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을 중편] 기억의 주인 8
-신화 호텔 라운지-
오랜만에 분위기를 잡기 위해 잔디와 준표는 칵테일을 마시러 이 곳에 들어왔다.
그렇지만 주문한 칵테일이 나오기 전에 가을에게 온 전화를 받기 시작한 잔디는 통화에 열중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준표는 그런 잔디에게 삐져버렸다.
하지만 잔디는 그런 준표의 상태엔 아랑곳하지 않고 신난 표정으로 계속 통화를 하다 한참 후에야 끝을 냈다.
준표:(툴툴거리며) 넌 그렇게 니 친구가 좋냐? 이젠 나랑 둘이 있어도 전화질이나 하고.
잔디:(흥분 상태) 지금 상황이 아주 장난아니거든.
준표:(의심쩍은 표정) ? 또 뭔 일 벌이는 거냐?
잔디: 잘하면 가을이랑 이정 선배가 커플이 될 지도 모른다고.
준표:(경악) 뭐?!
잔디: 두 사람 저번 음악회때 진짜 잘 어울렸잖아. 그래서 내가 밀어주려고.
준표:(난감하다) 어떻게 밀어주는건데?
잔디:(신나서) 가을이가 음악회때 고마웠다면서 이정 선배한테 감사 인사를 하겠다고 했거든.
준표: 근데?
잔디: 얘가 그냥 도예실에 선물만 놓고 오겠다는 거야.
그래서 내가 걔 전화기 뺏어서 이정 선배랑 통화하게 만들었지.
그랬더니 바로 도예실로 초대받아 갔지 뭐야.
준표:(얼굴 찡그리며) 왜 넌 또 쓸데없는 짓을 한 거야?
잔디: 뭐가~ 덕분에 두 사람 좋은 시간 보냈다는데. 가을이가 지금 고맙다고 전화했거든.
준표: 혹시 니 친구 이정이 좋아하냐?
잔디: 오~ 구준표 네가 웬일로 눈치가 잘 돌아가냐. 사실 말야 가을이가 이정 선배한테 첫눈에 반했대.
준표:(완전 당황) 뭐? 큰일났네.
잔디: 큰 일은 뭐가~ 우리 가을이가 이정 선배한테 안어울린다 이거야?
준표:(버럭) 그런게 아니라고. 아으~ 답답하다 정말. (술잔을 한번에 비워버린다)
잔디는 준표의 반응에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정의 마음을 아는 준표로서는 진실을 말할 수 없어 그저 답답해할 뿐이었다.
심각해진 준표의 얼굴을 보고 잔디는 이유를 물었지만 준표는 끝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인사동-
가을은 이정과 함께 여러 화랑을 다니며 미술 작품을 보고 있었다.
이정도 도자기가 아닌 다양한 미술 작품을 접하는 게 매우 색다르게 느껴졌다.
플레이보이 시절에도, 은재와 사귈때에도 도예전이 아닌 일반 미술 전시회에는 거의 가지 않았었다.
무명 화가의 실험적인 작품부터 제법 이름이 알려진 화가의 유명한 작품까지 가을의 취향은 폭넓었다.
수시로 자신이 지루해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표정으로 보는 가을에게 이정은 안심하라는 미소를 지어줬다.
모든 화랑의 문이 다 닫는 시간이 되어서야 가을은 저녁을 먹으러 가자고 제안했다.
그러면서 가을이 앞장서 들어간 식당은 전통 한정식이 나오는 한옥이었다.
두 사람은 식사를 하면서 오늘 봤던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이정: 그대가 그렇게나 그림을 좋아하는 줄 몰랐어.
가을: 그냥 보는 것만 좋아해요. 나도 그림 솜씨가 있음 좋은데.
이정: 그대 십자수와 뜨개질 솜씨도 아주 좋던걸.
가을:(당황) 그건... 이정 선배야말로 예술가잖아요. 재능이 있어서 좋겠어요.
