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기억의 주인

[소을 중편] 기억의 주인 9

지혜의 여신 2009. 6. 28. 22:21

 

 

 

-신화대병원-

 

가을은 침울한 표정으로 로비에 앉아있었다.
짐작했던 대로 의사는 심장을 제공해 준 사람이 누군지 알려줄 수 없다고 완강하게 말했다.
애꿎은 의료법을 원망했지만 그렇다고 답을 얻을 수 없다는 것 또한 알고 있는 가을이었다.
계속 한숨만 내쉬다 겨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때,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수녀: 스텔라? 너 또 아픈 거니?

 

가을은 뒤를 돌아본 순간 자신을 염려스러운 얼굴로 보는 안나 수녀와 마주쳤다.

 

가을:(놀라움과 반가움이 섞여) 안나 수녀님!

 

가을은 안나 수녀에게 즉시 달려갔다.
자신이 오랫동안 병원에 입원해있는 동안 항상 자신을 위해 기도를 해주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슬픔을 극복하도록 도와주신 분이었다.
긴 투병생활 중 스텔라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데에는 안나 수녀의 충고가 절대적이었다.

 

 


원목실로 올라온 가을과 안나 수녀는 차를 앞에 놓고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안나 수녀는 건강해진 가을이 대견했고, 가을은 오랜만에 만난 안나 수녀가 더없이 반가웠다.

 

수녀: 스텔라, 이젠 어엿한 숙녀가 됐구나.
가을:(부끄러워하며) 뭘요.
수녀: 학교 생활은 잘 하고 있고?
가을: 예. 저 문헌정보학과로 전공 정했어요.
수녀: 잘됐구나. 넌 원래 책을 참 좋아했지.
가을: 네. 저 지금도 도서관에서 근로장학생으로 일하고 있어요.
수녀:(만족스럽게 웃으며) 그렇구나. 그럼 우리 스텔라 이제 남자친구는 생겼니?
가을: 남자... 친구요?... (표정이 바로 굳어버린다)
수녀: ? 무슨 일 있는 거니? (걱정스런 표정)

 

가을은 망설이다 결국 모든 사실을 다 안나 수녀에게 털어놓았다.
처음 이정을 만나 반해버렸다는 것과, 그가 잔디의 남자친구의 절친한 친구인 탓에 자꾸 부딪히면서

본의아니게 그의 신경을 건드린 사연, 자신의 심장이식 사실을 알고 난 후 갑자기 친절해진 그의 태도,

그 후 데이트, 첫사랑을 잃은 슬픔을 위로하겠다던 자신의 결심, 그리고 그의 친구를 통해서 자신의

수술일과 첫사랑이 죽은 날이 같아 불안해졌다는 것까지 쉬지 않고 한번에 다 토해냈다.

 

수녀: 그럼 넌 그 첫사랑의 심장이 너한테 있다고 생각하는 거니?
가을:(고개 끄덕) 예. 그 사람 교통사고 당한 후에 깨어나지 못했다고 했어요. 그럼 뇌사상태란 소리잖아요.
수녀: 꼭 그런다고 네가 이식받았다고 할 수는 없잖니.
가을: 이정 선배가 제 수술 날짜를 확인했을 때 그 표정이 정말... 꼭 숨은 진실을 확인한 사람같았어요.
      그 전에는 제 행동 하나, 말 하나에도 굉장히 상처받은 듯한 표정을 지었는데 그 날 이후론 아무렇지도 않아했어요.

      그리고... (차마 말잇지 못하고)
수녀: 그리고?
가을: 수술 1주년이 되던 날, 저한테 새생명 얻은 걸 축하한다고 말해줬어요. 근데 그 표정은 절대로

