잔디: 그럼 다행이지만... 그래도 걱정된다고!
준표: 제발 지금은 나한테만 좀 집중해주면 안 돼? 오늘은 화이트 데이잖아!
잔디:(툴툴) 알았다. 알았어.

 

잔디는 이정에게 전화를 해볼까 했지만 준표의 얼굴을 보고 관두기로 했다.
어차피 가을의 시간표를 다 알고 있으니 공강시간에 사회대로 찾아가면 얘기를 나눌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준표도 잔디의 말을 들으니 내심 이정과 가을이 걱정됐지만 설마하는 마음에 넘어가기로 했다.

 

준표:(혼잣말로) 소이정 너땜에 무드 다 깨졌어. 내일 각오해라.
잔디:(못 알아들었다) 뭐?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준표:(버럭) 뭐,뭐라고 하긴. 여기 음악 맘에 안든다고 했다!
잔디: 아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그리고 음악이 어때서. 난 맘에 드는구만.
준표: 뭐, 네가 맘에 든다면 됐고.

 

화이트 데이지만 또 다시 티격태격하는 잔디와 준표 앞에 웨이트레스는 주문한 칵테일을 올려놓고 재빨리

사라졌다.
올 때마다 싸우면서도 헤어지지 않는게 용한 커플이라고 속으로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