이정: 피식, 정말 그렇게 생각해?
가을: 그럼요. 가끔 예술작품 보면 참 예술이란 위대하다고 생각해요.
이정: 어째서지?
가을: 뭐랄까.. 내가 느끼고 생각하는 것, 말하고 싶은 걸 정확하게 표현하고...
그런 거 있잖아요.. 슬픈 음악 들으면 나도 슬퍼지고, 고흐의 색을 보면서 강렬한 힘을 느끼고..
말로 설명하려니 좀 어렵네요 아하하(어색한 웃음)
이정: 피식, 그대는 창작의 고통을 전혀 모르는군.
가을: 예? 아.. 그건 그렇겠죠... 그러니까 위대한 예술작품이 더 기억에 남는거 아닐까요?
극한의 고통을 이겨내고 만든 거잖아요.
이정: 그런가? 암튼 그대가 좋은 쪽으로만 말하니 좀 긍정적인 거 같기도 하네.
가을: 하하하 그래요?
이정:(가을의 빈 밥그릇 확인하고) 이제 그만 일어날까?
가을: 네
가을은 말을 끝내기 무섭게 재빨리 계산서를 낚아챘다.
그런 가을을 보고 이정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이정: 이런 건 남자몫이라고 생각하는데?
가을:(단호하게) 오늘은 꼭 제가 내야해요.
재빨리 신발을 신는 가을을 보며 이정은 가을이 또 미안해서 그런가보다 생각했다.
이정: 늘 그렇게 미안해하면 매력없어 가을양.
가을:(생긋 웃으며) 오늘은 아주 특별한 날이거든요.
이정:(의아해서) 무슨 날인데?
가을: 비밀이에요. (재빨리 계산대로 간다)
이정:(따라가며) 말해줄 수 없는 거야?
가을: 술사주면 말씀드릴게요. 어디 좋은데 알아요?
이정:(자신있게) 기꺼이 안내하지.
-와인바-
가을은 처음 와보는 듯 들어온 후부터 계속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런 가을에게 이제는 익숙한 듯 이정은 창가자리로 가을을 안내했다.
웨이터가 주문을 받으러 오자 가을은 메뉴판을 보고 난감하단 표정을 지었다.
이정: 그대 뭐 마시고 싶은 거 있어?
가을: 그냥 달달한 거 마시고 싶은데 역시 와인은 어렵네요...
어젯밤에 와인에 대한 책 한 권을 다 읽었는데 생각나는 게 하나도 없어요(한숨내쉰다)
이정: 내가 골라줄까?
가을:(반색하며) 그럼 고맙죠.
이정은 웃으며 가을의 몫까지 주문을 했다.
가을은 잠시 망설이다 웨이터를 다시 불렀다.
웨이터: 더 필요하신 게 있으신가요?
가을: 제가 주문한 와인 한 잔만 더 주세요.
이정:(어리둥절) 한 번에 두 잔을 마시려고?
가을:(의미심장한 표정) 비밀이에요.
웨이터가 주문을 받아 가버리자 이정은 의아하단 표정으로 가을을 봤다.
오늘 가을은 평소와 달리 매우 들뜬 것 같기도 하고, 엉뚱한 말도 많이 했다.
이정: 도대체 오늘이 무슨 날인데 그래? 평소의 그대완 많이 다른데.
가을: 이제 곧 알게 돼요.
이정: 지금 말할 수 없는 거야?
가을: 네.
잠시 후 웨이터가 주문한 와인 세 잔을 가을과 이정 앞에 놓았다.
가을은 추가로 주문한 잔을 자신의 잔 옆에 놓았다.
심호흡을 한 뒤 가을은 자신의 잔을 들어 주인없는 잔과 건배하듯 가볍게 부딪혔다.
가을:(엷게 미소지으며) 엄마 생신 축하드려요.