축하하는 사람 표정이 아니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자기 첫사랑의 희생으로 내가 살아나서 씁쓸해했던 거 같아요. 
수녀:(한숨을 내쉬고) 그럼 확인은 해 본 거니?
가을:(고개 저으며) 지금 막 의사선생님 찾아뵈었는데 절대로 알려줄 수 없다고 하셨어요.
수녀: 하긴.. 그럴 거다..
가을: 수녀님 만약 제 안에 그 첫사랑의 심장이 있는 거라면 전 어떻게 해야할까요?
수녀: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구나.
가을: 저 그 사람 첫눈에 반했어요. 근데 만약 그게 그 첫사랑의 심장때문이라면 어떻게 하죠?
      내 심장이 그 사람 알아보고 반응하고, 그 사람 좋아하게 만들었다면 전 어디 있는 거죠?
      그러고보면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상하게 낯설지가 않았어요.
수녀:(가을의 손을 잡으며) 확실하지 않은 걸 너무 걱정하진 말아라 스텔라.
가을: 저 무서워요 수녀님. 너무 무서워요. (안나 수녀의 손을 꼭 잡는다)
수녀: 스텔라, 심장을 이식받았다고 해도 너는 그대로 너란다.
가을: 하지만......
수녀: 흔히들 사랑을 가슴으로 한다고들 하지, 영혼은 심장에 있다고도 말하고 말이지.
      그래, 장기이식을 받은 사람이 성격이 변하는 경우도 많이 있는 것도 사실이고.
      하지만 심장이식수술을 받아도 네 영혼이 다른 사람의 영혼으로 바뀐 건 아니잖니.
      스텔라 넌 스스로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니?
가을:(침울하게) 물론 그런 건 아니죠.
     (생각난 듯) 그런데 제가 좋아하는 게 좀 달라졌어요.
수녀: 그렇게 큰 일을 겪고 나면 취향이 바뀌는 건 당연한 거야.
      하지만 사랑이란 말이다.. 네 심장이 아니라 네 마음이 하는 거라고 생각해.
가을: 정말... 그럴까요?
수녀: 네가 그토록 좋아하는 해리 포터를 봐. 그 애는 몸에 볼드모트의 사악한 영혼 한조각이 있어도

제대로 사랑을 하고 올바른 결정을 내리잖니.      
      설령 네가 받은 새심장이 그 첫사랑이라는 사람 거라고 해도 그게 널 좌지우지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
가을:(반신반의하는 눈빛) 수녀님...
수녀: 난 네 영혼이 그 사람을 사랑한다고 믿는단다.
가을: 저도 정말 그랬으면 좋겠어요.
수녀: 스텔라 그 사람 생각 많이 하니? 그 사람 얼굴 보면 행복해?

 

가을은 가만히 이정과의 추억을 떠올렸다.
귀천을 읽던 아름답고 슬픈 모습을 넋놓고 바라보던 순간부터 자신과 만날 때마다 때로는 슬프고

상처받은 모습을 보여주던, 때로는 원망하는 듯한 표정을 짓던, 때로는 충격을 받고 딱딱하게 굳었던 이정이 떠올랐다.
그리고 음악회 이후 자신에게 너무나도 친절하고 상냥했던 그의 말과 행동이 하나 하나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가을:(아련한 표정) 언제부턴가 한순간도 그 사람 생각하지 않는 순간이 없어요.. 멀리서 보기만 해도,

목소리만 들어도 정말 기쁘고 행복해요.
     (자신도 모르게 웃으며) 그 때만큼은 내가 살아난 게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이 사람을 위로해주기 위해, 슬픔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기 위해 내가 살았다고까지 생각해요.
수녀:(자상하게 웃으며) 그 마음이 중요한 거란다 스텔라. 다른 것에 마음쓰지 말고 그 사람에게만 집중하도록 하렴.
가을:(수녀를 보며) 그 사람에게만 집중하라고요..

 

안나 수녀와 가을은 한동안 말없이 차만 마셨다.
가을에게는 이 정적이 찰나인 것 같기도 하고 한없이 긴 것 같기도 했다.

 

수녀:(대견하다는 표정으로) 정말 어른이 됐구나 스텔라. 이렇게 사랑고민도 다 하고 말이야.
가을:(힘없이 웃으며) 수녀님도 참...
수녀:(가을 어깨를 두드려주며) 네가 사랑을 시작해서 난 정말 기쁘단다.
가을: 예... 정말 고마워요 수녀님. 