이정은 깜짝 놀라 가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평소처럼 입가는 웃음을 머금고 있었지만 눈빛이 너무나도 슬퍼보였다.
움직일 리 없는 와인잔을 바라보는 가을의 얼굴에는 한없는 그리움이 담겨있었다.
아마 자신도 은재를 떠올릴 때에는 저런 표정일거라고 이정은 생각했다.
가을: 하늘에서 축하 많이 받았어요? 분명 많이 받았을 거야.
나 오늘 인사동가서 그림 많이 보고, 엄마 좋아하는 한정식도 먹고, 이렇게 멋진 곳에 와서 와인 한 잔 드리는 거에요.
대학가서 처음 돈벌면 꼭 엄마랑 데이트하겠다고 약속했는데... 너무 늦었다고 화내는 거 아니죠?
어느 새 가을의 목소리에는 물기가 어렸다.
이정은 그저 가을의 얼굴만 바라봤다. 지금 이순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가을: 엄마 사랑해요. 내년 생신 때엔 더 멋진 선물 드릴게요.
다시 한 번 와인잔을 부딪힌 후 가을은 이정을 보고 생긋 웃었다.
이정은 가을의 눈에 눈물이 고인 것을 봤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어색하게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가을:(눈을 몇 번 깜빡거려 눈물 없애고) 오늘 우리 엄마 생신이에요.
이정: 그래... 어머님이 그림을 좋아하시나봐?
가을: 엄마 미술선생님이었어요. 내 병원비랑 약값땜에 빨리 교사 관두고 미술학원으로 옮기셨지만요.
이정: 그래...
가을:(와인잔 보며) 평소엔 괜찮은데... 이런 날엔 엄마가 미치도록 보고싶어요.
이정: ! (놀라서 가을 본다)
가을: 뉴칼레도니아에선 엄마는 늘 내 곁에 있다고 자신있게 말했는데... 그래도 견딜 수 없이 그리운 날이 있는건 어쩔 수 없네요.
(이정 보며) 선배는 나 이해할 수 있죠?
이정:(얼떨결에 고개 끄덕) 그, 그럼...
가을:(슬프게 웃는다) 이런 말 누구한테도 못해요.. 아빠한테도, 동생한테도, 잔디한테도... 말하면 다들 날 너무 걱정할테니까.
이정: 이해해. 그립다는 말, 보고싶다는 말 하고싶어도 못하는 그 마음.
가을: 고마워요 선배. (와인을 들이킨다)
이정:(놀라서) 그대 맘 알지만 그렇다고 와인을 소주처럼 원샷하면 곤란해.
가을:(실실 웃으며) 염려마세요 선배~ 오늘만 그리워할 거에요. 내일부터는 다시 씩씩한 가을이가 될 거에요.
그래야 엄마도 안심할테니까.
이정: 그대는 정말 착한 딸이네.
가을: 안그럼 엄마 슬퍼하시잖아요. 그건 그렇고...
(이정 얼굴을 똑바로 보며) 선배도 정말 좋은 연인이에요.
이정: 뭐?
가을: 선배도 계속 첫사랑 그리워하잖아요. 정말 사랑하지 않음 그렇게 보고싶어 하지도 않을 거에요.
이정은 머리를 망치로 맞은 것 같았다.
지금껏 모든 사람들이 다 이제 그만 은재를 잊으라고 했는데, 이 아이는 좋은 연인이라고 자신을 칭찬했다.
가을은 상기된 얼굴로 이정을 보더니 이해한다는 미소를 지었다.
가을: 다 이해한다구요. 사랑하는 사람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데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어요. 그럼 그건 사랑이 아니지.
이정: 정말... 그렇게 생각해?
가을: 그럼요. 사랑했던 기억이 다 남아있는데 보고싶어 미치는 거 당연하다고요.
그런데 말이에요...
이정: 그런데?
가을: 너무 슬퍼하진 마세요. 자꾸 그럼 이정 선배 가슴속에 있는 그 사람도 슬퍼지잖아요.
이정:(혼잣말) 은재가.. 슬프다..
가을: 그러니깐 행복하세요. 그래야 그 사람도 행복해요. (다시 남은 와인을 마신다)
가을은 말이 끝나자마자 자신이 너무 앞서나갔다고 생각했다.
그저 엄마가 보고싶다는 말만 하려고 했는데 어쩌자고 이정의 상처까지 건드렸을까.
후회가 밀려왔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으므로 그저 와인에만 집중하려고 했다.
부디 이정이 화내지 않길 바라면서.
자신의 눈치를 보는 가을을 보며 이정은 은재를 떠올렸다.
늘 안좋은 일이 생기면 은재는 자신의 기분을 풀어주려고 애를 썼었다.
자신이 실소라도 해야 겨우 안도했던 은재.
그런 은재라면 죽어서도 자신이 염려되어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돌아오려 할 거라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정: 명심할게.
가을:(이정 보며) 네?
이정: 은재를 위해서라도 꼭 행복해질게.
가을:(안도의 웃음) 예. 꼭 그러세요.
이정은 웃으며 팔을 뻗어 가을의 잔과 자신의 잔을 가볍게 부딪혔다.
가을은 물끄러미 이정을 바라보면서 속으로 엄마에게 말을 건넸다.
'엄마, 이 사람 내가 첨으로 반한 사람이야.
가슴속에 죽은 첫사랑 품고 있어서 아마 평생 날 봐주지 않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래도 이 사람 이렇게 계속 웃을 수 있도록 돕고 싶어.
대책없는 짝사랑이라도 엄마는 내 편 들어줄 거지?
어쨌든 나 첨으로 사랑을 시작하는 거잖아.
나 이제 다 컸다고 흐뭇해할 거지? 그래줄 거라 믿어.'
와인바에는 잔잔하게 노래가 흐르고 있었다.
가을과 이정은 아무말 없이 노래에 귀를 기울였다.
So lately, been wondering who will be there to take my place 정말 오랫동안 궁금해 했었죠. 누가 제 자리를 대신하고 있을까 말이죠
When I'm gone you'll need love to light the shadows on your face 나를 떠나갔을때, 그대는 그대얼굴의 그림자를 지울 사랑이 필요하겠죠
If a great wave shall fall and fall upon us all 만약 험란한 파도가 우리 위로 닥쳐온다면
Then between the sand and stone could you make it on your own 모래와 돌 사이에, 당신은 혼자 버텨낼 수 있나요?
If I could, then I would. I'll go wherever you will go. 만약 내가 할 수 있다면, 난 그대가 있는 곳 어디든지라도 갈 거에요.
Way up high or down low, I'll go wherever you will go 저 높이, 저 밑바닥 까지라도, 나는 당신이 있는 곳에 함께 할 거에요.
And maybe, I'll find out a way to make it back someday 그리고 어쩌면, 언젠가는 찾아내겠죠. 당신에게 돌아갈 수 있는 길을..
To watch you, to guide you through the darkest of your days 당신의 가장 괴로운 날들로부터, 당신을 보기위해, 지켜주기 위해...
If a great wave shall fall and fall upon us all 만약 험란한 파도가 우리 위로 닥쳐온다면
Then I hope there's someone out there who can bring me back to you 그러면 난 거기에 누군가 있기를 희망할거에요 날 당신곁으로 돌려줄 누군가를...
If I could, then I would I'll go wherever you will go 만약 내가 할 수 있다면, 난 그대가 있는 곳 어디든지라도 갈 거에요.
Way up high or down low I'll go wherever you will go 저 높이, 저 밑바닥 까지라도, 나는 당신이 있는 곳에 함께 할 거에요.