 

가을은 안나 수녀와 포옹을 하고 난 후 원목실을 나왔다.
심호흡을 한번 한 후 다시 걷는 가을의 표정은 후련해보였다.

 

 

 

-F4 라운지-

 

창 밖에 눈이 펄펄 내리는 것을 보고 준표는 좋은 생각이 난 듯 라운지에 있는 일행에게 갑자기 일방적인 발표를 했다

.

준표: 내일 아침에 우리 리조트로 출발하자.
      보드타기 딱이겠는데. 

 

카드 게임을 하던 우빈과 지후는 기막히다는 표정으로 준표를 봤다.
이정도 읽고 있던 책을 내려놓고 준표를 봤다.

 

우빈: 뭐냐 구준표.
이정: 너 금잔디 허락은 받은 거냐?
준표: 허락은 무슨~ 이 구준표님이 보드 타러 가자고 하면 가는 거지.
지후: 그래도 너무 뜬금없는데.
우빈: 동감이다.
준표: 왜 이래, 우리 올 겨울에 제대로 보드도 못탔잖아.
      이렇게 함박눈 내리는데 이 기회 놓칠 수 있냐.
      마침 내일은 토요일이니까 근로도 안한다고.

 

싱글벙글한 준표와는 달리, 잔디의 반응이 걱정되는 지후와 이정, 우빈이었다.

 

우빈: 금잔디가 만약 안가겠다고 하면?
준표: 괜찮아. 걔네 부모님 허락받고 끌고오면 돼~
이정: 그럼 가을이도 데려와야겠네.
우빈: wow, good idea네. 금잔디 구준표라면 몰라도 추가을이 가자고 하면 갈 거니까.
지후: 근데 가을이가 가려고 할까?
이정:(씩 웃으며) 그건 나한테 맡겨.
준표:(떨떠름한 표정) 뭐라고 설득하려고?
이정: 다 방법이 있지.
우빈: my bro. 가을과 잘 되어가는 거냐?

 

우빈은 며칠 전 하얗게 질린 가을의 얼굴이 떠올라 어딘지 불편해졌다.
그 일에 대해 이정에게 말을 할까 고민도 했지만 지후의 반대로 함구한 상태로 지내자니 좀 답답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우빈은 F4 친구들에게 비밀을 만들지 않았지만 준표와 지후 역시 자신에게 말하지 않는 것이 있어 여러 모로 신경이 쓰이는 게 많은 요즘이었다.

 

하지만 이정은 한달 전 귀국했을 때보다 한결 여유로워보였다.
우빈의 질문에도 그저 어깨만 한번 으쓱했을 뿐이었다.

 

지후: 확실히 예전보단 훨씬 보기 좋아졌다, 소이정.
이정: 그래?
준표: 나도 그건 인정해.
우빈: 역시 새로 시작하려는 거야?

 

이정을 보는 세 사람의 눈빛은 우려와 기대가 섞여있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준표와 지후는 걱정이, 우빈은 희망이 더 많았다.
그런 친구들을 보면서 이정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정: 아직 완전히 잊은 건 아니야.

 

준표와 지후, 우빈은 서로 얼굴을 보며 빠르게 시선을 교환했다.
그들의 표정은 '역시'라는 아쉬움이 묻어났다.
하지만 이정은 그들의 표정을 못본 체하며 자리에 일어섰다.

 

우빈: 어디 가냐?
이정: 피식, 가을양 설득하러. 이제 도서관 근로 끝날 때 됐거든.

 

이정은 외투를 집어들고 성큼성큼 나갔다.
이정이 나가자마자 준표와 지후, 우빈은 답답함을 토로했다.