Run away with my heart. Run away with my hope. Run away with my love 내 마음과 같이 떠나세요. 내 희망과 같이 떠나세요. 내 사랑과 같이 떠나세요
I know now, just quite how my life and love might still go on 이제야 알았죠, 어떻게든 내 삶과 내 사랑이 주욱 함께 할것을
In your heart, in your mind I'll stay with you for all of time 당신의 가슴속에, 당신의 마음속에, 난 당신과 영원히 있을거에요.
If I could, then I would I'll go wherever you will go 만약 내가 할 수 있다면, 난 그대가 있는 곳 어디든지라도 갈 거에요.
Way up high or down low I'll go wherever you will go 저 높이, 저 밑바닥 까지라도, 나는 당신이 있는 곳에 함께 할 거에요.
If I could turn back time I'll go wherever you will go 만약 내가 시간을 돌릴수만 있다면 그대가 있는 곳 어디라도 갈 거에요
If I could make you mine I'll go wherever you will go 만약 내가 그대를 가질수만 있다면 그대가 가는 곳 어디라도 갈 거에요
가을: 노래 참 좋네요.
이정: 그러게...
-F4 라운지-
준표와 우빈은 다트 게임을 하고 있는 반면, 지후는 소파에 앉아 음악을 듣고 있다.
준표: 소이정 요새 통 안보이네.
우빈: 잔디 친구랑 데이트하느라 바쁜 모양이던데.
준표: 뭐?
우빈: 어제만 해도 같이 클럽에 가자고 하니깐 잔디 친구 만나야한다고 거절하던데.
준표:(얼굴 찌뿌리며) 그 녀석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우빈: 내가 보기엔 두 사람 잘 어울리는데 넌 뭐가 불만이야?
지후: 우빈이 넌 정말 그렇게 생각해?
어느 틈에 지후가 헤드폰을 벗고 준표와 우빈 옆에 서있었다.
지후의 표정은 평소처럼 무심해보였지만 준표는 지후의 눈에 걱정이 어린 것을 발견했다.
우빈: 야 깜짝 놀랬잖아. 윤지후 제발 인기척 좀 내고 다녀라.
지후: 송우빈, 정말 소이정과 추가을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
우빈:(어깨 으쓱하며) 뭐 둘 다 같은 상처가 있잖아.
사랑하는 사람 잃은 처지에 서로 위로해주는 거 나쁘지 않다고 보는데.
준표:(한숨쉬며) 그게 그렇게 단순하면 다행이게.
우빈:(준표와 지후 보며) 너희 둘,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거지?
지후: 때로는 모르는 게 약이야
우빈은 지후에게 더 캐물어보려고 했지만 문이 벌컥 열리더니 잔디와 가을이 들어오는 바람에 말을 잇지 못했다.
두 사람 모두 상기된 표정이었다.
준표:(얼굴 환해지며) 잔디밭 이제 오냐.
잔디:(라운지 둘러보며) 이정 선배는?
준표:(울컥해서) 네가 왜 이정이를 찾아?
가을:(재빨리 나서서) 이정 선배가 여기서 저 기다리겠다고 했거든요.
지후와 준표는 즉시 심각한 표정으로 가을을 바라봤다.
잔디와 가을, 우빈은 그런 두 사람이 이해가 되지 않아 서로 얼굴을 봤다.
지후: 두 사람 오늘 약속있어?
가을:(배시시 웃으며) 예, 같이 박물관 가기로 했거든요.
준표: 박물관?
잔디:(신나서) 내일부터 우송에서 앙코르와트 특별전을 하잖아.
그래서 이정 선배가 특별히 가을이 오늘 미리 보여준대.
아무래도 정식으로 전시회 시작하면 사람들 드글드글 몰려대니까.
우빈: 그래? (고개 갸웃)
잔디:(준표 보며) 우리도 가면 좋겠다.
준표: 네가 언제부터 그런 거 좋아했냐?
잔디:(발끈) 구준표!