 

준표:(툴툴) 저 녀석 정말 어떻게 해야 하냐?
우빈: 그냥 말로만 저러는 거 아냐?
지후: 난 가을이가 더 걱정되는데.
준표: 그만 만나라고 할 수도 없고 에휴~ (한숨)
우빈: 애매하네... 분명히 가을 대하는 태도는 그냥 즐기는 게 아닌데 아직 은재를 잊지 않았다고

말하니 참.. (머리를 긁적인다)

 

 

 

-도서관 앞-

 

가을은 도서관 밖으로 나오자마자 함박눈이 내리는 풍경을 보며 행복하게 웃었다.
즉시 휴대전화기를 꺼냈지만 누구에게 먼저 전화를 해야 할지 잠시 망설였다.
보통때라면 잔디에게 제일 먼저 전화를 했겠지만 곧바로 이정이 떠올라 난감했다.
조금 고민을 하더니 결국 번호를 눌렀다.
색스폰 연주가 잠시 흐르나 했지만 곧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이정: 그대 도서관 근로 끝났어?
가을: 예... 이제 도서관 밖으로 나왔어요. (웃으면서) 선배, 지금 함박눈 오는 거 알아요?
이정: 물론이지. 눈강아지처럼 좋아하는 그대 표정도 보이고 말야.
가을: 예?

 

깜짝 놀라 주변을 둘러보던 가을은 몇 걸음 옆에서 여유롭게 웃으며 우산을 쓰고 자신을 보는 이정을 발견했다.
함박눈과 이정이 참 잘어울린다고 생각하며 가을도 미소를 지었다.
이정은 가을에게 다가와 우산을 씌워주었다.

 

이정: 그대 눈 좋아하나봐?
가을: 무지무지 좋아해요. 그리고... (이정을 보며 미소짓는다)
이정: 그리고?
가을: 선배랑 눈이랑 인연이 있는 거 같아요.
이정: 왜 그런 생각을 하지?
가을: 처음 선배 귀국했다고 잔디한테 들었던 날 첫눈이 내렸거든요.
      나 그 때 선배가 첫눈 오는 날 귀국해서 참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이정: 피식, 그런 생각을 다 했구나.
가을: 선배는 눈 좋아해요?
이정: 글쎄... 적어도 운전할 때만큼은 싫어.
가을: 큭큭 선배 그렇게 말하니깐 아저씨같아요.
이정: 그래? 그건 그렇고 계속 이렇게 서있으면 그대 감기 걸리겠다.
      얼른 이동하자고.
가을: 네.

 

 

 

-카페-
 
그다지 크지 않지만 아늑한 느낌이 드는 카페에 들어온 가을과 이정은 창가 자리에 앉았다.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기보다는 바깥 경치를 즐기고 있었다.
계속 펑펑 내리는 눈을 보면서 가을은 저도 모르게 콧노래를 불렀다.

 

이정: 정말 눈 좋아하는 그대, 내일 같이 스키장 가는 거 어때?
가을:(두 눈 동그래져) 스키장이오?
이정: 구준표가 다같이 가자고 하는데.
가을: 잔디도 보드 타는 거 좋아하니깐 잘 됐네요.
이정: 그대는 어때?
가을:(고개 저으며) 한번도 안가봤어요.
이정: 그럼 이번에 보드 배워보는게 어때?
가을:(난감한 표정) 저 잔디랑 다르게 몸치인데요.
이정:(달콤하게 웃으며) 내가 잘 가르쳐줄게.
가을: 근데 저 옷도 없고 장비도 없는데...
이정: 빌리면 되니까 그건 염려 마.
가을:(한숨쉬며) 근데 걱정이 앞서네요. 스케이트는 자신있는데 보드는 영...
이정: 정 안되면 설경이라도 찍으라고. 그 리조트 근처가 정말 경치 멋있거든.
가을:(눈 반짝이며) 정말요?

 

금새 표정이 바뀌는 가을이 귀여워서 이정은 미소지었다.
확실히 요새는 웃을 일이 많아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정: 내일 사람이 많이 갈거니까 일찍 출발해야 할 거야.
가을: 그렇겠네요. 그럼 6시쯤 출발하면 될까요?
이정: 정말 가능하겠어? 
가을: 그럼요.   
 

 


-스키장-

 

가을: 꺄아아아아아악~

 

새하얀 눈밭위에 가을의 비명 소리가 울려퍼졌다.
초보자 코스에서 몇 시간째 넘어지기를 반복하는 가을을 보며 이정은 한숨을 내쉬었다.
예상보다 가을의 운동신경은 훨씬 나빴다.
몇 번이나 반복해서 원리도 설명하고 시범도 보여줬지만 가을은 자꾸 다른 사람들과 부딪치기만 했다.
아무래도 저러다 크게 다치겠다 싶어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하는 이정이었다.

 

이정: 그대 괜찮아?
가을:(얼굴 찡그리며) 예... 이게 참 어렵네요 에구구..
이정: 아무래도 좀 쉬어야겠다. 그대 완전히 지친 표정이네.
가을:(반색하며) 예, 그래요.

 

가을은 재빨리 보드에서 발을 빼냈다.
카페로 들어가서 자리에 앉자마자 가을은 축 늘어졌고 이정은 그런 가을을 위해 따듯한 라떼를 가져왔다.

 

이정: 자 이거 좀 마셔봐. 몸이 녹을 거야.
가을: 고마워요. (라떼를 마신다)
이정: 역시 오늘 새벽에 일어나서 여기까지 오느라 피곤했던 모양이지?
가을: 그렇게 변명이라도 하고 싶지만... (한숨쉬며) 역시 전 몸치인가봐요...
이정: 괜히 여기 오자고 했네. 미안 가을양.
가을:(고개 저으며) 아니에요. 제가 오히려 더 미안하죠.
이정: 왜?
가을: 선배 저땜에 제대로 보드도 못타고 있잖아요. 
이정: 피식, 그런 생각 하지마. 보드야 얼마든지 탈 수 있으니깐.

 

가을은 이정에게 너무 미안해 뭔가 다른 말을 하고 싶었다.
그 순간 카페테리아로 나머지 일행이 들어와 의자를 가을과 이정 곁으로 끌고오더니 함께 앉았다.

 

잔디: 가을아 어때? 배울만 해?
준표:(한심하단 얼굴로) 잔디밭, 아까 쟤 비명소리 듣고도 그 말이 나오냐?
우빈: 큭큭 진짜 가을 비명 수십번은 들은 거 같더라.
가을:(당황) 소리가 다 들렸어요?
지후: 아주 메아리까지 울리던데.
이정: 처음엔 다 그렇지 뭐.

 

가을은 창피한 나머지 두 손으로 얼굴 감싸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가을의 등을 잔디는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었다.
준표는 그 모습이 다시 심통이 났고 지후는 우려섞인 표정으로 가을을 봤다.

 

지후: 어디 다친 데는 없어?
가을:(얼굴에서 손 내리며) 예? 아니에요 괜찮아요.
잔디:(걱정 어린 표정) 너 정말 괜찮은 거야?
가을: 괜찮다니깐.
준표: 그냥 지금 들어가는 게 좋을 거 같은데.
이정: 나도 그게 좋겠다 싶어.
우빈: 그래. 완전히 탈진했다고 얼굴에 씌여있네.
가을: 아니에요. 한번만 더 타고 들어갈게요.
잔디: 그럼 중급자 코스에서 타볼래?
준표: 너 애 잡을 일 있냐?
잔디: 차라리 거기가 나을 걸. 초급자보단 사람도 적고 경사도 어느 정도 있으니 좀 더 타기 쉬울 거야.

 

잔디의 제안에 따라 가을은 다른 일행과 함께 중급자 코스로 올라갔다.
일단 사람수가 훨씬 적으니 마음이 편했다.
이정과 잔디의 조언을 명심하며 보드를 타니 초급자 코스보다 훨씬 잘 내려갔다.
즐거움도 잠시, 가속도가 붙자 가을은 방향을 제대로 바꾸지 못했다.
입에서는 저절로 비명이 터져나왔다.
이러다 저 앞에 있는 경계펜스와 충돌하겠다 싶어 가을은 눈을 꼭 감았다.

 

잔디:(다급하게) 가을아! 빨리 몸을 틀어!