가을: 그럼 다 같이 갈래요? (지후, 우빈 보며) 우리 다 같이 보는 거 어때요?
뜻밖의 제안에 잔디는 신이 나서 준표를 졸랐고 지후는 생각에 잠겼다.
우빈은 휴대전화를 꺼내 전화를 걸었다.
이정: 송우빈 왜?
우빈: 너 오늘 가을 데리고 너희 박물관 간다며?
이정: 같이 오려고?
우빈: 안되냐? 가을이는 같이 가잔다.
이정: 안될 거야 없다만...
우빈: 싫다 이거지?
이정: 나 10분 뒤면 도착해. 가서 말하자.
우빈: 알았다.
전화를 끊고 나서 호기심 찬 표정으로 자신을 보는 네 명에게 우빈은 웃으며 말했다.
우빈: 같이 가기 싫대.
잔디:(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뭐 그렇담 할 수 없네요.
지후: 잔디 넌 가을과 이정 어떻게 봐?
뜻밖에 말에 깜짝 놀라 준표와 가을은 잔디와 지후를 번갈아 봤다.
잔디도 예상치 못한 질문에 다소 놀랐지만 즉시 답을 했다.
잔디: 환상의 커플이라고 봐요.
가을:(당황) 잔디야!
준표:(심란하다) 우리 이만 가자 잔디밭.
준표는 외투를 챙겨 입고는 잔디의 손목을 잡아 끌었다.
잔디: 아 왜~
준표: 쟤네들이랑 같이 우송 갈 것도 아니잖아. 우린 어디 근사한 데 가서 저녁이나 먹자고.
잔디:(먹는 얘기에 화색돌며) 아 그래. (가을을 보며) 가을아, 이정 선배랑 데이트 잘 해.
가을:(얼굴 빨개지며) 데이트 아니라니깐.
잔디: 아니긴. 좋은 시간 보내라고.
준표는 고개를 저으며 잔디를 끌고 나갔다.
지후는 그런 준표를 보며 착잡한 표정을 짓다 잠시 후 소파에 드러누워 눈을 감았다.
테이블앞에는 우빈과 가을만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우빈: 이정이랑 잘 되가?
가을:(여전히 상기된 얼굴) 그런 거 아니에요.
우빈: 요새 둘이 자주 만나는 거 같던데?
가을: 그건요... (말을 잇지 못하고 발끝만 본다)
우빈: 지후나 준표는 두 사람 만나는 거 별로 좋아하지 않는 거 같은데 난 둘이 잘 어울린다고 봐.
가을: 아니에요...
우빈: 둘이 만나면 뭐하는데?
가을:(여전히 발끝 보며) 별 거 없어요... 그냥 전시나 영화보고 밥먹고 차마시고 얘기하고.. 그게 다에요.
우빈:(웃으며) 그거 데이트의 정석인데?
가을:(당황) 아니라니까요.
우빈:(진지하게) 난 말야. 이정이가 요즘에야 제대로 사는 거 같아 너한테 고마워하고 있어.
가을: 예?
우빈: 그 녀석 지난 1년간 진짜 사는게 사는게 아니었어.
가을:(담담하게) 알아요. 첫사랑 잃었다는 얘기 잔디한테 들었어요.
우빈: 우린 친형제나 다름없는데 그렇게 힘들어 할 때 하나도 도움이 되지 못하고 참 마음 아팠어..
가을:(공감하는 표정) 알 거 같아요...
우빈: 그렇게 갑자기 떠날 줄 몰랐지.
(씁쓸히 웃으며) 이정에게 천국을 보여주고는 지옥으로 떨어뜨려서 한때는 나도 원망했어.
가을: 교통사고였다면서요.
우빈: 정말 운전 조심해야하는데 말야.. 나란 놈도 참 문제라니깐. (억지로 웃는다)
가을: 언제 떠났나요? 이맘 때같은데...
우빈: 얼마전에 지났어. 가을 너 지혈안되서 난리치던 날 다음 다음날이 1주기였으니깐.
가을: 예?
가을은 순식간에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는 걸 느꼈다.
이정이 병원에서 자신을 향해 수술일자를 확인하던 충격받은 표정과 도서관에서 새로운 탄생일을 축하해주던 묘한 표정이 차례로 떠올랐다.
잘 맞지 않던 퍼즐이 한꺼번에 들어맞는 느낌이 들었다.
갑자기 새하얗게 질린 가을의 얼굴을 보며 우빈은 순간적으로 자신이 무언가 잘못했음을 깨달았다.
조금 전 자신이 판도라의 상자를 열은 것 같았다.
바로 그 때 문이 열리더니 이정이 들어왔다.
이정: 미안 가을양. 오래 기다렸지?
가을은 이정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듯 애써서 미소지으며 이정을 봤다.
가을: 아니에요. 저도 온지 얼마 안됐어요.
이정:(가을을 걱정스럽게 보며) 그대 어디 아파? 얼굴이 새하얘.
가을: 아니에요. 갑자기 냉기가 좀 느껴져서..(손으로 양팔을 문지른다)
이정:(가을의 이마를 짚으며) 정말 괜찮은 거야?
가을: 괜찮아요. 저 원래 추위에 약해서 가끔 가만 있어도 냉기 느끼고 그래요.
이정: 저체온증 걸린 거 같아. (우빈 보며) 여기 온도 너무 낮은 거 아냐?
우빈: 글쎄다...
이정은 창백한 가을이 걱정스러웠고, 우빈은 괜시리 죄책감이 들어 제대로 이정과 가을을 보지 못했다.
가을은 지금 이 상황이 너무나 불편해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가을: 저 정말 괜찮아요.
(시계 보고)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우리 빨리 박물관 가요. (자리에서 급히 일어난다)
이정: 정말 괜찮은 거야?
가을:(고개 끄덕) 그렇다니까요. 그러니까 빨리 가요.
저 정말 앙코르와트 유물 보는 거 손꼽아 기다렸다구요.
이정은 말없이 스카프를 풀어 가을의 목에 둘러줬다.
가을은 그런 이정의 행동에 놀라 멍하니 있었다.
이정: 그대 추위에 약하다면서 너무 얇게 입는 거 같아.
가을:(당황해서) 워, 원래 너무 두껍게 입는 게 몸에 더 나쁘댔어요.
이정: 피식, 말은 잘하네. 그래도 갑자기 냉기를 느낄 정도면 너무 얇은게 맞는 거 같은데.
가을: 그, 그건 순간이라니까요.
이정: 암튼 이제부터라도 조금 더 따듯하게 입으라고.
가을: 네 알았어요.
우빈: 두 사람 나 닭살 오르게 할거면 얼른 가지 그래?
이정: 피식, 알았다 임마.
(가을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이만 갈까 가을양?
가을: (웃으며) 예~
가을은 이정과 함께 라운지를 나가면서 다시 표정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우빈과 이정 모두 가을의 표정 변화를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두 사람이 나간 후 우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전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되짚어봤지만 알 수가 없었다.
지후: 넌 표정이 왜 그래?
우빈은 깜짝 놀라 지후를 봤다.
어느새 지후는 일어나 소파에 제대로 앉아있었다.
우빈: 너 자는 거 아니었냐?
지후: 아니 그냥 눈만 감고 있었어.
우빈: 그럼 다 듣고 있었겠네.
지후: 그래.
우빈: 내가 뭘 잘못한 거냐? 갑자기 가을 얼굴 새하얘지던데.. 꼭 쓰러질 거 같더라..
지후: 글쎄다...
지후의 표정은 심각해졌다.
그런 지후를 보며 우빈은 아무런 답을 듣지 못할 것임을 깨닫고 얼굴을 찡그렸다.