 

전속력으로 펜스로 내려가는 가을을 본 이정은 재빨리 가을을 향해 보드를 타고 내려갔다.
잔디와 준표, 지후, 우빈은 이정과 가을을 걱정스럽게 봤다.
가을이 펜스와 부딪히기 직전에 이정은 가을의 허리를 잡아 함께 넘어졌다.
가을은 눈을 뜨자 이정이 자신과 펜스 사이에서 완충지대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을:(사색이 되어) 이정 선배!
이정:(몸 일으키며) 그대 괜찮아?
가을: 선배 괜찮은 거에요?

 

두 사람 곁으로 다른 일행들이 도착했다.
일단은 가을이 다친 곳이 없어 보여 안도했지만 그래도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다.

 

잔디: 가을아 괜찮아?
우빈: 이정, 괜찮아? (이정을 일으켜준다)
가을: 난 괜찮은데 선배가.. (눈에 눈물이 맺혔다)
준표: 둘 다 무사한 거냐? (가을과 이정을 번갈아본다)
이정: 당연히 무사하지. (가을 보며) 그대 정말 괜찮은 거야?
가을: 네... (이정에게서 시선을 못뗀다)
이정: 다행이다.
지후: 역시 중급자 코스는 무리였던 거야.
잔디: 미안해 가을, 내가 괜히 중급자 코스 가자고 해서...
준표: 이봐 가을, 넌 아무래도 이만 방으로 들어가는 게 좋겠다.
가을:(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네....

 

 

 

-리조트 스위트룸-

 

함께 들어오겠다는 이정을 겨우 설득해 다시 스키장으로 돌려보낸 후, 가을은 보드와 옷을 반납하고 방으로 들어왔다.
소파에 몸을 눕히니 온 몸에서 아우성치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가을: 에구구.. 역시 난 보드랑 안맞는게 분명해...

 

가만히 누워있자니 조금 전 이정이 자신을 구해준 게 생각나 얼굴이 화끈거렸다.
마음의 상처를 달래주기는 커녕 오히려 자신이 이정을 위험한 상황으로 몰아넣어 미안하기 그지 없었다.
하지만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하는 이정의 얼굴을 보니 살짝 기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추운 스키장에 있다 따듯한 실내로 들어오니 잠이 조금씩 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초인종 소리가 들리자 튕기듯 소파에서 일어나 즉시 문을 열어줬다.
문 밖에는 이정대신 지후가 걱정스럽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을: 지후 선배... 보드 더 안타요?
지후: 실컷 타기도 했고 너도 걱정 되어서...
가을: 난 괜찮은데...

 

실망감을 숨기기 위해 가을은 부엌으로 가서 차를 내왔다.
지후는 조금 전 가을이 누웠던 소파에 앉았다.
가을은 지후에게 머그컵을 건네줬다.

 

지후:(머그컵 받으며) 정말 괜찮은 거야?
가을:(방긋 웃으며) 괜찮다니까요.. 뭐 물론 내일 아침쯤 되면 온 몸이 근육통으로 고생할 거 같긴 하지만요. 큭
지후: 다행이네.

 

가을과 지후는 말없이 차를 마셨다.
가을은 창가에 서서 혹시나 이정이 보이지 않을까 스키장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지후: 이정이랑 잘 되어 가는 거니?
가을:(지후보며) 선배!
지후: 요새 두 사람 함께 하는 시간 많은 거 같은데.
가을: 그게... 참, 뭐라고 말하기 힘드네요.
지후: 이정이 좋아해?

 

가을을 바라보는 지후의 눈빛은 어딘지 모르게 날카로왔다.
그 눈빛이 자신의 몸상태를 확인하던 의사와 비슷하다고 가을은 생각했다.
지후라면 사실을 말해도 괜찮을 거 같았다.

 

가을: 아주 많이... 좋아해요.

 

지후는 맑은 눈으로 자신을 보며 이정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가을을 봤다.
생각했던 것보다 상황이 훨씬 더 심각하다 싶었다.

 

지후: 이정이 첫사랑이 죽었단 얘기는 들었지?
가을:(고개 끄덕) 예... 그래서 이정 선배 많이 힘들어했다는 말도 들었어요.
지후: 요새 이정이가 너 만나면서 많이 밝아졌어.
가을:(희미하게 웃는다) 그럼 다행이구요.
지후: 넌 어떠니?
가을: 저도 행복해요... 사실, 수술받고 난 후 지금처럼 행복한 시간은 처음이에요.
지후: 진심이구나. 그런데 소이정 그 녀석이 너에게 진심이 아니면 어떻게 할 거니?
가을: 상관없어요. 전 그냥 이정 선배 웃는 모습만 보고 싶을 뿐이에요.
지후: 하지만...
가을: 그 첫사랑분.. 아주 어릴때부터 사랑했다고 들었어요...
      만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제가 그 사람을 대신할 수는 없잖아요.
     (환하게 웃으며) 난 말이에요... 이정 선배에게 도움이 된다면 그걸로 충분해요.
지후: 정말 그걸로 괜찮겠어?
가을:(고개 끄덕) 지금은 그래요.

 

지후는 한참동안 가을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리고 가을도 지후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은 어차피 한번은 거쳐야만 한다는 것을 둘 다 알았다.

 

지후: 이정이도 나한텐 친형제나 다름없지만... 난 너도 친동생처럼 생각해.
가을:(뜻밖의 말에 놀라서) 예?
지후: 이정이도, 너도, 두 사람 모두 다 정말 잘 되길 바라고 있어.
가을: 선배.....
지후: 사랑은 한쪽의 일방적인 희생으로 되는 게 아냐. 양쪽이 동등해야 해.
가을: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잖아요.
지후: 힘들면 언제라도 얘기해. 이정이가 잘못한 거 있음 내가 대신 혼내줄게.

 

지후는 따듯하게 웃어주었다.
그런 지후의 마음씀씀이에 가을은 한없는 고마움을 느꼈다.

 

가을: 나 참 복이 많은가봐요.
지후: 왜?
가을: 잔디같은 든든한 친구에, 이젠 멋진 오빠까지 생겼잖아요.
지후: 그걸 이제 알았어?
가을: 네... 제가 좀 둔해서 말이에요.

 

가을과 지후는 서로 바라보며 웃음을 지었다.

 

 


시간이 흘러 저녁을 먹고 난 후 가을은 베란다로 나가 밤하늘을 바라봤다.
아침에만 해도 구름이 잔뜩 꼈지만 지금은 하늘에 별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별자리를 찾느라 정신없이 밤하늘을 보던 가을은 어깨에 무언가가 올라왔음을 깨달았다.
고개를 돌려보니 이정이 자신에게 담요를 둘러주는 모습이 보였다.

 

이정: 그대 그러고 있으면 감기 걸려.
가을: 괜찮은데...
이정: 뭘 그렇게 열심히 보는 거야?
가을: 별자리요. 다행히도 지금은 하늘이 맑아서 잘 보이네요.
이정:(하늘을 보며) 그러네.. 저 스키장 조명이 없으면 더 잘 보일텐데...
가을:(함께 하늘을 보며) 그래도 엄청 별이 많은 걸요...
     (팔을 뻗으며) 저기 오리온 자리도 보이고, 시리우스랑 황소자리도 보이고..
     (들뜬 목소리로) 플레이아데스 성단까지 보여요.
이정: 그대는 별자리 좋아하는 모양이네.
가을: 병원에 있을 때 별자리 책도 많이 읽었어요...
      역시 겨울엔 별자리가 잘 보여서 좋아요.
이정: 겨울이 좋다고?
가을:(고개 끄덕) 솔직히 동장군은 하나도 안반갑지만, 눈도 오고 별자리 잘 보일 땐 겨울이라 참 좋다 싶어요.
이정: 그래?
  
이정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기억속의 은재는 별이 많은 밤하늘을 좋아하긴 했어도 별자리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별자리가 잘 보여서 겨울이 좋다는 가을의 말이 낯설게 들렸다.
하지만 이정은 가을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곧 표정을 바꿨다.

 

가을은 별자리를 다시 한참 바라보다 생각에 잠긴 이정의 얼굴을 보며 속으로 말했다.
'선배를 만난 계절도 겨울이니까, 나 앞으로 겨울을 더 사랑하게 될 거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